공항으로 가는 길은 한산했다. 기사가 운전해 가는 차안에서 간격을 두고 심어져 있는 가로
수들을 보았다. 너무나 정확한 간격과 똑같은
키와 가지들 푸른 잎새들은 마치 출근길 사람들의 모습 같았다. 똑같은 정장에 서류를 넣은
가방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들을 하고 회사로
가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 사람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시간에 쫓기는 듯한 표정들 아침부
터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은 표정들 회사에
가기 싫은 표정 등등 여러 가지 표정들을 하고 있다. 지금 스치듯 지나가는 가로수들도 자
세히 본다면 제각각 뻗은 가지 손들이 있고
누가 더 무거운 잎들을 들고 있는 지 경쟁하듯 덮여 있는 모습들도 다 다르게 보인다.
항상 바쁘게 살아야 하는 보희에게는 지금 시간이 쓸데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생각들을
할 여유란 것이 있어서 좋았다. 혜성 그룹에서
일년 째 일하고 있는 그녀는 물론 이 일말고도 할 일은 태산이었지만 회장 비서실에서 막내
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일이란 것이 회장의 둘째아들이 캘리포니아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이번에 완전히 돌아오는
데 공항에 가서 그녀보고 모셔 오라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비서 자리에
취직되었고 일년이지만 뭐든지 빨리 배우는 성격
때문인지 그녀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어서 그냥 하나의 과정이려니 생각할 뿐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회장의 아들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회장의 외모
를 생각하니 그 둘째 아들도 외모는 영 아닐
것 같았다. 회장은 160cm의 짧달 막한 키에 둥글둥글한 체형이었고 얼굴도 동그란데 머리
까지 대머리였다. 표정은 욕심이 하나
가득이었다. 뭐 부모의 피를 똑같이 닮을 수는 없지만 첫째 아들인 황용민 상무는 정말 똑
같이 생겼고 막내딸은 어머니를 닮아서 인지
귀엽고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였다. 옛 말에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했는데 성격말고 외모도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고약한 성미의 아들이 연상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벌써 공항 안으로 진입했다. 옷매무새를 만질 시간도 없이 부랴부랴
차에서 내렸다.
“김기사님, 금방 나올 테니까 딴데 주차하지 마시고 저쪽에서 대기해 주세요.”
말하면서 보희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비행기는 도착했을 것이다. 지연이 되지 않은 이상. 회사에서 출발하고
얼마 가지도 않아 시내에서 접촉 사고가
생긴 것이었다. 물론 양방에 책임이 있었지만 30분의 실랑이 끝에 해결을 보았다. 그래서 결
국 15분이 늦어 버렸다.
기다리다 가족 내력처럼 화가 나서 그녀에게 불똥이 튈까 봐 걱정이었다. 잘잘못을 따지기
도 전에 불호령부터 내는 회장의 성격을 본다면
역시 가족인 그 아들도 똑같은 행동으로 그녀에게 화를 낼 걸 같았다. 뛰어도 좁은 치마 때
문에 뛰는 게 쉽지가 않았다. 차라리 바지
정장을 입을 걸 하고 후회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말이다. 에스컬레이터
를 날 듯이 뛰어 올라 갔다. 평일이라도
사람들이 만만치 않게 있었기 때문에 앞의 사람들에게 연신 ‘실례합니다.“를 해야 했다.
숨을 헐떡이며 출국 장소로 가서 전광판을 보니
이미 비행기는 들어 왔다. 그것도 5분 빨리 20분전에 말이다. 평소엔 그렇게 시간이 제각각
이더니 오늘 따라 일찍 착륙했다는 생각에
괜히 비행기 기장에게 화가 났다.
허탈한 생각으로 플랜카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다른 장소로 가려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뭔가 단단한 물체에 부딪힘과 동시에
등이 뜨거웠다. 그녀의 입에서는 비명이 손은 착 달라붙어 뜨거운 옷을 들어내느라 난리였
다.
“앗 뜨거워!”
고개를 홱 돌려보니 그 물체였던 건장한 남자 또한 새하얀 니트에 갈색으로 얼룩이 진 앞섬
을 들어 올리느라 난리였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녀와 눈이 마주쳤지만 화가 난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미안한 생각보다 정말 멋지다는 단어밖에 머리 속에 떠오르지가 않았다. 너무나 큰
키였다. 그녀보다 20cm는 클 것 같았다.
그리고 적당히 그을린 피부와 날카롭지만 너무나 검고 깊은 눈망울이 그녀의 마음을 설레이
게 했다.
갑작스런 그런 생각을 날려 버리듯 그녀가 더듬거리며 사과에 나섰다.
“어머, 정말 죄송해요. 뒤에 누가 있다고는 생각도 못하고...세탁비를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옷값을 배상해 드릴께요.”
옷은 딱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가격으로 보였다. 그녀가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려 하는데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순간의
느낌이란 전기가 통한 느낌이랄까, 절대 정전기는 아니었다.
“네? 왜...”
그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세탁비는 됐고 커피나 한잔 사주시죠?”
“네?”
“마시려던 커피를 쏟았으니 새로 사주셔야 맞지 않겠소?”
이 남자의 꿍꿍이는 무엇일까, 나한테 설마 관심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가 환하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을 하자 입가에 움푹 패인 보조개가 보였다. 그냥 봐도
잘 생겼는데 보조개까지 보이며 웃자 보희의
마음이 녹아 내릴 것 같았다.
그녀는 콧등 위에 있는 애꿎은 안경을 고쳐 썼다.
“그게 말이죠. 옷을 봐서는 커피 한잔으론 안 될 것 같..”
또 그가 말을 자른다. 생긴 거와 달리 너무 없이 말이다.
“그럼 커피도 하고 저녁 식사도 함께 하겠습니까?”
너무 어이가 없는 사람이다. 아마도 여자를 꼬시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남자 같았다.
“이것 보세요. 제 말을 끝까지 들어 주실래요? 저는 옷이 비싸 보이니까 커피 한잔으론 안
되고 옷을 변상해 드리겠다는 소린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중요한 분을 배웅하러 왔기 때문에 그쪽하고 커피 한잔
할 시간이 없어요.”
그녀의 빠른 말 공격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오?”
“저한테는 아주 중요하죠. 저의 회장님 자제분이신데 지...제가 그쪽한테 이런 말까지 할 필
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알았습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식사나 합시다.”
그는 그녀가 돈을 내밀기도 전에 뒤돌아서 가 버렸다.
“이봐요? 이봐..”
소리쳐 불렀지만 그는 뒤도 안 돌아봤다.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설레이는 사
람을 만난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 일을 생각하고 그의 얼굴과 외모를 생각
하기에는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보희는 회장 아들인 황태석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그녀가 만든 플랜카드를 들어 보았다.
‘혜성 그룹 황태석’이란 문구만 달랑 써
놓았다. 그녀는 그 플랜카드를 들고 공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창피함도 무릅쓰고 공항
내에 있는 상점이란 상점은 다 뒤졌지만 40분
동안 별 특별한 소득이 하나도 없었다. 옷은 서늘한 냉방 때문에 마르지도 않고 얼룩이 진
채로 돌아다녀야 했고 다리는 하이힐 때문에
아프기만 했다. 기다리다 그냥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결국 포기하고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박부장님, 최보희입니다. 차 접속사고 때문에 좀 늦었는데 그 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죠?”
그녀는 혼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부장은 더없이 일 처리에 깔끔한 사람이었다. 하지
만 그녀는 그의 화보다 더한 소리를 들었다.
“최대리 됐으니까 그만 들어오게. 아까 김기사한테 전화가 왔는데 도련님을 모시고 오는
길이라고 하더군. 근데 최대리는 택시 타고 들어
와야겠어. 도련님이 바쁜 일이 있다면서 최대리를 기다릴 시간 없다고 가자고 했다더군. 영
수증 가지고 들어오면 회사에서 처리해 줄
테니까 빨리 들어오게.”
뚝... 일하면서 이보다 더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그녀는 들어본 바가 없었다. 매정한 인간
같으니라고.
돈 있는 놈들이 예의는 공부하면서 버려 버렸나 그런 무경우가 어딨담. 차라리 아까 그 남
자하고 차나 마실걸 하고 생각했다.
씩씩대던 그녀는 플랜카드를 한 번보고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찢어서 쳐 박았다. 그리고 택
시 정류장으로 가서 모범 택시를 잡아 탔다.
다리품을 팔은 만큼 그녀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안심하고 편안한 모범 택시를 타고 회
사로 돌아갔다.
태석은 5년 만에 서울에 돌아 왔다. 그동안은 캘리포니아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따느라
올 시간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이 집
식구들하고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에 발도 들여놓기 싫은 이유가 더 컸지만 말이다.
너무나 가식적인 황씨 인간들이었다. 필요에
의해 웃음을 판다.
그를 배웅 나온 그 아가씨가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몸에 착 달라붙는 짧은 흰색 원피
스에 웨이브 진 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뒷모습만 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이 궁금해서 가까이 갈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작은 플랜카드에 눈이 먼저 갔다.
황회장이 보낸 사람이란 생각에 실망을 하고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녀가 그에게 부딪쳐서 막
뽑은 커피가 쏟아졌다. 물론 화를 낼
심사였지만 뭐랄까 그녀의 얼굴을 보고 금방 화가 사라졌다. 안경을 쓴 모습은 딱딱하게만
보였지만 놀라서 커다랗게 변한 검은 눈동자와
풍성한 그녀의 입술이 더 없이 섹시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언제부터 저렇게 깐깐해 보이는 스타일을 좋아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그냥 김기사를 보자 마자
집으로 와 버렸다. 다음에 그녀를 만나게 되면 왠지 즐거운 일 하나를 만들어 놓아서 그런
지 재밌었다. 평소 장난을 좋아하지 않던
그였지만 그녀는 그에게 흥미를 자극해 주었다.
그녀 생각을 지우고 앞으로 일을 생각하니 벌써 황회장의 집에 당도했다. 그 집을 보니 좋
았던 그의 기분이 나빠졌다.
그가 10살 때 이 집으로 호적을 옮긴 그때부터 그는 다시 그의 성을 바꿀 수 있는 날을 기
다리며 그들의 가식적인 호의를 참아야만
했다. 그리고 회사를 되찾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말이다.
그는 으리으리한 대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후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일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기계음을 타고 들렸다.
“태석입니다.”
곧 문이 열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호화로운 집안에 없는 것 없는 고가품들의 가구들과 명화들 그 사이에 앉아 있는 이 집의
안주인 황용 주의 아내가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곱게 한복을 입고 앉아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싸늘
한 눈빛과 입가에 맴도는 미소가 그를
맞이했다.
“어머, 태석이 왔구나. 어서 이리 앉으렴. 아줌마. 아줌마?”
“네.”
“태석이 차 한잔 갖다 줘요.”
아주머니께 차를 시킨 후 그녀가 물었다.
“오랫동안 얼굴도 안 비치고 정말 섭섭하구나. 그래, 이제 완전히 들어 온 거라고?”
“네.”
그가 짧고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떨리는 듯 했다.
“그래 아버지는 뵙니?”
“아니요. 옷에 얼룩도 지고 피곤해서 그냥 여기로 왔습니다.”
“아버님이 서운하시겠다. 회사에서 바로 보시려고 김기사까지 달려 보냈는데 말이다. 차 한
잔하고 올라가서 쉬려무나. 방은 잘 치워
뒀어”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아닙니다. 여기 갖다 둔 짐을 챙겨야죠. 그래서 왔습니다.”
그녀의 우아한 한 쪽 눈썹이 활을 그리듯 올라갔다.
“무슨 소리니?”
“친구한테 회사 근처에 아파트 하나 얻어 두라고 했어요. 오늘 바로 들어 갈 수 있게 꾸며
놓았다니까 여기 맡겨 둔 짐이나 대강
정리하고 있다가 이삿짐 센터에서 가지러 오면 바로 옮겨 실을 수 있게 하려고요.”
그녀의 표정에 깜짝 놀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니? 너 온다고 방도 새로 꾸며 놓았는데. 아버지가 집에서 살 거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가 집에서 지내야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황회장이 지시한 모
양이었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했다. 그는 그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죄송하지만 전 그게 편합니다. 그게 사모님하고 회장님하고 신경 덜 쓰게 하는 일일텐요.
전에 쓰던 방에 제 짐이 다 있겠군요.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정부를 찾아 짐 챙길 상자를 부탁하고 올라갔다.
그가 계단 올라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전화를 걸었다. 태석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
었다. 그가 계획에 차질을 일으켰다고 말할
것이다. 더 큰 신경을 쓸 일이 생겼다.
태석은 방안에 들어가서 앨범부터 챙겨 들었다. 그의 가족이 함께 찍었었던 소중한 추억이
었다. 앨범은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유일한 낙은 앨범을 보는 일이었고 복수의
칼날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원동력이었다.
사고로 위장하여 황회장은 그의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고 태석만이 절대 사고가 아니었
음을 알았다. 어렸기 때문에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 그에게 더 없는 한으로 남았다. 이젠 황회장에게 죄의 대가를 물
게 할 생각이었다.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오빠, 언제 왔어?”
막내 민지였다. 그녀는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어렸을 때는 그가 친오빠인 줄 알았었지만 그
녀도 황씨 가문의 한 명이라서 그런지 눈치가
빨랐다. 부모가 몰래 하는 대화를 엿듣고 나서 그가 친오빠가 아닌 것을 알고 목을 놓아 울
던 것이 생각났다. 그녀는 그에게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녀 때문에 황회장에게 복수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하질
않았다.
“오빠 너무 섭섭해. 그동안 집에도 오지 않고 캘리포니아에 기껏 갔더니 여행이나 가고 연
락도 안하고 너무했어.”
그녀가 새침하게 그의 팔에 안기며 말했다.
“미안해. 그동안 정신 없이 바빠서 말이야. 우리 민지 이제 여자 다됐구나.”
그의 팔에 안긴 민지를 떼어 내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철부지 어린 동생이 이젠 대학생
이라고 화장부터 옷까지 상당히 세련되어졌다.
황회장의 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워 졌다.
“이거 왜 이러셔. 이젠 남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쫓아다닌다고. 옛날의 황민지가 아니
지. 그건 그렇고 오빠 이제 집에서 살
거라면서?”
순간 그의 입가에 그나마 서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민지가 눈치를 보더니 덧붙였다.
“역시 아빠만의 생각이셨군. 오빠가 여기서 살 리가 없지. 괜히 헛 꿈만 꿨네. 좋다 말았잖
아.”
“미안하다. 밖에서 혼자 사는 게 편하고 회사에서 왔다갔다 하기도 피곤해서.”
민지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오빠. 아빠는 미워해도 난 미워하면 안 돼. 그리고 오빠 집에 자주 놀러갈거야.”
“집에는 자주 오지마. 어차피 집에 잘 있지도 않고 밤이나 늦게 들어갈텐데. 전화하면 저녁
은 사줄게.”
서운해하는 표정이 역력한 민지였지만 애써 내색하려 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 대신 비싼 것만 사 달라고 할거야. 오빠 내가 짐정리하는 거 도와 줄게.”
민지는 서운한 표정을 보이는 게 싫은지 얼른 몸을 돌려 옷장에서 옷을 꺼내 정리했다. 태
석은 민지의 마음을 모르진 않지만 크게 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남자로 보는 것도 애써 모른 척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곧
일이 크게 터질텐데 그녀가 속상하게 할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짐정리를 마치고 이삿짐 센터에서 그가 지시하는 물건만 들고 갈 수 있게 지시를 했다. 그
리고 황회장 부인에게 대강 목례만 하고
민지에게는 손을 잡아 주고 그의 새 아파트로 향했다.
보희는 사내 도서관에서 박부장이 지시한 자료를 찾으러 왔다가 볼 일을 마치고 엘리베이터
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동생과
놀아 주다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몹시 피곤했다.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미운 7살이라서
그런지 말썽도 많이 일으켰다. 늦게 까지
일하는 보희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면 잠 든 척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들어오면 어김없
이 깨어났다. 새벽에 동생 별이랑 놀아 주는
것도 이제는 힘에 부쳐서 제대로 놀아 주지 못해 항상 미안하기만 했다.
기다리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줄도 모르고 멍청히 다른 생각을 하다가 그녀가 문이 열
리는데도 타지 않자 한 남자가 문을 닫지 않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타긴 탔지만 결국 그녀가 서둘러 타다가 발이 걸려 엘리베이터 안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카
피한 종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넘어진 충격으로
안경이 벗겨졌다. 무엇보다도 창피해서 얼굴이 불같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단 한 사
람만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고 자신을 위로했다.
“괜찮소?”
어딘지 들어본 저음의 목소리, 웃음을 참는 듯 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 네.”
그녀가 일어나 앉아 흩어진 서류들을 주워 모으는 것을 그 남자가 도와 주었다. 그녀에게
서류를 건네는 손가락이 그녀의 손끝에 닿아
그녀가 깜짝 놀랐다.
“고맙습..”
감사하다고 말하려고 고개를 들던 그녀. 할 말을 잃었다.
“당신.. 그때.. 그...”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또 만났군요. 이제 식사를 해도 되겠군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다.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군요. 그때 다시 만나면 식사하기로 했잖소.”
너무나 당연스레 말하는 그 때문에 보희는 자신이 진짜 약속을 한 줄로 착각할 뻔했다.
“그건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말하고 사라진 걸로 아는데요. 서류 고마워요.”
그가 준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가 준 안경도.
안경을 쓰는 그녀를 보며 그가 말했다.
“안경을 안 쓰는 쪽이 훨씬 인상이 부드럽고 예쁜데 왜 굳이 쓰는 거요?”
“눈이 나빠서요.”
그녀가 층 버튼을 누르려는데 이미 40층에 버튼에 눌러져 있었다.
“요즘은 콘택트렌즈도 있는데 안경은 불편하잖소. 키스하기도 힘들고.”
그가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입술을 훑더니 그녀의 몸매까지 훑고 지나갔다.
“키스는 하나도 안 불편합니다. 좀 무례하시군요.”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하려고 했다. 하지만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남자 앞에서 이렇게 당
황하기는 처음이었다.
“무례했다면 사과하죠.”
태석은 그녀의 사원증을 보고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최보희. 그의 마음을 묘하게 흥분시키는
여자였다. 이처럼 가슴에 바람을 일으키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까만 색이었다. 안경테도 까만 색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왠지 어울리지가 않았다. 벗겨서 큰 눈망울을
바라보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풍성한 입술도 갖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에게 딱 맞는 키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작은 키도 아니었다.
그하고 20cm정도 차이가 났으니까 말이다.
“회장실에는 무슨 볼 일이시죠?”
깔끔하게 검은 정장에 은회색 넥타이를 차려 입은 그를 보며 그녀가 물었다.
“볼 일이 있어서 말이오. 그쪽은 무슨 일이오?”
“저야.. 보좌관입니다.”
몰랐다는 듯 그가 눈을 빛냈다.
“그렇군요.”
그녀가 더 물어 볼 수도 없이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가 그녀에게 먼저
내리라며 한 쪽으로 물러섰다. 그녀도
고개를 숙이며 먼저 내려섰다.
문은 양쪽으로 나 있었다. 한쪽 문은 회장실 한쪽은 중역들만 쓸 수 있는 회의실이었다. 그
녀의 뒤를 따라 그가 따라 왔다. 그녀가 문
앞에서 멈췄다.
“정말 여기에 볼 일이 있으신 가요?”
그녀가 의심쩍어서 물어 보았다. 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를 제치고 문을 열
고 들어갔다.
“이봐요.”
그녀가 그의 팔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박부장님이 그녀를 보고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둘째 도련님 오셨습니까?”
반갑게 맞이하는 박부장님과 함께 일어나는 김소정과장님을 보고 보희는 경악을 금치 못했
다.
보희는 잡았던 팔을 놓고 얼른 사과를 했다. 찾아 헤매던 사람이 이 인간이란 사실이 믿겨
지진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회장님의 자제 분이신 줄 모르고 죄송합니다.”
보희가 허리를 굽히며 사과했다.
“괜찮소. 모르고 한 일인데.”
그는 황회장 비서이기 전에 아버지의 오랜 비서였던 그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아저씨, 안녕하셨어요? 건강엔 별 일 없으시죠?”
“아직까진 별 일이 없습니다. 회사도 잘 돌아가고 말이죠. 최대리의 일은 용서하세요. 일년
밖에 일하지 않아서 도련님을 모르고 한
일이니까.”
“물론이죠. 회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가 회장의 얘기를 꺼내자 그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가 인터폰으로 태석이 온 사실을 알렸다.
“네, 알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돌려 그를 안내했다.
태석이 안으로 들어가자 박부장님이 그녀를 보았다.
“최대리 가서 차 좀 안으로 들이게. 앞으론 얼굴 잊지 말고.”
보희는 너무 기가 찼다. 그때 자신을 공항에 버리고 간 예의 없는 황회장의 아들이 그라는
사실에 화가 너무 났다. 그리고 그때 일을
잠시 잊고 죽을 죄를 지은 것처럼 굽신거리며 사과한 일도 너무 화가 났다. 그는 아마 그때
내가 들고 있던 플랜카드도 보았을 것이고
커피를 엎질렀다고 복수심으로 자신을 버리고 갔던 것일까 하고 생각하니 머리에 열이 났
다.
보희는 차를 끓여서 쟁반에 받쳐들었다. 그리고 회장실 문으로 가서 노크를 한 후에 들어갔
다.
그녀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그의 시선이 자신한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확신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회장님의 시선도 느껴졌다.
보희가 나가고 태석은 얘기를 계속했다.
“제 자리는 마련해 두셨죠?”
태석이 회사에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두기로 한 회장의 예전 말을 끄집어냈다.
“물론이다.”
“전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배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을 했다.
“내 생각도 그렇구나. 너만한 인재도 구하기 힘들고 애써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
각한다. 경영 이사 자리를 준비해 두었다.
일은 언제부터 하겠니?”
“3일뒤 월요일부터 하겠습니다. 중역회의는 언제 있습니까?”
그가 묻자 황회장이 대답했다.
“다음주 수요일에 있을 예정이다. 그때 너의 존재도 소개시키고 싶구나.”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기회를 보고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그리고 제 사무실에 기용할 비서 말씀인데요.”
그가 심각하게 말을 하자 황회장이 나섰다.
“걱정 말아라. 좋은 여비서로 구해 놓았다. 경력도 되고 일도 확실하게 잘하고 말이다.”
“아니요. 아까 들어왔던 최보희비서로 하고 싶습니다.”
황회장은 약간 동요하는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말이냐? 최비서는 일년밖에 일하지 않아서 너한테는 별로 도움도 안 될 테고
능력이 좋아서 내가 비서로 데리고 있으면서
박부장이 잘 키우고 있는데 말이다. 그냥 내가 구해 놓은 비서로 하지.”
“아니요. 저 비서가 괜찮을 것 같군요. 박부장님이 가르치셨으면 일년이 아니라 반년만 일
했어도 확실한 보증수표겠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데로 해 주시죠?”
태석의 태도가 너무나 분명해서 황회장은 어쩔 수가 없었다. 황회장은 태석이 어떤 일을 하
고 다니는지 알 수 있게 그가 심어 놓은
비서를 통해 알아내려 했는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의 주식만 아니었다면 그가 태석에
게 이렇게까지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 그가 더
반대하면 태석에게 그의 의도만 들킬 것 같아서 그가 하자는 대로 하였다.
“뭐 네가 좋다면야 어쩔 수 없지. 너랑 같이 일할 비서 일은 없었던 걸로 하기로 하자. 그
건 그렇고 나랑 점심이나 먹기로 하자.
집에 오자마자 나가서 같이 얘기할 시간도 제대로 없었잖느냐?”
그가 점심을 권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닙니다. 선약이 있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회장도 따라 일어섰다. 너무나 작은 황회장은 그의 가슴팍에나
닿았다. 서로 다른 외모에서부터 서로가 친부
자지간이 아님은 누가 보아도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석이 나간 후에 보희는 회장실로 불려 들어갔다. 혹시 태석이 자신의 실수를 치사하게 회
장님께 이른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지만 그녀는
또 깜짝 놀랄 사실을 알았다.
“최대리.”
담배를 손에 들고 있는 황회장의 심각한 목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네?”
“미안하지만 회장실 보좌일을 그만 둬야겠네.”
그녀는 커피 한잔 엎지른 대가 치고 너무 크다는 생각에 억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커피 한잔 엎질렀다고 절 해고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황회장은 몰랐다.
“최대리가 무슨 말하는지는 모르겠고 월요일부터는 황태석이사의 비서로 일했야겠네. 내
둘째 아들인데 월요일부터 정상 출근 할걸세.”
그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황태석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황회장은 그의 둘째 아들이란 말을
하면서 못마땅한 기색이 너무나 완연한 모습이었다. 부자 사이가 안 좋은가 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자네한테 부탁이 있네. 황태석이사의 스케줄 중에서 이상한 점이 있으면 나한테
직접 보고하게. 잊지말고 알았나?”
“왜 그런 일을 지시하시는 겁니까? 회장님?”
그녀의 질문에 무슨 말이 많냐 면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라고 역정을 내었다.
이상한 부탁이었다. 황회장은 황용민상무의 스케줄도 관여를 하지 않았었다. 근데 황태석에
게만은 예외 인가보다. 뭔가 사고를 잘 치는
성격일 거라고 보희는 생각했다. 보희는 황회장에게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하고 나왔다.
박부장과 김소정과장은 그녀의 발령을 듣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들은 그 날 점심때 보
희의 송별회를 미리 해주었다. 일년간 열심히
일한 동료이자 제자를 잃은 슬픔이 크다고 그들은 그녀를 위로했다.
보희는 다음날 회사 일이 끝나고 잠시 집에 들렸다. 자신보다 3살 어린 남동생 세민이가 막
내인 여동생 별이하고 놀아 주고 있었다.
“어제 피곤했지, 세민아?”
그녀가 안경을 벗고 검은색 콘택트렌즈를 빼며 물었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술마시러 오는 사람이 많더라. 그 비싼 술들을 어떻게 먹나 몰라.”
세민이는 보희가 소개시켜 준 보스라는 술집에서 웨이터 일을 하고 있었다. 군대 갔다가 2
달 전부터 일년만 일하고 2년 남은 학교를
자기 돈으로 다니겠다는 억지에 그녀는 두손을 들고 그녀가 소개시켜 준 곳에서 일하고 있
었던 것이다. 보희가 20살 때부터 7년을
힘들게 일하는 것이 도저히 미안해서 그렇다는 이유였다.
사실 보희는 자신이 일을 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라 희생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고 동생들 뒷바리지에만 신경을
썼다. 어머니가 보희의 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7년동안 결혼을 세 번을 했고 그 결과는
아주 좋지 않아 결국 보희는 집안의 생계를
이어야만 했다. 어머니와 결혼 한 남자들은 하나같이 사고로 죽었다. 별이의 아버지는 사업
이 부도가 나자 자살을 했고 어머니는 별이를
40이라는 늦은 나이에 갖으셨지만 양부의 자살로 큰 충격을 받아서 인지 그 소식을 접한 날
예정일보다 한 달 빨리 별이를 낳았고
정신이 나가 버렸다. 그래서 자기 자식도 기억을 잘 못했다. 심장까지 나쁜 엄마는 결국 정
신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고 그녀는 돈이
없었다.
집안에 돈이라고는 보희의 친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겨 둔 시골에 있는 땅이 전부였다. 그 땅
을 팔아 별이와 어머니의 병원비를 일단 하고
보증금 딸린 월세집을 얻어서 3년을 살았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고 선배가 소개시켜 준 카지노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처음 그 일을 하기 전에는 하루 먹기에도 힘에 부쳤지만 손재주와 밝은 성격으
로 팁을 상당히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월급도
괜찮았고 팁도 괜찮았기 때문에 보희는 복학 후에도 그 일을 병행했다. 다행히 등록금은
어렵게 탄 장학금으로 대신 할 수 있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지노에서 일을 계속 해야 했다.
그러다가 지금 일하는 곳에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하여 그녀는 자리를 옮기게 되었
다. 카지노에서 3일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을 지금 일하는 곳에서는 하루에 벌 수도 있었고 그 이상을 벌 수도 있었다.
대신 밤에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불편했고 이곳에서는 도박이 불법이어서 잘못하면 그녀에게
도 피해가 올 수 있어서 늘 불안하긴 했다.
하지만 이 곳에서의 수입으로 지금은 방 세 칸인 전세로 옮길 수도 있었고 어머니를 위험한
정신병원이 아닌 일반 요양소로 옮길 수도
있었다. 세민이의 등록금과 생활비 또 별이를 돌봐 줄 수 있는 가정부도 구할 수 있어 다행
스런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곳에서 구해
준 가정부는 불법 체류 중인 여자애였고 그녀가 데리고 있기로 했다. 그 가정부도 크게 고
단하지 않고 숙식이 제공되어서 일도 열심히 해
주었고 중국에 있는 어린 동생들을 많이 돌봤었기 때문에 별이도 잘 돌봐 주어서 그녀는 학
교와 일터를 마음놓고 다닐 수 있었다.
“누나 일을 좀 줄이지 그래?”
세민이 걱정이 되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안 돼. 내가 일을 줄이면 엄마 요양소 비용은 어떡하니? 간병인 비용은? 별이도 계속 크
는데 별 수 있어? 어디서 돈이 떨어지면
모를까? 자꾸 그런 말해 봐야 나한테 씨도 안 먹혀.”
보희는 콘택트 렌즈 때문에 뻑뻑해진 눈을 지그시 눌렀다 떼었다. 한국사람은 검은 색이나
갈색눈을 가졌지만 그녀는 유전자가 이상한지
눈이 연두색과 초록색이 교묘하게 섞인 눈이었다. 병원에서는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하
니 별 일은 없지만 어려서부터 많은 놀림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녀를 튀기라고 놀리는 아이들이 많았고 어른들은 신기하게 바라보았었다.
그래서 회사에도 렌즈에다가 도수 없는 안경을
쓰고 일했다. 물론 안경은 쓸 필요는 없지만 그녀가 일하는 곳에서 가끔 회사 중역들이 오
곤 하기 때문에 회사에 들키지 않기 위한 위장
전술이었다.
“누나도 남자도 만나고 결혼도 해야지.”
“남자는 너있고 결혼은 하면 애 낳는 건데 별이 있으니 됐고 뭐가 걱정이니.”
너무나 황당한 대답이었고 늘 듣는 말이지만 세민이로서는 미안했다.
“누나가 우리 때문에 너무 고생하니까.. 여자로서의 삶이란 것이 있잖아. 누나가 가장 노릇
하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
“쓸데없는 걱정말고 빨리 졸업하는 길이 날 돕는 거야. 네가 하도 졸라서 일하게 해주지만
네가 공부 열심히 해서 검사든 변호사든
판사든 뭐든 돼서 날 도와 주면 되잖아. 몇 년만 더 참자. 그리고 엄마한테도 자주 가 봐.
기억 안 하려는 분 자꾸 얼굴 보여서
기억나게 해야지. 요즘은 심장도 더 나빠 지셨다는 구나. 누나는 일이 바빠서 잘 못 가니까
너라도 자주가 봐.”
별이가 어느새 그녀 곁에 다가와 앉았다.
“엄마, 별이도 엄마가 일 안 했으면 좋겠어. 별이랑 많이 안 놀아 주고.”
별이는 그녀를 엄마로 부른다. 낳자 마자 엄마가 병원에 입원되어서 그녀와 세민이가 엄마
아빠가 되어 주었다.
“미안해, 별이야. 어쩔 수가 없구나. 근데 별이 유치원에서 남자 친구 생겼다며? 어떻게 엄
마를 두고 그럴 수 있니.”
보희가 우는 척을 하자 별이가 우물우물 거렸다.
“엄마, 그래서 속상해? 그럼 별이 남자 친구 버릴래. 엄마 그러니까 울지마.”
별이의 귀여운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좋다는 남자를 차다니. 버린다고 하면 안 돼. 찬다고 해야지 알았어?”
“알았어, 엄마. 아빠가 별이 머리 따 줬어. 예쁘지?”
아빠가 된 세민이가 따 준 머리를 자랑하며 돌아선다. 양 갈래로 따 놓은 머리는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아빠가 머리 진짜 못 딴다. 엄마가 다시 해줄게. 이리 와 봐.”
“누나는 내가 뭘 어쨌다고 다시 따. 그냥 둬.”
세민이가 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별이의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애 다쳐. 내려 놔. 빨리.”
그들이 장난치고 웃는 사이에 가정부이지만 지금은 식구나 다름없는 츠량이 들어왔다.
“보희언니, 점심식사 차려 놨어요.”
억양만 빼면 츠량은 이제 한국말을 아주 잘한다. 중국에서 건너 온 츠량은 처음 그녀가 데
려 왔을 때 한국말을 하나도 못했다. 17살
어린 나이에 불법으로 한국에 건너왔고 다행히 보희를 처음 만났다. 한국 사람들 치고 불법
체류자에게 해코지 안하고 잘 데리고 있는
사람들이 드물었고 츠량은 너무나 연약했다. 지금은 잘 먹고 해서 그런지 이제 숙녀티가 너
무 많이 났고 중국 여자들이 이쁘다는 말을
츠량을 보고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보희와 세민이 열심히 가르쳐서 이제는 읽고 쓰
고 말하기도 무척 잘했다.
“세민아, 별이야 밥 먹자.”
보희가 세민과 별이를 부르고 밖으로 나가는 길에 세민이 츠량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왜그래?”
보희가 묻자 세민이 당황하면서 그냥 나갔다. 츠량을 쳐다보자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것도 모르고 보희가 츠량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츠량, 감기 기운 있는 거 아냐? 5월이나 됐는데 웬 감기지? 약 꼭 챙겨 먹어. 아니면 언니
랑 언제 병원이라도 가자.”
“네.”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사를 하다가 세민이를 불렀다.
“세민아, 있다가 같이 일 나가자. 나 조금만 잘 테니까 1시간 전에 깨워, 알았지?”
세민이 고개만 끄덕이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보희는 새로 부임하게 된 황태석 이사가 먼저 출근하기 전에 출근할 작정으로 8시10분쯤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실 안에
들어가기 전에 원두커피를 뽑아서 한잔 마신 후에 이사의 책상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막 커
피를 마시려고 잔으로 입을 갖다 대다가 이사실
문이 벌컥 열려서 입천장을 데었다.
“앗, 뜨거워.”
그녀는 데인 입을 어쩔 몰라 하며 손부채질을 해 보았다. 쓰라리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
는 것 같았다. 보희가 야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일찍 나와서 사람을 고생시키는 건지. 무슨 커피하고 저 남자하고 난 뭔가
악연이 있는 걸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렇게 일찍 출근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아서 더 놀랐다. 황회장은 조찬 약
속이나 회의가 있지 않은 이상 항상 9시
정각에 출근을 했다.
“최보희씨, 일찍 나왔군. 나도 커피 한잔 부탁하겠소.”
그러고는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보희는 신경질 적으로 커피 잔을 찾아 원두커피를 붓고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미 서로의
이름을 알아서인지 황태석은 그녀에게
통성명이라든가 의례적인 인사 조차 건네지 않았다.
“일찍 나오셨습니다. 이사님.”
예의적인 말을 했다. 그도 그녀의 대꾸에 답했다.
“보희씨도 일찍 나왔군요. 원래 이렇게 빨리 나옵니까?”
“아닙니다. 오늘 이사님 첫 부임날이라 일찍 나왔습니다. 저는 항상 9시 10분 전에 출근합
니다.”
“항상?”
그의 짙은 눈썹이 올라갔다.
“물론 가끔은 더 일찍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아니오. 그냥 물어 봤소. 강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보희씨도 커피 들고 와서 여
기서 마시도록 해요. 할 말도 있으니까.”
그가 그녀에게 자리를 권였다.
“아닙니다. 커피를 마실 수가 없어서요.”
그녀가 저도 모르게 새침하게 말한 것에 놀랐다. 하지만 수습하면 자신이 더 우스울 것 같
았다.
“아깐 마시고 있었잖소?”
“이사님이 문을 여시는 것에 놀라서 입천장을 데었습니다.”
그녀가 입을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그의 시선이 입술에서 떨어지질 않아서 민망했다. 그가
그녀의 말에 미소를 머금었다.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잘...”
“아, 일단 앉아요. 학생이 꼭 선생님한테 야단 맞는 것 같아 불편하군.”
그녀가 자리를 차지하고 맞은 편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예쁜 다리가 무릎 밑까지 보이는
옷 때문에 그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같이
내려왔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일단 다음부터는 9시에 와도 좋소. 근데 야근이 많아 질 겁니다. 내가 이 회사의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에 앞으로 일이 많을 겁니다. 그건 각오하시오. 물론 수당이야 지급되겠지만 말이오. 그
리고 내 스케쥴에 대해 누가 묻거든 절대
알리지 마시오.”
그의 마지막 말에 보희는 깜짝 놀랐다. 그가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물었다.
“왜 그러시오? 황회장님이 지시한 일이 있나 본데.. 월급이야 그 사람이 주겠지만 일단 내
밑에 있는 이상 내 지시에 따르시오. 그가
당신의 인사 발령에까지 신경 쓸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시오. 혹시 돈 받았소? 받았다면 내
가 주지.”
그는 말하면서 그녀의 기분이란 것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고 그녀의 표정 변화도 신
경 쓰지 않았을 뿐더러 물론 그녀말고도 그는
다른 사람의 기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인간으로 만 보였다. 그녀의 추측이 틀릴 리가 없
었다.
잠시 동안이나마 그가 멋있다고 한 말을 전부 그녀 기억 속에서 버려 버릴 것이다. 앞날이
캄캄했다.
“절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회장님께서는 전혀 그런 일을 지시하
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변에서
신경을 많이 쓰신다고 생각하니까 말씀인데요, 그렇게 불안하시면 사람시켜서 도청 장치는
없는지 조사부터 하시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하자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앉혔다. 보희는 그 순간만
큼 용감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표정은
뭔가 잡아먹을 듯이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가 심호흡을 하듯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얼
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시작했다.
“내가 말이 끝났다고 하기 전에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마시오. 알았소. 그리고... 기분 상
하게 했다면 미안하오. 당신에 대해 오해
한다기 보다 황회장이 의심스러웠던 거니까 말이오. 집안 일 때문에 괜히 당신이 화가 나게
했군. 사과하겠소.”
그의 사과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받아 들였다.
“그.. 그럼 사과를 받겠습니다. 나가 봐도 되겠습니까, 이제?”
여전히 안면 근육이 놀라서 풀리지 않았다.
“고맙소. 이따가 점심식사나 함께 합시다. 같이 일한 기념으로 말이오. 그리고 올 상반기
회사 재무 재표하고 매달의 매출 현황표 좀
정리해서 주시겠소?”
그가 내린 첫 번째 임무였다.
“네, 알겠습니다.”
보희는 그와의 첫 대면 아닌 대면으로 기분이 상했지만 그에게 재무 재표를 가져다 준 후
매출 현황에 대한 정리와 그 밖의 참고
자료들을 찾아서 정리하느라 점심시간까지 맞추느라 힘들었다. 점심이야 안 먹어도 그만 먹
어도 그만이었지만 말이다.
몇 시간이 지난 후 그가 점심 식사를 하자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그녀가 자료를 가
져다 준 후 한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었다.
“잠시만요. 자료 좀 저장하고요.”
그녀가 마우스를 움직이면서 잠시 꾸물거릴 동안 그가 문에 기대어서 팔짱을 낀 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문가에 기대어 서서 그녀 하는 일을
바라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의 눈에서
관심의 눈길이 철철 넘쳐서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그는 어깨만 으쓱거릴 뿐 문을 열고 그녀가 나서길 기다리고 있었다.
태연한 척 하며 핸드백을 들고 문을 나섰다.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다. 그
시간이 왜 그렇게 긴 건지 어색하기만
했다. 온몸의 촉각들이 곤두선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층수가 내려가는 숫자만 주시했다.
그녀는 그게 더 불편했지만 말이다.
그는 가까이 있는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회를 무척 좋아했다.
“뭘로 먹겠소? 회를 싫어하거나 하진 않겠죠?”
좌상을 하고 둘이 마주 앉아 주문을 고르는데 그가 물었다. 그들 중간에는 웨이트레스가 앉
아서 주문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이죠. 제가 먹고 싶은 거 시켜도 되나요?”
“물론이오. 여비서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사는 거니까. 알았소. 앞으로 잘 해보자는 의미에
서 사는 거요.”
그녀는 그를 보던 눈을 메뉴로 돌렸다.
“제철이 아닌데도 대구회가 있네요.”
“네, 손님. 그런데 가격이 좀 비싸지만 회 드시는 분들은 생 대구회만큼 맛있는 회가 없다
고 하십니다.”
여종업원의 친절한 설명으로 그녀는 대구회를 주문했다. 물론 그에게는 좋냐는 말도 안 물
어 보았다. 그녀에게 여태까지 골탕 먹인
값치고는 쌌지만 이 정도로 하기로 했다.
“그때 공항에서 데이지는 않았소?”
그는 그녀에게 그때의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네, 괜찮습니다. 그때 급한 볼 일 때문에 가셨다고 하시더군요. 서로가 얼굴을 알았다면
그런 불편함은 없었을텐데 말입니다.”
그녀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 그일... 당신이 날 마중 나온 거 알고 있었소.”
“뭐... 뭐라고요? 그럼 왜...”
그의 황당함 정말 끝이 없는 듯 했다.
“당신이 나랑 차 한잔하기 싫다고 하기에 그랬소.”
“그건 당... 아니 이사님을 찾아야 해서라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글쎄, 그땐 그냥 당신이 나중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소. 미안하군. 이젠 당신이 어
떤 반응이 나올지 알았소.”
“어쩜 그런 말씀을 그렇게 쉽게 하시죠? 전 1시간이나 찾아 다녔는데. 그리고 그렇게 무표
정한 얼굴로 사과하지 마세요.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어 보이니까요”
“정말 미안하군. 이렇게 웃으면서 사과하면 되겠소?”
그의 얼굴이 활짝 핀 듯 크게 웃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물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애인은 있소?”
“그런 사생활 질문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없군.”
그녀는 더 말을 섞어 봐야 그한테 즐거움만 줄 것 같아 열심히 대꾸하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그녀는 어떤 일에서도 잘 흥분을 하지
않았는데 그만은 그녀의 인내심에 바닥을 드러내게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물수건을 펴서 그녀에게 건네 주고 그도 손을 닦기만 하고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보희는 9시가 돼서 퇴근할 수 있었다. 점심과 저녁은 샌드위치를 배달해서 일하면서 먹은
게 다였다. 벌써 일주일 째 식사다운 식사는
할 수가 없었다. 일 끝나고 저녁에는 딜러 일을 보러 다녀야 했기 때문에 살이 빠지는 것
같았다.
황태석 이사는 아무래도 철인인 것 같았다. 그는 보희가 정리해서 준 일을 가지고 밤새 야
근을 했고 아침이면 항상 그녀보다도 일찍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라고 본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작은 재산인 차를 타고 보스란 술집으로 향했다. 월요일 밤이라 그런지
차가 별로 막히지 않았다. 주차를 하고 술집
정문으로 향하니 술집 앞에서 기도를 보는 남자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오늘도 멋진 밤이네요, 누님.”
나이는 그녀보다 2살이나 많은데 항상 누님이라고 하는 저 치는 겉만 번지르르한 건달이었
다. 보희는 처음 왔을 때 그들이 그녀에게 추파
던지는 것에 대해 한동안 고생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취객한테 당하고 있을 때 많
이 도와주어서 그들의 행동이 약간은 용서가
되었지만 말이다.
“누님 소리 좀 그만해요. 나이도 많으면서. 오늘도 사람이 많은 가 봐요?”
“그렇죠, 뭐. 갑부집 도련님들이 많이 와야 우리 월급도 나오니까 좋지 뭘. 들어가 봐.”
보희는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 갔다. 옛날 서양에서 벽에 걸어 장식할 법한 금으로 도금
한 촛대 모양의 은은한 조명들이 내려가는
계단을 비춰 주고 있어서 크게 눈이 나쁘지 않은 이상 잘 보였다. 그 밑에 깔린 검고 화려
한 무늬들이 화려한 카펫을 장식하고 있었다.
뭐하나 싸구려 티가 나는 구석이 없었다.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한 중상류
층이 아니고서는 들어올 엄두도 나지 않는
곳이었다.
보희는 이 곳 접대부 아가씨들이 쓰는 방으로 들어갔다. 특별한 일꾼이 아니었기 때문에 따
로 내준 룸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아가씨들과
같은 룸을 쓰고 있었다. 거의가 20대 초반과 10대들이 그 방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다를
떨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아가씨들이 많았고 종종 벌써 취한 아가씨들도 눈에 띄었다. 그녀들은 자신들과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버는 그녀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질투를 하며 그녀를 괴롭히기 일쑤였지만 그녀의 따끔한 말 한마디에 콧소리만 내고는 화가
나서 나가 버리기도 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끼고 있던 렌즈를 빼서 보관함에 넣고 화장 케이스를 열고 분장을 시작했
다. 처음에는 화장을 이렇게 까지 짙게 하진
않았었다.
이곳에서 일을 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기 위해 다른 기업에 이력서를 넣은 적이
있었다. 그때 면접관이었던 나이 지긋했던 남자
이사가 그녀를 알아 본 것이었고 보희는 민망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하루 종일 운
적이 있었다. 자신의 생활에 큰 보탬이 되어
주는 일이 그녀에게 큰 장애가 된다는 모순적인 상황이 그녀를 슬프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는 항상 짙은 화장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곳 접대부들은 나이 속이려고 저렇
게 화장을 한다고 노골적으로 비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비꼼으로 그녀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
이 상책이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속눈썹을 붙이고 자신의 눈 색깔이 부각되도록 연녹색 아이 섀도를 바르고 검은 색 아이라
이너와 마스카라를 칠하고 검붉은 립스틱을
발랐다. 그리고 머리를 틀어 올려 그녀의 우아한 목선을 드러 냈다.
민소매의 검은 색 차이나 풍 드레스를 입었다. 타이트한 롱스커트에 허벅지까지 트임이 있
는 옷이어서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많이
드러내야 했지만 여기 일하면서 돈을 많이 벌게 해준 옷이기도 했다. 여기서 같이 일하는
한 딜러 일을 보는 남자가 그녀에게 조언해 준
것이었다. 그 딜러는 같이 카지노에서 일하던 남자 선배였는데 이곳에서 카드 일을 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유일하게 친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싫다고 거절했다가 수입이 그냥 그래서 시험삼아 한 번 해보았는데 효과
만점이었다. 몸은 팔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위안했지만 말이다.
그녀에게 첩으로 들어앉으라는 손님들도 많았지만 그녀는 고객이라는 이름 하나로 무진장
참고 버텨야만 했다.
그녀가 모든 준비를 다 마치자 총지배인이 들어 왔다.
“그린캣, VIP2호실에서 카드 한다니까 들어가 봐. 혜미 너는 초희랑 교대해라. 손님들이 짖
꿎어서 애를 술로 보내 버렸다. 넌 술
주는 대로 다 받아 먹지말고 알았어?”
“알았어요. 언니 가요.”
혜미라는 아가씨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룸을 나섰다. 그녀보다 9살이나 어린 혜미는 그녀처
럼 병든 노모를 먹여 살린다고 어려서부터
일하기 시작한 불쌍한 아이였다. 그녀를 언니처럼 따라서 동생 같기도 했다.
그들은 지하 2층 계단으로 내려갔다. 술장식을 잡아당기자 문이 스르르르 열렸다. 상습적인
불법 도박을 좋아하는 상류층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VIP고객 중에서 최고 부자들이 아니면 들어오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그녀가 들어간 방에는 벌써 한 명의 남자 손님과 술이 떡이 되어 누워 있는 초희가 엉겨 누
워 있는 민망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아슬아슬한 옷 밖으로 이미 나와 있었고 그 남자는 그 가슴을 열심히 탐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 오빠. 이제 나하고 놀아야지. 언니 언니 빨리 일어나.”
술에 취한 초희의 옷을 세민이가 혜미를 도와 일으켜 세웠다. 세민의 눈은 보희와 마주치기
민망해 하고 있었다. 순진하긴 세민이나
보희나 마찬 가지였으니까 말이다.
세민이 슬며시 웃으며 그녀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같이 일해 좋은 점은 서로 힘이 된다는
것이지만 나쁜 점은 안 좋은 모습들을 같이
감상해야 한다는 점이 있었다.
“딜러를 볼 그린 캣입니다. 손님, 이 테이블로 모여 주시겠습니까?”
술집이라기 보다는 집에서 남자 손님들을 위해 인테리어한 것 같이 편안한 분위기였다. 마
호가니 색 가구들로 꾸며지고 명화 모조품이 걸려
있었으며 넓찍한 테이블로 몇 사람이 누워도 될만한 크기의 술테이블이 이루어져 있었다.
그 밑으로는 카드를 즐기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된 한평반정도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카
드가 미끄러지지 않게 세팅된 훌륭한
테이블이었다. 술에 만취된 한 손님은 혜미와 어울렸고 나머지 네명은 그녀 주위로 모여 앉
았다.
한 손님이 그녀의 힙을 건드렸다.
“손님, 저는 접대부 아가씨가 아니니 이런 행동은 삼가하십시오.”
그녀가 웃으며 점잖게 말하자 그도 하던 동작을 그만 두었다.
“이런 거 하지 말고 내 정부나 하면 돈도 많이 줄텐데 아가씨?”
그녀가 그냥 미소만 짓고 말자 그는 입맛만 다셨다. 이곳에서 추태를 부리다간 밖에 있는
기도에게 쫒겨 날 것이고 다신 이곳에 출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소위 말하는 상류층 인간들의 규칙 중 하나였다.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던가. 이곳 사장이 알아주는 집안의 한
사람이라 그의 명예에 누를 끼칠 것을 생각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럼 게임 종류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그녀가 게임 선택을 물으려 할때 뒤에서 문이 열렸고 테이블 손님들이 하나같이 일어섰다.
보희가 돌아보니 앗 소리가 터질뻔 했다. 바로
황태석 이사였다. 빌어먹을. 속으로 그녀는 욕설을 퍼부었다.
“이자식, 정말 오랜만인걸.”
한 남자가 그를 끌어안으며 반겨 했다. 다른 남자들도 그에게 모여들어 악수를 하며 포옹했
다.
“죽은 줄 알았잖아. 귀국했으면 얼른 보고를 해야지. 뭐가 그렇게 바빠?”
“수호, 정민, 준태, 명규, 진짜 반갑다. 일이 많아서 짬이 나야 말이지. 잘 들 지냈냐?”
그가 저렇게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을 일주일을 같이 일하면서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간
간이 그녀와 말을 썩을 때 아니면 거의 웃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서류를 보면서 항상 인상을 쓰기 일수였다. 냉혈인간은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석이는 장가가서 애 아빠다. 이제.”
“그래? 근데 저기 퍼져 있는 놈 문석이 아냐?”
그가 혜미 무릎 배고 누워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말도 마라. 마누라 등쌀에 몇 달만에 나오더니 저 모양이다. 여자 붙들고 지 마누라 찾으
니 누가 좋아 하냐? 쟨 신경 쓰지 마라.
일단 한잔하자.”
게임은 시작도 않고 그들은 보희를 세워 놓고 술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이 대화에 언제 낄지
머물다가 순간적인 틈새를 공략했다. 당장
이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손님, 게임은 다음에 하시겠습니까?”
그린캣이라 불리는 그녀의 그윽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들 모두가 그녀를 주시했다. 얼굴보다
는 그녀의 가슴과 다리에 시선들이 고정되고
있었다. 그녀는 태석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깜짝 놀랐다. 들킨 것은 아닌지 걱정
이었다.
태석이 물었다.
“게임?”
수호라는 순진하게 생긴 남자가 대신 대답했다.
“카드 게임 하려고 불렀는데 너 왔으니 일단 회포나 풀어야지. 게임은 나중이고.”
태석은 친구의 설명을 들으면서 한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들킨 걸 거야.
“게임 좋지.”
“임마, 얘기나 하고 하지. 이봐, 저쪽에 앉아서 기다려.”
보희는 찜찜한 기분을 없애지 못하고 문 앞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곁눈질을
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쳐서 얼른 눈을
돌렸다. 되도록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만 자리의 위치가 그들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각도에 놓여져 있어서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다.
태석은 얘기하는 간간이 그녀를 돌아보았고 그때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 그를 보
던 수호가 그를 붙잡았다.
“이 자식, 꿈께 임마. 저 여자는 그런 여자 아니니까. 괜히 일 만들지 마. 여기 사장인 지우
형 알지? 그 형이 신임하는 사람이야.
손님들 비위 잘 맞추면서 일 잘하나 봐. 저번에 같이 카드게임하는데 누가 건들다가 한 대
맞았거든. 지우형이 관심 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자기 엄마랑 많이 닮았데. 형이 죽은 자기 엄마 얼마나 끔찍이 위했
었냐? 그러니까 괜히 일 키우지 마라. 그건
그렇고 회사는 어때?”
태석은 뭔가 생각하는 눈치 같았다.
“글세, 아직까진 괜찮아. 근데 뭔가 서류에 오차가 있어. 교묘하게 자금이 세는 것 같아.”
“그래? 너도 알겠지만 황회장네 집안에서 주식을 사들이고 있어. 저번에 한번 크게 주가
떨어졌을 때 말이야. 누가 계속 사들이기에
알아 봤더니 황회장 측에서 주식을 대거 사들이고 있더군. 조심해라. 니 주식이 40%지만 황
회장 주식이 널 능가하게 생겼으니까
말이야.”
“황회장이? 회사를 아예 자기 걸로 만들려는 개수작이군. 난 아버지처럼 당하지 않아. 반드
시 회사를 되찾고야 말겠어.”
수호는 흥분해서 핏발이 서는 태석을 봤다.
“아직은 괜찮지만 너도 귀국해서 황회장의 움직이 더 빨라질 거야. 빨리 회사내 일을 알아
내야 돼. 니 일은 우리들이 계속 도와주겠지만
니가 주식을 잃을 경우에는 우리도 어쩌지 못해, 알았지?”
수호 외의 친구들은 아주 친한 사이였다. 어려서 부모들 땜에 알았고 그 뒤로 그의 부모가
돌아 가신 뒤에도 항상 그의 좋은 벗이 되어
주었었다. 지금 당장 그의 부모들이 황회장에게 굽신거리고 있지만 그들 부모 회사가 결정
적으로 크게 된 데는 태석의 아버지 ‘김석훈’
혜성 그룹 전회장의 도움이 컸었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태석을 도와 줄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열심히 듣던 보희는 그가 황회장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
녀는 황회장과 태석이 그냥 사이가 나쁜 부자
사이라고만 알았었는데 여기서 큰 사실을 알아 버렸다. 입사 1년차인 그녀가 알 수가 없었
던 일이었다. 아주 중요한 일을 몰랐다니
말이다.
그녀가 태석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그들은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그들이 일어섰다. 집에
갈 줄 알았지만 태석이 그들을 만류했다.
“카드 한 번 하지.”
그들은 이제 카드 칠 흥미를 못 느꼈지만 태석이 하자는 말에 오케이를 했다.
“이봐. 그린캣 아가씨. 카드 준비해 줘.”
“그린캣이라니?”
태석이 수호에게 물었지만 술을 먹어서인지 톤이 좀 높아서 그녀도 들었다.
“아, 저 아가씨 눈동자 색깔이 녹색이야. 자세히 보면 오묘하지. 처음엔 나도 렌즈 색깔인
줄 알았는데 원래 저 색깔이란다. 한국
사람 눈 색깔이 어떻게 저럴까? 내 생각에는 혼혈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아가씨. 혹시 혼혈
인가?”
보희는 항상 듣는 말이었지만 태석이 있는 자리라 그런지 얼굴 근육이 풀리지를 않았다.
“아니요. 유전입니다.”
“유전?”
태석이 물었다. 그가 보희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 보자 말문이 막혔지만 태연한 척하려 애쓰
며 대답했다. 더 많은 대답을 원하는 눈치라
말을 짧게 할 수도 없었다.
“저희 증조 할머니께서 눈 색깔이 이러셨다고 하더군요. 그럼 게임 시작할까요? 어떤 게임
으로 하시겠습니까?”
키가 작고 얍삽해 보이는 정민이라는 남자가 말했다.
“그냥 간단하게 세븐포카로 하지? 다들 동의 하지?”
그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태석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그녀만을 주시했다. 왜 저렇
게 쳐다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조커를 포함하지 않고 싱글덱(52장의 카드)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미니멈 벳(최소 배팅액)
과 멕시멈 벳(최고 배팅액)을
정하시겠습니까?”
수호가 30-50을 불렀다. 미니멈 벳은 30만원, 멕시멈 벳은 50만원으로 그 가격대에서만이
베팅을 할 수 있는 베팅가였다. 보희가
길고 가느란 손가락을 유유자적 움직여 카드를 섞었다. 남자가 그녀처럼 화려한 기술로 섞
는 것보다 여성이 이런 묘기를 보일 때
플레이어들의 반응이 더 컸다. 양손에 카드 반을 잡아 활처럼 꺽인 카드를 섞고 여러 번 친
후 테이블 위에 카드를 놓고 언덕을 그리듯
카드를 활짝 펼쳤다. 그리고 그들이 패를 볼 수 없을 정도의 속도를 한쪽 끝의 카드를 반대
방향까지 왔다 갔다를 했다.
“선을 정하겠습니다. 한 장씩 뽑으시겠습니까?”
그들이 손을 카드로 가져가 뽑아 들었다. 태석은 패를 보지도 않고 던졌고 그의 패는 하트2
였다.
그녀는 선을 정하고 패를 돌렸고 태석은 패를 보지도 않고 그녀만 바라보면서 게임을 했다.
태석은 게임이 끝날 때까지도 패를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폴드(승산이 없어 포기하는 행위)를 외치지도 않았다. 그는 몇 백 만원을
잃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그녀의 숨쉬는
모습 하나 하나까지 바라보았다.
보희는 그의 행동에서 자신의 이중 생활을 들킨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손
님들이 있는 곳에서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게임이 끝나고 그녀는 괜찮은 팁을 챙겼다. 이곳의 팁은 카지노에서 일할 때 받던 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팁을 주는 곳은 그녀의 손이 아닌 가슴이란 것에 문제가 있었지만 돈 벌기로
작정한 이상 참아 내야 했다.
그녀가 카드를 정리하고 다른 이들은 슬슬 술자리를 마감하려 할 때 태석이 그녀에게 다가
왔다. 그와 10c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그를 이렇게 가까이 보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그의 섬세한 이목구비를 자세히 볼 수도 있
었다. 하지만 지금 그럴 생각을 할 만큼
여유롭지가 않은 것이 탈이었지만 말이다.
“무슨 일이시죠? 손님?”
떨리는 음색을 감췄다.
“나랑 내기 게임 한번 하지?”
그가 뭐라는 걸까.
“무슨 말씀이신지? 전 손님과 게임을 하지 않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보희가 물러나려 하자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밀어내야 하는데 몸에 힘이 들어
가질 않았다.
“카드 게임을 해서 당신이 이기면 원하는 금액을 주고, 내가 이기면 1년간 동거, 내 여자가
되는 거야. 어때?”
보희는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그의 뺨을 힘차게 때렸고 그의 입술이 살짝 찢어졌는지 피
가 났다. 보희는 떨리는 손을 잡았지만 흥분이
가라 앉질 않았다. 이 남자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지? 날 알아보고 저러는 건 아닐까?
“무례하시군요.”
그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뺨을 때렸다. 얼얼했다. 정신이 없었다. 날 때린
건가? 그녀의 눈에서 너무 아팠는지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그도 놀랐는지 그녀에게 한 발 다가왔지만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나왔다.
“야 너 왜 그래? 생전 여자한테 관심도 없는 놈이... 야, 정신차려?”
수호가 그를 흔들었다.
“내가 미쳤나 보다. 관심 갖는 여자가 하나 둘씩 생기는 걸 보니까”
그는 남은 술을 잔에 부어 벌컥벌컥 마셨고 옆에 있는 어린 한 여자가 울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놀라서 우는 줄 알았지만 정작 그녀는
언니처럼 따르던 여자가 맞은 것에 화가 나서 울고 있던 것이었다.
보희는 세민이 다가와 얼음찜질하는 것을 받고 있었다. 옆에서 혜미는 울고불고 난리였지만
그녀는 태석에게 맞은 생각에 치가 떨렸다.
세민이가 그녀의 부은 오른쪽 뺨을 보고 흥분해서 달려가려 했지만 보희는 극구 말렸다. 태
석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고 가벼운 여자라
생각하고 한 행동 같았다. 그를 탓할 수만도 없지만 그가 때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
었다. 저질 같은 짓을 해 놓고도 오히려
당당해 했다.
그와 꼬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를 생각하니 웃음만 나왔고 세민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괜찮
냐고만 연신 물어 댔다. 엄마처럼 정신 나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나 보다.
이곳 총지배인을 만나서 얼굴 붓기가 빠질 때까지 당분간 나오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는 세
민이 대신 차를 모는 것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별이가 이 꼴을 보면 안 된다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다음날 아침 보희는 서둘러 출근을 준비했다.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피곤했지만 지
각을 해서 태석에게 밉보이기는 싫었다.
교묘하게 웨이브진 머리카락으로 어젯밤 태석이 남긴 상처를 가려 보았다. 잘 보이지 않았
다. 그에게 아침 커피를 한 잔 갖다 주었지만
그는 잘 못 알아보는 것같았다. 오히려 보희가 빤히 그의 뺨을 쳐다보자 그는 민망한 듯 헛
기침을 하며 그녀에게 커피 갖다 줘서
고맙다는 인사만 할 뿐이었다.
보희는 그가 준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일 만하면서 지내는 때 그
가 호출을 했다.
“부르셨습니까?”
그가 그녀에게 자리에 앉도록 권하고 그가 읽고 있던 서류 더미들을 들고 그녀가 앉은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다름이 아니라...뭐가 잘못됐소? 평소보다 나를 더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그가 보희의 시선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보희는 그나마 미소
를 짓는 편이었지만 어제 있었던 일로 그가
더 밉게 보인 게 사실이었다. 아마 그는 눈치가 빠른 모양이었다. 양부 밑에서 눈치를 많이
보고 자라서 인지 아님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둘 중하나 일 것이다.
“아니요. 그렇게 보이셨다면 죄송합니다. 오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보희는 사과를 하고 그가 보여주는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그
녀를 보다가 일로 신경을 돌렸다.
“이 부분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틀린 것 같소. 언뜻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문제지만
말이오. 당신이 첫날 준 서류하고 이
서류하고 따로 보는 경우 거의 알 수 없을 만큼 금액 이 맞지가 않고 있소.”
보희는 그가 준 자료를 비교 분석해 보았다.
“글쎄요. 음.. 제가 보기에도 그렇네요. 하지만 전문가가 보면 금방 표가 날 만한 일인데 왜
이렇게 작성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보고서를 회장실에 작성할 때도 이렇게 비교 분석하지 않고는 잘 알지 못 할 만큼
미묘한 문제였다.
“맞아요. 이건 마치 들키기 바라는 것 같군. 매출 상황이 영 맞지 않고 있소. 각 부분마다
조금씩 떼어 내면 상당한 액수지만
얼핏보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거요. 누군가 자금을 빼돌리고 있다면 이보다 더한 자금줄을
빼고 있을 수도 있소. 만약 들켰을 경우 이
서류들에서 정황을 따질 확률이 크기 때문에 더 이상의 횡령에 대해서는 추궁 당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오.”
“일리 있는 말씀이시네요. 하지만 누가...”
그의 눈에서 광채가 빛나는 것 같았다. 그는 누군가를 점찍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는 왜 내게 이런 중요한 일을 말하는 것일까? 날 믿는 건가? 아니면 날 이용해서 황회장
을 끌어낼 심사인가?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나하고 하는 이 얘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이 회사에서 당신밖에 믿
을 사람이 없다고 처음 본 순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오.”
그는 날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내가 그에게 신뢰를 줬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
았다.
“잘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알아두세요. 한달 전부터 제영 투자신탁 측에서 사람이 오가고
있어요. 회장님 면담에서는 다른 은행 간부처럼
말했지만 차심부름으로 들어갔다가 제영측 사람이란 것을 들었어요. 얼핏 들은 것이라서 확
실히는 모르지만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런 일이 있었소? 역시..”
그는 황회장의 뒷거래를 조사한 모양으로 뭔가 안다는 듯이 말을 하였다. 그러다가 그가 그
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얼굴 어떻게 된 거요?”
그녀가 놀라서 뺨의 상처를 손으로 가렸다. 아직 붓기가 가라앉지 않아서 두께감이 느껴졌
다.
“네?”
“그 뺨말이오? 다쳤소?”
“이건...그러니까 아, 어젯밤에 강도를 당했어요. 핸드백을 안 뺏기려다가 그만.. 물론 가방
은 지켰지만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오히려 그는 정색을 했다.
“아니 무슨 여자가 겁이 없어? 그러다가 더 큰 봉변당하면 어쩌려고 그러오? 그깟 가방
그냥 줘 버리면 될걸. 이리 와 봐요?”
큰소리에 오히려 그녀가 놀랬다. 그가 그녀의 손을 치우고 그의 손바닥으로 그녀의 뺨을 감
싸 쥐었다. 열이 후끈 나는 것 같았다.
언제는 때리고 이제는 약처방을 하려고 달려드는 군.
보희는 그의 손을 치우며 되물었다.
“그러는 황이사님이야 말로 그 뺨은 뭐죠? 여자한테 맞기라도 하셨나요?”
태석은 손으로 그의 상처를 놀라서 살짝 만지고 부인했다.
“이건.. 요즘 밤샘하느라 피곤해서 생긴 상처요. 잠깐 기다리시오.”
그가 민망한 표정으로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냉장고 문을 요란하게 열고 닫는 소리하며 얼
음깨는 소리, 부스럭부스럭 한참을 그러더니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수건에 얼음 팩을 만들어서 돌아왔다.
그가 그녀를 소파에 살짝 뉘었다. 그녀가 놀라서 쳐다보자 그가 그녀의 몸부림을 저지했다.
“가만히 있어 봐요. 이렇게 해서 붓기를 빨리 가라 앉혀야지.”
그는 심지어 그녀의 안경을 벗기려 들었고 보희는 절대 안경을 못 벗기게 했다.
“집에 가서 하면 되니까 이런 일을 안 하셔도 되니까 좀 비켜 주시죠?”
하지만 그는 꿈쩍도 않고 계속 팩으로 그녀의 얼굴을 눌러 주었다. 보희는 그와의 실랑이
끝에 결국 가만히 있는 쪽을 택해야 했다.
힘으로는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의 손길에 보희는 피곤한 몸이 조금씩 잠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참다가 살짝 잠이 들려고
했다. 하지만 부드러운 깃털이 그녀의 입술에
떨어져서 눈을 뜨고 말았다. 그의 코가 그녀의 코를 가로질러 놓여 있는 것이었다. 순간적으
로 그도 놀라는 눈치였지만 굳어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그녀를 무시하고 그녀에게 잠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키스가 처음은 아니었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때 학교 선배와 사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는 그녀가 가장 힘들 때 그녀를 버렸다.
어린 나이에 충격도 컸었다. 사랑한다고 맹세하던 그였다. 지금은 크게 미련이 없다. 항상
시간에 쫓겨 남자를 사귈 만한 시간도 없었던
그녀였지만 그것이 핑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가 잠입 한지 얼마 안되서 보희는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팍을 밀고 그의 뺨에
또다시 손을 올려 버렸다. 미쳤어, 내가
미친 거야. 그도 미쳤고.
보희는 그가 어제처럼 또 때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때리지 않았다. 대신 저만치 떨어져
서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호흡을 가다듬는 듯
했다.
“미안하오. 이럴려고 한게 아닌데...미안하오.”
그는 돌아보지 않고 보희에게 사과를 했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보희가 나간 후 태석은 자신
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요즘 두여자에게 마음이 똑같이 끌리고 있었다. 평소 여자에게 구애받지 않던 그였다.
더구나 지금은 부모님의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시기였다.
처음 보희를 본 순간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마음이 끌렸다. 어제는 똑같은 느낌의
여자를 만났다. 보스의 술집에서 딜러를 보는
여자였다. 그녀의 외모에서 살짝 동한 마음이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완전히 끌렸다. 평소
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동시에 마음이 동할
정도의 여자를 만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 그로서도 좀 의아할 정도였다.
보희와 그린캣이라는 여자들을 늘 곁에 두고 싶다는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생겨났다. 결국
지우형이 아끼는 직원이란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그 여자에게 내기를 청했고 서로 손까지 오고갔지만 그는 그 내기를 장난삼아 하지 않았다.
정말 그녀를 순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고 쉽다고 생각한 여자가 자신의 뺨을 때린 것에 화가나 반사적으로 때린
것도 사실이었다.
보희에게는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갖고 싶은 물건이라면 돈을 주고 살 수 있겠지만 보희는
그런 축에 끼지도 않았다. 그녀에 대한
마음이 애가 탈 정도로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었던 자신이 못내 부끄러웠다. 아마 그녀는
당장에라도 사표를 제출할지도 몰랐다.
애써 이런 마음이 금방 사라질 거라고 그는 스스로를 타일러야 했다.
보희는 그 날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 대상이 비록 어머니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가족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운전하는 내내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아서 차를 자꾸 세워야 했다.
태석의 입술을 느낀 순간 보희는 그의 매력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 키스가 짧은 순간이
었지만 너무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첫키스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첫키스는 설레임이었지만 태석과의 키스는 불이라고 할 정
도였다. 내 입술이 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현재 그녀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들의 사랑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그 분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살면서 보았다. 그런 어머니와
달리 보희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답답한 것일 수도 있었다. 마음에서 그를 몰아 내려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만약 그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와 그녀는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는 학력도 좋고 집안도
좋고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녀는 부끄럽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에 비하면 그녀의 학벌, 재산,
부모, 환경 등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녀가 일하는 곳은 질 적으로 나쁜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어느덧 청평의 외진 곳으로 들어갔다. 논들을 따라 차를 몰고 들어가
니 큰 철문이 있는 곳에 당도했다. 어머니가
계신 요양소였다. 주위가 산으로 덮여 있었고 조용하고 공기가 맑아서 어머니가 요양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곳으로 모신
것이다. 경비원에게 주차증을 받고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니 아담하고 하얀 건물이 드러났다.
그 옆에 주차를 한 후에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안면이 있는 간호원이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군요. 밤길이라 운전하기 힘드셨죠?”
“아니요.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라도 자주 와야죠.”
“일요일에는 동생분이 왔다 가셨어요. 근데 딸을 데리고 오셨더라고요.”
그녀는 이미 그 딸이 동생이란 것을 알지만 어린 아이가 혼동하는 것을 우려해 보희가 딸로
불러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래요? 그런 말은 안 하던데. 별일은 없었죠?”
“그게 어머님이 보희씨 어렸을 때라고 생각하시는지 데려가지 말라고 울고불고 난리가 아
니셨어요. 보희씨 어린 시절만 기억하시나 봐요.”
“별이한테 무슨 다른 일은 안 하시고요?”
“네. 몇 년전보다 별이를 보시는 게 나아지시긴 했는데 여전히 정신은 돌아 오시지가 않네
요. 심장도 점점 나빠지시고. 하루에 산책 한
번하시기도 힘이 드시나 봐요.”
보희는 그 간호사와 몇 가지 더 이야기를 한 후 병실로 올라갔다. 작은 방이지만 매일 침대
에서만 지내시는 어머니에게는 그리 작지만도
않은 공간이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그녀를 보자 어머니는 경계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말은 없었다. 점점 더 말을 안
하시고 계신다. 혼잣말은 곧 잘 한다고
하는데 누군가의 질문에는 대답을 안 하신다.
어머니의 손을 붙잡아 보았지만 뿌리치신다. 그리곤 등을 돌려 앉으신다.
“어머니, 보희 왔어요.”
보희라는 말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보지만 이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아본다. 여전히 고운
얼굴이었다. 병약하셔서 새치 머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셨지만 우아한 멋을 풍기며 돋보여서 보기에는 괜찮았다. 보희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세민이도
자세히 보면 어머니와 닮은 구석이 있지만 세민이는 자신의 친아버지를 닮아 잘생기긴 했지
만 남자다움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별이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그래서 보희랑 모녀간이란 소리를 많이 듣고 있다.
“어머니, 별이가 유치원에서 남자친구를 사귀었대요. 좋죠? 조그마한 게 벌써 7살이에요.
이제 내년에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요. 사진을
가져왔어요.”
은으로 장식된 손바닥만한 액자를 가방에서 꺼냈다. 세민과 별이하고 집 근처 공원에서 찍
은 사진이었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별이가 두 남매 사이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는 별이의 얼굴만 만지작 거리셨다. 잘은 들리지
않았지만 보희의 이름은 소곤거리고 계셨다.
어머니는 마지막 남편인 별이의 아버지가 사업이 부도가 나자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신 것
을 처음 목격하시고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시작하셨다. 집에서 돌아가신 의붓아버지는 욕실에서 약을 드시고 뜨거운 욕조 안에 조용히
누워 돌아가셨다. 산부인과에 다녀 오신
어머니는 그 장면을 보셨고 그 충격으로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별이를 출산하시고는 심각한 우울증과 신경과민 증세를 보이셨고 급기야 기억을 하려 들지
않았다.
아버지 쪽 사람들은 그녀 가족들을 나 몰라라 했지만 별이가 젖먹이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2년을 돌봐 주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
뒤로는 어떡하든 그녀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어머니, 우리 별이 참 예쁘죠? 세민이도 많이 어른스러워요. 누나 챙길 줄도 알고 말이예
요. 요즘은 일이 점점 힘이 들어요. 몸도
예전 같지 않고 말이예요. 그리고 자리를 옮겼어요. 새로운 상사는 황태석이란 이사인데요.
그 사람이 회장 아들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친아들이 아닌가 봐요. 우리 동생들은 비록 아버지들은 다르지만 그 우애가 남 달라서
힘이 되는데 그사람은 참 안됐다는 생각도
들다가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지만 많이 어두워요. 정이라곤
없어 보여요. 근데... 근데 그 사람이 무척
신경 쓰이는 건 왜 그럴까요? 나도 모르게 그 사람한테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예요. 엄
마처럼 남자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마음을 갖는 것도 가능한가요? 엄마는 밝은 사람이 나한테 좋다고 항상 말했잖아요. 그런
사람은 아예 마음에도 두고 있으면 안
되겠죠?”
이런 저런 말을 계속 어머니께 했지만 벽에 말하는 것과 진배없이 여전히 어머니는 말없이
사진만 들여 다 보고 계신다.
“어머니, 오늘은 어머니 옆에 누워서 자고 싶어요. 오랜만에 같이 자는 건데 괜찮죠? 불편
하진 않게 할게요. 이제 자요.”
침대에 어머니를 눕히고 어머니 품에 밀착여 누었다. 보희는 어머니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항상
엄마 노릇으로 응석부려 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보희는 어머니의 허리를 끌어 안고 잠이 들려고 했다. 어머니는 목석같이 가만히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보희는 개의치 않았다. 그냥
어머니의 품이 그리웠다. 어렸을 때 그녀를 항상 옆에 품어 주고 쓰다듬어 주던 어머니가
새삼 그리운 것은 생활에 치여 사는 것이
힘들어서 일 것이다.
꿈이었을까.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그녀의 옆에 누워 머리를 슬며시 쓰다 듬어 주었다. 그리고
자주 들려주던 노랫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정신이 돌아오신 걸까 아니면 그녀가 불쌍해 보였던 것일까. 그녀는 그렇게 보희
를 보듬어 주며 밤을 지샜다.
보희는 어머니께 다녀온 후 몇 일 간은 저녁 시간이 많이 남았었다. 얼굴 붓기가 거의 가라
앉아서 몇 일 후에는 다시 클럽 일도
나갈 작정이었다. 세민이는 그녀가 나가지 않은 며칠 동안 날이 다 밝아 올 때나 들어 왔고
별이는 그녀가 회사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밤늦게까지 놀려고 잠 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몸의 피곤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동생과 쉴 동안 더 놀아 줄 생각으로 집에 가려 했는데 그가 그녀에게 저녁 먹기를 청했다.
보희는 여러 가지 핑계를 되려고 했지만
막상 말하려니 마땅한 핑계 거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뜸을 들이자 빠져 나갈 생각하지
말고 편한 마음로 식사하자고 청했다. 결국
그를 따라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는 예의가 무척 바르게 보였다. 처음 만남과 술집에서 빼고는 그렇게 무례하게 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일 관계에서 그렇지만
부담스러운 것은 변하지 않는다.
강가의 밤 경치가 아름다운 레스토랑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녀가 차를 탈 때는 문도 열어
주고 내릴 때 문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녀의 의자를 뒤로 빼주기도 했다.
깔끔하고 우아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 법도 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했다. 돈 좀 있다는 남자
들을 상대로 일을 해 온 그녀에게 이 정도
연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그녀의 주문까지 대신 했다. 보희는 그가 주문하는 것에 대해 별 불만은 없었지만 그
래도 한마디해야 할 것 같았다.
“식사를 대접하면서 상대방의 의도는 묻지도 않으시네요?”
물 잔을 거머쥐며 그를 보았다.
“아, 미안하오. 몇 년 전에 이곳에 자주 왔었는데 음식이 아주 맛있는게 있어서 당신한테
권하고 싶었소. 들어보고 맘에 안 들면 다시
주문합시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강가 주변으로 빛나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살짝이지만 미소짓고
있었다. 그를 따라 밖을 바라보니 저 만치 아래
세상은 다른 세상처럼 아름다운 보석같이 보였다.
“여기 분위기 괜찮지 않소?”
“아름다운 곳이네요. 데이트하기에 적당한 장소이긴 하네요.”
“그런가? 여동생이랑 온 적은 있지만 아직 여자랑 온 적은 없소. 당신은 주로 어디서 데이
트를 하지?”
“글쎄요. 그런 말 할 필요가 없네요. 다른 이야기나 하시죠.”
그는 자신의 손을 맞잡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음... 무슨 이야기가 좋을까? 당신은 날 믿소?”
뜬금 없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 말인가요?”
“글쎄... 남자든 상사든 말이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남자로는 더욱이 알 수가 없고 상사로서는 일 하나는 칼같이 소
화해 내고 계신 듯해서 괜찮은 것
같습니다만...”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몰라서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난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보고 있소. 일도 잘 하고 입도 무겁고 말이오. 격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난 육감이란 걸 아주
많이 믿는 편이오. 당신은 보는 순간에도 그랬고 황회장의 비서라는 걸 알지만 내 사람으로
만들면 내 일에 절대적으로 큰 힘이 될
사람이라고 말이오. 내 말투에서도 알겠지만 황회장은 내 아버지가 아니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우연한 계기를 통해 그가 그런 과거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내 친아버지는 황회장과 동업 관계셨지만 아버지의 경영으로 회사가 크게 번창하고 있었
소. 그런데 황회장의 계략으로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소. 그땐 내가 어려서 힘이 없었지만 난 황회장에게 복수할 날만 생각하며 살았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지분은 지금 상태로는
황회장네와 같소. 그 나머지 지분을 어떻게 돌리느냐.. 그리고 황회장의 회사내에서 하는 일
들을 잡아내기만 한다면 경영권이 나한테
넘어오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소. 보희씨는 내 사람이 되겠소. 내 편에서 날 도와 줄 수 있
겠소?”
그의 말들은 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이 황회장이 일부러 꾸
민 짓이란 것이 사실인지 알 수도 없었다.
그는 야망이 있어 보이는 아니 확실하게 있는 남자였고 거짓말로 그녀를 끌어 들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그의 말투에서
보희는 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 들어도 별 감정없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내 사
람이라는 말에서 기분이 묘했다.
“뭔가 잘못될까라고 생각하는 거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는 비서로서의 일만 충실히 할 뿐이지 더 큰 힘은 될 수 없
지 않나요?”
“아니오. 회장실 보좌관들과 친하지 않소. 친분을 유지하면서 그들에게서 약간의 정보만 빼
와도 큰 도움이 되고 내 사무실에서 있는
모든 일들은 일체 비밀이오. 만약 황회장이 물어 오면 보희씨가 둘러서 잘 말하면 되오. 당
신한테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을 거요. 내
정보가 유출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큰 일을 하는 거요.”
“아무래도 절 못 믿어워 하시는 것 같은데. 전 결코 일을 발설할 사람도 아니고 저의 일을
할 뿐입니다. 사실 회장님도 저에게
이사님의 일을 보고하라고 하셨지만 그렇게 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기에 보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사님도 그런 걱정이시라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요. 전 어차피 황이사님의 직속 부하 직원인걸요.”
“미안하고 고맙소. 보희씨는 딱부러진 성격이 좋소. 또직속이란 말이 듣기 좋군요. 그리고
앞으론 황태석이라고 부르지 마시오. 나의
진짜 이름은 김태석이오. 10살 때 황씨 가족한테 입양이 되었지. 아버지는 맨손으로 회사를
일으키셨고 두 분다 가족이라곤 없는
분들이시라 황회장네 집으로 들어갔던 거요. 어차피 목적은 내가 상속받은 회사 지분이겠지
만... 이 얘긴 여기까지 합시다. 마침 식사가
나오는군.”
그는 식사 내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려서 부모님과 여행 다닌 이야기며 유학
시절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불행했던 시절의
얘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 말하기 꺼려했고 둘 중 하나
는 그 이야기로 침울해져서 분위기가 이상해 질
것을 우려한 것일 것이다. 아니면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 들어 나는 것을 두려워할 수도
있다.
그는 참으로 아는 것이 많은 남자였다. 다른 일부 남자들이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가진 것
에 대해 잘난 척을 하는 것에 반해 그는
전혀 그런 기색이 하나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고 그
는 재치있는 말로 그녀를 웃게도 만들었다.
종전과의 생각과 달리 함께 있기에 부담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짧고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에서부터 깔끔한 비즈니스 정장, 우수어린 눈빛과 남성다움
을 과시하는 피부, 다부진 체격에서 어디하나
나무랄 곳이 없었다. 첫인상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란 말이 맞았다. 그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타입이었다. 힘든 시기를 극복하는
방법이 다 다르고 거기서 생기는 성격 변화 등은 확실히 사람마다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환경에 대해 오히려 낙관적인 자세로 이겨냈지만
그는 그녀와 반대되는 것으로 극복한 타입이었다. 그녀의 시선에 그가 말을 멈췄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소?”
“아니요. 잘 웃지 않으시는데 오늘은 생각보다 많이 웃으시는 것 같아서요.”
그 한마디에 그의 얼굴이 굳어 졌다.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괜히 말한 것 같았다.
“부모님은 뭘 하시지?”
그는 자신만 얘기 한 것 같아 민망한지 그녀를 주재로 돌려 버렸다. 그의 질문에 보희의 얼
굴이 살짝 굳어졌는지 그가 사과를 했다.
“미안하오. 돌아가신 지 모르...”
“아니요. 저희 어머니...는 심장이 안 좋으셔서 청평에 있는 요양소에 계세요. 아버지는 돌
아 가셨지만요.”
네 명의 아버지에 대해서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군. 다른 형제는 없소?”
“남동생하고 여동생이 있어요.”
더 이상 물어 보지 않았으면 했다. 다행히도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동생들이 창피한 것이 아
니라 그가 그녀의 가정사까지 아는 것이
그냥 싫었다.
식사가 끝나고 후식을 먹은 후에도 한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말
에 그냥 회사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차를
가지고 가야 내일 아침 불편 없이 출근할 수 있다는 말에 그도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있었다.
“정말 애인 없소?”
보희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문을 소리나게 닫은 후에 가버렸다.
태석은 보희가 애인이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냥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것이 알 수가 없
었다. 보희와 있으니 왠지 클럽에서 만났던
여자가 생각나는 것이 보희에게 미안했다.
한동안 나오지 않고 쉬었던 탓인지 좀 피곤했고 벌써 몇 시간 동안 2팀을 보고 있었다. 한
팀의 일이 끝나고 화장실에 잠깐 갔을 때
웨이터 일을 보고 있던 세민을 만났다.
세민은 보희에게 괜찮냐고 물었지만 보희는 힘든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아마 학교를 그만
두고서라도 자신이 일할 심산인 동생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2팀째 보고 있는 방의 손님들은 알아주는 변호사들이었다. 한 변호사는 보희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고문 변호사이기도 했다. 변호사라는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과 다를 건 없어 보였다. 아가씨들을 희롱하는 추태를 버젓이 하고 있
었고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서는 꼴들이 말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인간의 탈이란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장소
에 따라 얼굴이 달라진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속임수였다.
게임을 하는 중간중간에 한 변호사가 그녀에게 계속 추태를 부렸지만 보희는 끝까지 태연한
척 애쓰며 참아 냈다. 갈수록 심해지는 나쁜
손버릇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이곳을 드나드는 특별 고객이기에 더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마침내 게임이 끝났을 때 보
희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그녀가 카드를 정리하는데 끈질긴 남자 손님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아가씨. 여기 있는 년들보다 더 예쁜데 그래. 카드 걸이 아니라 호스티스 아니야?”
술 냄새가 그녀 얼굴 바로 앞에서 나자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역했다.
“손님. 취하셨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는 게 낫겠어요.”
그가 그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손
이 그녀의 한쪽 가슴을 쥐어 잡았다.
“나랑 2차 가지. 섭섭하지 않게 줄 테니까 말이야.”
“이거 놓으시죠. 전 접대부가 아니예요.”
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쳤고 그는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다가 넘어졌다.
“저년이 사람 치네. 이리와.”
그가 벌떡 일어나서는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눈물이 날만큼 억세게 잡은 그의 손아
귀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에게 머리를
잡혀서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가 입술을 부딪혀 왔고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고 했지만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은 웃기만
할 뿐 도움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취객의 입술을 물어 뜯었고 더러운 피 맛
이 났다.
간신히 더러운 손 아귀를 빠져 나온 보희는 카드를 그 투실투실 살 찐 돼지 같은 놈에게 집
어 던졌다. 카드가 여기저기 흩어졌고 보희는
얼른 방문으로 달음질 쳤지만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그 손에 또 잡혔다.
발버둥치며 문을 열고 간신히 나왔지만 그 돼지는 그녀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유니폼의 어깨 자락을 잡아 당겨서 결국 얇은
천이 찢어져 나갔다.
그녀의 비명소리에 웨이터 몇 명이 다가왔다. 곧 그 인간이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떨리는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주저 앉고
말았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이보다 더 한 일을 당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기도들은 다 어
디로 간 것인지 하는 생각으로 주위를
돌아보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민이었다. 그 아이의 손아귀에 잡힌 채 그녀를 괴롭힌 나쁜 놈이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
지 않았다. 주위에서 세민이를 뜯어 말렸지만
그는 끝까지 그 인간을 때리고 발로 밟아 댔다. 맞고 있는 자는 기절을 했는지 비명도 지르
지 않고 있었다. 말려야 했다.
보희가 몸을 일으켜 세민이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그녀의 옷
을 보고는 분이 안 풀리는지 더 때리려고 악을
썼다.
“개자식, 감히..감히..”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너무나 순한 그가 화가 날대로 난 상태에 있었다.
“괜찮아, 세민아. 그만해 그만...”
울면서 뜯어 말리는 보희를 바라보며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식이 누나를...”
기도들이 와서 세민이를 데리고 갔고 변호사 친구들은 욕을 하고 난리였다.
“가만 안 둘 줄 알아.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두고 보라고.”
가슴이 뛰었다. 그 인간한테 당한 일보다 세민이에게 있을 일을 생각해서였다. 변호사를 저
렇게까지 때렸으니 큰 일이 나도 날 것이다.
어떡하지.. 어머니 어떡하죠...
그 날 밤 세민이는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보희는 밤새 경찰서를 떠날 수가 없었다. 세민
에게 맞은 남자는 아직 깨지 못한 상태라고
했다. 술도 술이지만 맞은 것이 타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일단 보희는 경찰들에게 잘 부탁한
다는 말을 하고는 그 곳을 나왔고 출근을
준비했다.
며칠 동안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회사에서는 태석이 시킨 일을 하다 말고 멍
하니 정신을 빼놓을 때면 태석이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주시하곤 했다.
결국 태석의 호출이 있었다.
“무슨 일 있소?”
“네?”
“아니, 요 며칠 동안 계속 정신을 빼놓고 있으니 말이오.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
소?”
“무슨 말씀이신지?”
“어머님이 심장이 나쁘다고 했잖소?”
그가 전에 그녀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관심이 오히려 불편했다.
“아닙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다른 용무는 없으신가요?”
그는 보희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듯 쳐다보았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다.
“있다가 박수호라는 사람이 올 거요. 내가 회의하는 중간에 오면 여기서 기다리라고 좀 해
주겠소?”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한참 후가 그가 오후에 회의실로 간 후 그녀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번호를 두 개 따서 쓰
고 있었다. 하나는 클럽에서만 아는 번호였고
나머지 하나는 그 밖의 전화로 최보희가 받는 전화였다.
클럽 일로 오는 전화인 줄 알고 받았다.
“여보세요? 그린캣입니다.”
콧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린캣? 거창한 이름이시군, 그래.”
소름끼치는 목소리였다.
“누구시죠?”
“클럽에서 알려 주더군. 최세민이란 사람의 보호자시라고.”
“혹시..그...”
휴대폰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사자는 아직 병원에 있소이다. 난 그 사람이 선임한 변호사요. 지금 전치 6주라더군. 어
금니가 2대나 나가고 팔에 금이 가서
기붑스를 하고 있지. 어떻게 사람을 그 지경으로 팼나 몰라. 당신들 고소하겠소.”
“이것 보세요. 고소라뇨. 잘못은 그쪽이 먼저 했잖아요.”
“억울하면 그쪽도 고소하라고. 우리는 전혀 합의할 생각이 없으니까 말이야.”
“무슨...”
그는 만날 생각이 있으면 찾아오라며 주소를 하나 적어 주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예
작정하고 덤비는 데다가 실력있는 변호사들이었기
때문에 앞이 캄캄했다.
심각한 전화를 받자 마자 문이 열렸다.
요즘은 놀랄 일들만 터지는 것 같았다. 태석이 말한 박수호란 자는 그 날 함께 있던 친구중
한 명이었던 것이었다. 저 사람도 날 못
알아 보겠지. 태석도 못 알아 봤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오셨죠?”
보희가 일어나며 물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의 웨이브 머리와 검은 안경에 연한 화장으
로 밤에 일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태석보다 작지만 괜찮은 체격에 좋은 인상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한진 투자회사에서 나왔습니다. 박수호라고 하는데 황태석이사하고 약속을 했습니다만...혹
시 저 본 적 없습니까?”
유심히 그녀의 얼굴을 여기저기 뜯어 보며 자신을 본 적이 없는지 물어 오는 그를 상냥한
웃음으로 대했다.
“글쎄요. 그런 건 여자 꼬실 때나 쓰셔야 적당할 것 같습니다. 김이사님께서 안에서 기다리
시라고 전하셨습니다. 곧 회의가 끝나시니까
금방 들어오실겁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 드리죠. 그럼.”
그가 윙크를 날리며 태석의 사무실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버렸다. 얼굴이 화끈 거렸다.
그의 윙크때문이 아니라 한 순간 그가
알아봤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긴장이 풀려서 인 것 같았다.
태석은 수호란 친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녀에게 차와 현재 투자 유치되고 있는 문서
를 가지고 들어오라고 했다.
차를 내려놓는 순간부터 수호의 눈이 그녀의 뒤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나가자 마자 그가 한마디 던졌다.
“삼삼한데. 어떻게 하면 저런 비서를 거느릴 수 있는 거지? 내 비서는 아줌마야. 아버지가
스캔들 제조기라고 아가씨는 안 된다나
뭐라나.”
“농담하지마.”
그가 정색을 하자 수호의 입이 근질근질 하는 모양이었다.
“이 자식, 얼마 전에는 클럽 아가씨한테 관심 가지더니 혹시 카사노바 기질이 드디어 나타
나는 거 아냐?”
수호는 태석이 노려보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저 아가씨가 너한테 김이사라고 하던데. 뭐야? 설마 말한 거야?”
“신뢰가 가는 여자야.”
“ 근데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김이사라고 해도 되나?”
“너 온다고 해서 내 측근인지 안 거지. 입을 단단히 조심하라고 일러뒀으니까 염려 붙들어
매라.”
그렇게 말하고는 보희가 가져온 서류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투자한 금액이 너무 커. 이러면 금융 감독원에서 들쑤시고도 남을 만한 금액이야. 땅을 사
들이는데 현시세보다 턱없이 높은 금액이야.
서류를 잘 꾸며서 내면야 큰 탈이야 없겠지만 말이야.. 이상하지?”
“그렇군. 아무리 투자 가치가 높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터무니가 없다. 황회장이 횡령을
크게 하는군. 아니면 똑 닮은 아들놈이
벌이는 일이던가.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황회장의 비리가 하나씩 그의 손에 들어오고 있었다. 몰래 사들인 주식들로 이제 황회장은
태석과 같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두고보라고 누가 이기나 말이다.
한편, 그들이 사무실에서 밀담을 나누는 동안 보희는 변호사와의 만남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금액을 불렀다. 합의금 치고
어마어마했다. 사람이 병신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보희에게 합의금으로 8000만원을 불
렀다. 신체적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그들이 내린 합의금이란 것이었다. 그 금액이 아니면 그들은 절대로 합의를 해 줄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현재 그녀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없었다. 매달 가정부 츠량의 월급, 별이의 교육비, 가장
크게 나가고 있는 어머니의 치료비
때문이라도 그녀 수중에 돈이 모일 시간이 없었다. 작은 적금 모아둔 것이 곧 있으면 만기
인데 그것을 빼고 월세로 다시 이사 간다
치더라도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였다.
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빠만 찾았고 츠량은 매일 눈물 바람이었다. 자신이 모아 둔 돈까
지 털어서 보희에게 내밀기도 하였다.
정이겠거니 생각해도 츠량의 마음은 너무 컸고 중국으로 돈을 보내고 적은 돈으로 저축 해
둔 것을 주는 것인데 보희는 차마 받을 수
없었다.
“츠량,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세민이 빼 낼 거야. 걱정하지마. 왜 츠량이 울어? 울어도 내
가 울어야지. 그만해.”
“하지만... 오빠가 너무 고생하잖아요. 날이 따뜻해도 거긴 아마 춥지 않을까요?”
“괜찮아. 거기보다 더한 곳에서 군대 생활도 했는데...어떻게든 될 거야...”
하지만 확신은 없었다. 어쩌지?
보희는 한 가지 희망이 있긴 했지만 그 쪽으로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어긋나면 그
녀는 몸을 팔아야 했다. 몸을 판다 해도 돈만
그녀 수중 안에 들어온다면 모르겠지만 운이 나쁠 경우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밤새 뒤척이며 생각을 해도 별다른 묘안도 없었다. 어머니를 다시 정신 병원같은 열악한 곳
으로 옮기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합의를 못
받아 내면 세민의 앞날은 없었다. 법을 수호할 수 있는 큰 인물도 될 수 없었고 최악의 경
우 방탕한 생활로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합의만이 세민이가 살 길이었다.
보희는 자신의 운에 맡기기로 했다. 카지노에서 일할 때 선배들에 의해 불법으로 내기를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큰 판은
아니었지만 수익의 30%를 그녀가 먹고 나머지는 뒷돈을 대던 사람이 먹었었다. 거기서 한
번도 패한 적은 없었지만 큰판을 만들겠다는
그들의 권유에는 응하지 않았다. 언제 그녀의 운이 다할지도 모르고 패했을 경우 그들의 행
동이 무섭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판은 엄청 컸다.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클 것이다.
다음날로 보희는 회사 일이 끝날 때를 기다렸다. 태석을 보기가 민망했다. 그를 속여 게임을
할 생각에 손이 떨리고 그가 하는 말이
귓가에 들어오지 않아 그의 말을 놓칠 때마다 그가 하루종일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녀를 주
시했다.
일 끝나기가 무섭게 보스 클럽으로 달려갔다. 총지배인을 만나서 당분간 일을 나오지 않겠
다고 하고 만약 태석이 오면 그녀에게 연락을
달라고 했다. 태석이 빠른 시일 안으로 한번은 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가
빨리 그곳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녀 스스로
그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
그 후 몇 일 동안 보희는 태석의 얼굴을 보고 잠을 잘 때는 매일 기도를 했으며 게임에 져
서 그의 노예처럼 사는 생활에 시달리기도
하고 그를 이기고 그녀가 원하는 금액의 돈을 받는 꿈에 울다가 웃다가 하는 날을 보냈다.
보희는 태석이 회사의 횡령건과 그 동안의 사고 경위 자료들을 모으느라 정신 없이 일하는
것을 안타까이 쳐다보았다. 하루라도 빨리
세민을 유치장에서 꺼내 오고만 싶은 마음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핸드폰 벨소리만 기다리
던 어느 날 그가 드디어 클럽에 나타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와 대면하게 되었던 그 방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보희는 최대한 얼굴을 알아
보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화장을 한 후
풍성한 웨이브 머리를 틀어 올렸다. 그리고 일할 때 입지 않는 정장을 차려 입었다. 붉은 계
열의 실크 바지는 그녀의 허리를 조이면서
긴 다리를 유감 없이 드러냈지만 드레스보다는 훨씬 그녀의 육감적인 몸을 가리고 있었다.
하늘하늘한 천이 그녀의 몸을 슬며시 내비치는
옷이라 태석의 정신을 흐릴 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 옷을 선택했다.
“언니 진짜 그 방에 들어 갈 거야? 그 나쁜 자식들 있는 방에?”
보희가 태석에게 맞던 날 같은 방에 있었던 혜미가 가만 있지 못하고 계속 그녀 옆에서 만
류하고 있었다.
“그래 그럴거야. 넌 신경쓰지마.”
“하지만 뭣하러...”
보희가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세민이 아직 유치장에 있어. 합의금이 8천만이야. 어떻게 해서든지 빼내야지.”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다른 사람한테 부탁이라도 해 봐. 사장님한테라도. 언니 예뻐하잖
아. 그리니까...”
혜미가 이지우 사장을 끌어 들였다. 사실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예전에 자신 때문에 부인이 오해를 사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일로 그에게 도움을 받으면 그의 부인에게 미안해서 안 된다는 마
음에 그 생각은 포기했다.
“언니? 그러다가 세민 오빠가 언니가 몸이라도 팔았다는 걸 알며...”
정색을 하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아니, 몸은 안 팔아. 난 내 운을 믿어. 앞으로 나한테 운이 없다 하더라도 오늘 그 운을
다 써서라도 이길 거야. 넌 아무 소리
말고 가만히 있어. 안 그래도 힘드니까. 부탁이야.”
결의에 찬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빛났다. 혜미도 더 이상 그녀를 말릴 만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보희에게는 오로지
가족이란 단어만 머리 속에서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보희는 밀실 입구로 들어가 태석팀이 있는 방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표정에 주변에 있던
웨이터들과 기도를 보는 남자들은 말조차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 태석이 보희를 때렸던 그때 그 방이었다. 그 방으로 다가 갈수록 심
장이 떨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떨리는
몸을 가다듬기라도 하듯 손을 주물러 보았다.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고 들어 갔지만 유일하게 한 사람만이 그녀를 보았다. 태석. 하루종
일 조여 메고 있던 은회색의 실크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하얀 와이셔츠 단추를 한 단 풀어 헤친 자세로 앉아 그녀를 유심히 보고 있
었다.
“무슨 일이지? 카드 친다는 소리는 안 했는데...”
“당신한테 할...할 말이 있어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떨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당당함을 잃으
면 안 된다. 이길 수 있다는 암시를 계속
되뇌었다.
주먹에 점점 힘이 들어가서 긴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주목되어 있었다.
“할 말이라? 글쎄 그게 뭘까?”
그는 거만하게 살짝 비웃는 표정을 보였다. 사무실에서 그녀를 대하는 태도와 사뭇 달랐다.
사무실에서의 그는 그녀를 많이 배려해 주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참았듯이 참아야 한다. 저 사람만이 세민이를 구할 수 있으니까.
“그 때 그 제의 받아 들이겠어요. 설마 이젠 안 하겠다는 말은 안하겠죠?”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작 거리며 생각하는 자세를 취했다.
“제의? 내가 무슨 제의를 했던가?”
그는 그녀의 입으로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기도가 막힌 듯 한 마디
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을 않고 가만히
있자니 그가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이 작은 감탄사를 내비쳤다.
“아...그거 말이군. 내기 도박. 내가 이기면 내 여자가 되고 당신이 이기면 원하는 액수를
지불하는 조건을 말하는 건가?”
“그래요, 그 내기 말이예요. 이제 기억이 났나 보군요.”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회사에서는 저렇게 거만한 표정, 말투는 없었었다. 그도 그녀처럼
두 개의 가면을 지니고 사는 인간이었다.
“미쳤어? 지우형이 알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수호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태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렸다. 지금 그가 태석을 말리는 것
은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형이 알아도 어쩔 수 없어. 유부남이 처녀 총각 일에 나서야 쓰겠어. 이건 개인적인 일이
지? 안그래, 그린캣?”
그녀의 애칭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말하였다.
“맞아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죠. 어떡하시겠어요? 하겠어요?”
그가 승낙을 했으면 하는 바램과 거절했으면 하는 두 가지가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
다.
“뭐... 좋소.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 증인이오. 각서라도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좋아요. 얼마든지 쓰죠. 나중에 두말하지 않게 말이예요.”
태석의 친구들은 등 떠밀리 듯 소정의 양식으로 된 각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태석은 네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지만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그만 두는게 어
때?”
“넌 그냥 게임이나 즐기면 돼. 내 일이야.”
“하지만 저 여자가 터무니 없는 가격을 제시할 경우는?”
태석은 여전히 수호의 걱정을 무시했다.
“김태석이 게임에서 이길 경우 그의 조건에 따라 그린 캣은 그의 정부가 되며 만약 그린캣
이 이길 경우 김태석은 조건에 따라 그녀가
원하는 금액을 지불함.”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도장이 없는 관계로 보희는 그들이 먹고 있는 술 안주에서 색소가
있는 액체에 엄지손가락을 담그고 지장을
찍었다. 나중에 색이 바라더라도 그녀의 지장은 남을 것이다.
카드를 칠 테이블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태석의 친구들은 한쪽에 호스티스들을 끼
고 둘러 섰다.
그녀가 원하는 금액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태석도 미리 물어 보지 않았을 뿐더러 그
녀도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누가 이길 것인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내기들을 하고 있었다.
“게임은 뭘로 하죠?”
태석은 어깨만 으쓱거릴 뿐이었다.
“간단하게 한판으로 하시겠어요?”
태석이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려 그녀 가까이로 다가 왔다.
“글쎄 한번은 섭하지 않을까. 만약 당신이 졌을 때 억울하다고 느낄 수도 있으니 3판 2승
제로 하지. 어때? 게임은 당신 좋을대로
하지. 그린캣?”
그의 놀림에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태석은 보희의 눈 색깔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녀에게 못 되게 굴고 있는 자신의 나쁜 행
동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존심이
무척 쎄 보였다. 최보희처럼. 하지만 그린캣이란 여자에게서는 자존심을 자신 앞에서 못 세
우게 하고 싶었다. 따귀까지 때려 가면서
거절했던 그녀가 자기 발로 찾아 올 정도라면 아마 다급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자존심을 버릴 만큼 인생 최대의 도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거기에 응하
고 싶을 따름이었다. 지게 되어서 그녀에게
돈이 간다 해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럼 우선은 블랙잭으로 하죠? 어떻게 하시는지는 알고 계시겠죠?”
“물론이오. 외국에서 카지노를 몇 번 들락거렸지.”
블랙잭은 세 장의 카드 숫자 합이 21에 근접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단순하지만 카지
노에서 한다면 신중을 기할 게임이었다.
“카드는 제가 섞겠어요. 이의 있나요?”
“공평성을 위해 내가 하지.”
수호가 자청하듯 끼어 들었다. 보희는 그의 눈썰미가 마음에 안 들었는데 아까부터 걸리적
거렸다.
“좋으실 대로.”
“아가씨, 볼수록 어디서 본 것 같아”
“글쎄요. 그런 말은 여자 꼬실때나 쓰시죠?”
“오... 그 말 태석이 너의 그 삼삼한 비서 아가씨도 나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었지. 가만...
그러고 보니 좀 닮은 듯도...”
태석이 그를 제지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보희씨랑 닮은 구석은 없어. 그녀는 이렇게 요란하게 생기지 않았거
든.”
그가 뚫어져라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보희는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보희가 자신
과 동일 인물임을 모르고 그녀를 노골적으로
비꼬고 있었다.
“그런가 난 닮은 것 같은데...아닌가 보지.”
그가 술이 취해 패가 영 제대로 섞이질 못하는 것 같았다.
“게임이나 하시죠.”
블랙잭에서 J,Q,K는 10으로 계산하고 A는 1또는 11로 계산할 수 있었다. 보희와 태석에게
교대로 패가 2장씩 주어졌다.
그녀의 패는 A,10 이 들어 왔다. 블랙잭이었다. A를 하드카드로 계산해서 11이고 10카드가
들어 왔으니 합은 21이었다.
태석은 한참 고민하더니 히트(카드를 한 장 더 받음)를 불렀다. 그리고 보희를 쳐다 보았다.
보희의 눈이 희미한 조명 아래서 희미하게 야밤의 고양이 눈이 빛나듯 빛나고 있었다.
“묘한 아름다움이야.”
태석의 말을 보희는 무시했다.
“스탠드(더이상 카드를 받지 않음)”
태석에게 패가 한 장 돌아 갔다. 태석은 패를 보더니 테이블 중앙으로 던져 버렸다. 하지만
초조해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네 판이
남았다.
그는 K,3,J 합이 23으로 버스트(21을 초과하였을 경우)여서 자동으로 그녀에게 패한 것이었
다. 보희가 활처럼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 세웠다. 그녀가 패를 뒤집어 테이블 중앙으로 던졌다.
그녀의 패에 여자들은 좋아하고 남자들은 야유를 부렸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어.”
태석의 한마디에 좀 풀렸던 긴장이 다시 조여 왔다.
“물론이죠. 이번에도 블랙잭으로 하죠.”
다시 패가 돌아 갔고 이번에는 패가 너무 안 좋았다. 그녀의 패는 A,5였다. 17이 넘지 않아
자동으로 카드를 받아야 했다.
“히트”
“히트”
두 남녀는 동시에 히트를 외쳤다.
카드가 다시 돌았다. 제발 이겨야 한다. 2번만 이기면 되는데...
“흠. 내가 이겼군. 블랙잭. A,Q,Q. A카드를 소프트 카드로 계산하니 1일고 나머지는 10으
로 계산해서 21이군. 당신 패는?
설마 푸쉬(똑같은 합일 경우 비기는 것)는 아니겠지?”
물론 그녀의 패는 마지막 장으로 3을 받아 합이 20이였다. 그녀의 패배였다.
“아직 3번 남았군. 일대일이야. 잘하라고.”
수호가 태석을 응원하자 호스티스들은 그녀를 응원했다.
“아, 이번에는 그냥 세븐 카드로 하지. 보편적으로 하는 더 생각하고 말고도 없이 말이오.
여기서 승패가 나겠지. 어떻소? 자신
없소?”
“좋아요. 하죠.”
보희는 그가 제안하는 대로 하였다.
카드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패는 하트 K, 10번과 5번이였다. 뭘 뒤집어 내 보일
지 고민이었다. 그녀는 K를 뒤집어
놓았다.
태석은 자신의 패를 보지도 않고 아무거나 받자마자 뒤집었다. 스페이드A였다. 그는 별 생
각이 없이 하는 것 같았다.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이란 심보였다.
다시 패가 돌아 그는 각 스페이드 5번과 2번, 하트 A를 받았다. 여기서 죽는 것은 없었다.
그가 패를 보지 않았고 원패어(두장의
카드 숫자가 같음) 일수도 있었다.
그녀의 패는 하트 3번과 다이아몬드 A, 클로버 10이었다. 나머지 한 장이 하트가 나오면 그
녀는 플러쉬(같은 문양이 5장 있는
것)이고 그가 스트레이트라도 그녀가 이기는 것이었다.
마지막 그녀의 카드를 조심히 들쳐 보았다. 하트 2번이었다. 플러쉬다. 과연 그는 무엇일까.
그가 다른 모든 카드를 뒤집었다. 스페이드 A, 2번, 3번,5번, 7번, 하트 A, 클로버 4였다. 그
도 플러쉬였다. 그도 운은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음.. 같은 플러쉬니까 서열 높은 것부터 따지면 가장 높은 숫자는 당신과 나랑 같고 다음
으로 높은 것이 당신의 K카드군...이번
판은 당신이 이겼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는 여유로워 보였지만 보희의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흘렀다.
“너무 긴장하는 군. 남자랑 몸 꽤나 섞어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군요.”
간신히 이겼다. 자칫하면 질 뻔했다. 이제 한번만 더 이기면 되었다. 한번만 더 운이 따라
주길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다시 패가 돌았지만 이번 게임은 그의 승리였다. 보희는 Q트리플(세장의 숫자가 같은 카드)
이었고 태석은 A포카(네장의 숫자가 같은
것)였다.
“이런 그린캣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군. 운이 다한 거 아닌가?”
“아직...아직 한 판 남았어요. 이번에는 텍사스 홀드엔으로 하죠? 이 게임도 물론 아시겠
죠?”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텍사스 홀드엔 5장으로 하는 카드인데 먼저 딜러에게서 2장씩의 카드를 받는데 이 카드는
자신만의 카드가 되고 ‘컴뮤니티 카드’이라고
불리는 카드 다섯 장을 테이블 중에게 놓는다. 테이블에 공개된 카드는 플레이어들의 카드
인데 자신만의 카드 2장과 테이블 카드 5장을
조합해서 적당한 카드 다섯 장을 만드는 것이다. 카드의 서열은 세븐 카드의 서열과 똑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굳이 자신의 카드 두
장을 사용하지 않고 테이블 위의 카드 5장으로도 승부를 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테이블 위
의 카드가 다이아몬드 10,7,5,4,2라고
했을 때 이것은 플러쉬지만 내가 가진 카드 중에 다이아몬드 카드가 없고 상대가 다이아몬
드 카드 8을 들고 있으면 나도 플러쉬지만 그도
다이아몬드 플러쉬로 내가 가진 테이블 카드 보다 놓은 숫자8이라는 카드가 때문에 상대가
이기는 게임인 것이었다.
이번 판은 아마도 비기는 것은 없을 것이다. 비길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내 카드는 달랑 두
장이고 승부는 ‘컴뮤니티 카드’에서
판가름 난다.
그녀를 압박하는 긴장감에 손에서 계속 땀이 났고 손바닥을 자신의 옷에 문지르기를 수십
번하고 있었다.
태석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긴장하고 있었다. 누가 이길지 막상막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궁
금증으로 더 긴장하고 있었다.
태석은 처음 그대로의 여유로움으로 담배까지 피우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수호가 패를 다시 골고루 섞고 있다. 지금은 술이 깼는지 처음과 달리 능숙하게 카드를 섞
고 있다. 수호가 태석부터 패를 한 장씩 해서
그녀에게 돌린다. 두장의 패가 태석과 그녀 앞에 놓였다.
태석은 패를 가만히 들춰 본 후 그녀를 바라보며 웃는다. 두장에서 저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의
정신을 비웃는 교책일 것이다.
그녀의 패는 하트 8번과 9번이었다. 어찌됐건 지금은 차라리 원패어가 나오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몰랐다.
테이블 중앙에 패 세장이 깔렸다. 하트 J, 7번, 클로버 10번, 이 카드 세장을 ‘풀옵’이라고
하는데 컴뮤니티 카드로서 게임
플레이어들의 공동의 카드였다. 태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호는 다시 4번째 카드인 턴을 내
놓았다. 하트 10번이었다. 이미 보희는
스트레이트 플러쉬였다. 같은 모양의 연속적인 숫자가 만들어졌다. 현재 나와 있는 것으로
태석은 원패어였다. 아마 그는 투패어나
트리풀카드가 다 일 수도 있었다.
마지막 5번째 카드인 ‘리버’가 깔렸다. 이제 7장의 카드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수호의
손이 치워지면서 결론이 날 순간이었다.
하트 Q이었다. 생각해 보아야 했다.
그녀는 지금 Q스트레이트 플러쉬로 이긴 것이다. 다 이겼다. 보희는 이제 그녀가 원하는 금
액을 무사히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보희는 세상에서 최고였다. 그녀의 평생 운이 전부 바닥이 났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웃으면서 카드를 태석 앞으로 던졌다.
“하트Q를 앞세운 스트레이트 플러쉬예요. 각서대로 이행해주시죠. 아.. 뭐라고 불러야 하
죠?”
보희는 그를 모르는 척 물어 보았다.
태석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녀가 원하는 금액이 얼마일지 생각도 안 해 보았고 그녀의 생각
을 뒤집을 생각이었다.
“내 이름은 김태석이오. 그 쪽 본명은 뭐지?”
“글쎄요. 그런 건 알아 봐야 좋을 것 없지 않나요? 이젠 볼일도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김
태석씨?”
그녀가 수호에게 각서를 요구하려고 일어나려고 테이블에 손을 짚는데 태석이 그녀를 불렀
다.
“이봐. 그린캣. 아직 내 패를 보지 않았어. 왜 이긴 것처럼 행동하는지 모르겠군.”
“당신이 이길 리가 없어요. 스트레이트 정도면 많이 나왔겠죠. 안 그런...”
보희는 태석이 뒤집은 그의 패를 보고 일어나다 말고 주저 앉았다. 로얄 스트레이트였다.
나오기도 힘든 패였다.
“사...사기야. 그럴 리가 없어.”
자신 혼자 말하듯 조용한 말소리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잘 보시오. 그린캣. 하트A,K,Q,J,10이오. 이래도 못 믿겠소? 날 사기꾼 취급하는 것은 마음
에 안드는 군. 하지만 1년을
같이 살아야 할테니 참고 넘기겠소. 여기서 이젠 못 도망간다는 것도 알겠군.”
보희는 말이 없었다. 태석은 그런 그녀가 안쓰럽기는 했지만 약속도 약속이지만 그녀를 취
할 정당한 방법을 찾자면 이것 밖에 없었다.
만약 처음에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대쉬를 했다면 모르겠지만 볼짱 다 본 사이라 다시 어떻
게 해 보기에는 좀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이다.
“참나, 희비가 교차되는 순간이군, 그래.”
“아잉. 언니 얼굴 펴. 저런 멋쟁이 오빠랑 사는데. 나 같은면 당장 오빠랑 즐길 준비도 되
어 있는 걸. ”
그들은 누가 어떤 감정이든 자신들이 즐거우면 그만인 듯 웃으며 태석과 보희에게 어이 없
는 축하를 하고 있었다. 태석은 이기고도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짐을 묵묵히 들고는 그녀에게 다가 왔다.
그리고는 수호에게 각서를 받아 들고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힘쎈 그가 그녀를 한번에
일으켜 세우자 시끄럽던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오빠, 언니 살살 다뤄요. 몸 주는 일은 처음 같은데. 자존심이 오죽하겠어.”
그녀를 시샘하던 여자 중 한 명이 약을 올렸고 보희는 그런 그녀를 참아 왔던 시간만큼 한
대 크게 뺨을 올려 붙였다. 그녀는 저만치
나가 떨어졌고 모두가 그녀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막을 생각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태석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잠시 놀란 눈치였다. 보희는 그에게서 팔을 떨쳐 내고 먼
저 걸어갔다.
“나가죠. 여긴 이제 볼 일이 없으니까.”
등뒤로 그녀한테 맞은 여자의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고 왜 그런 입방정을 떨었냐며 나무라는
사람들의 소리도 들렸지만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다. 지금 정신에 서 있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태석은 그녀의 짐을 챙겨 오라고 하고는 잠시 후 그녀를 차에 태우고는 어디론가 향했다.
클럽을 빠져 나와 간 곳은 회사 근처의 한 아파트였다. 지은 지는 얼마 안 된 건물이었고
온 벽이 보기에도 으리으리한 대리석과 화려한
조명기구들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은 아늑했으며 일상 생활 속에서 보던 영안실 같은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집
안에 작은 방같이 앉아서 쉴 수도 있게 긴
소파도 있었다. 이런 아파트가 있다는 것은 보희는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가 데려가는 대로 죽은 듯이 따라만 다녔으며 말 한마디 할 필요가 없던 것이 그 또한 말
을 걸지도 하지도 않았다.
4층에서 내린 그들은 복도 가장 끝에 있는 문 앞으로 다가가 섰다. 태석이 곧 카드를 꽂고
비밀 번호를 누른 후 마지막으로 열쇠로
문을 열었다. 집 지키기 하나는 철통같이 하고 있었다.
태석이 그녀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혼자 쓰기에는 너무 넓은 집 같았다. 원룸도 아니었다.
방도 두 개 정도 있는 듯 했고 거실도 넓은
게 사람들을 초대해도 될 만한 크기였고 요리라고는 안 해 먹을 것 같은 사람한테 부엌도
깔끔하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이 집을 본 느낌이 정이 없는 것은 주인이나 물건이나 하나라는 것이었다. 일하는 성격은
깔끔하니 인테리어가 단조로우면서도 현대적으로
편리하면서 아주 사무적인 느낌으로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이라 사람이 안 사는 것처럼 썰렁
했다.
쭈뼛쭈뼛 서 있는 보희를 흰 모피로 쌓인 소파에 앉히고는 그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뭘 좀 마시겠소?”
아무 대답이 없자 그는 자기 마음대로 뭔가 만지작 거렸다.
그가 호박색의 알콜을 가지고 왔다. 한잔은 그녀 앞으로 한잔은 그 앞으로 하고 앉았다.
“본명이 뭐지?”
보희는 그의 눈을 볼뿐 뭐라고 대답할지 궁리 중이었다.
“말하기 싫은가? 그럼 그린캣 말고 예명이라도 하나 말하시오. 당신한테 그린캣이라고 하
기는 좀 뭐하군.”
“저..그냥 당신이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불러요. 미워했던 여자나 사랑했던 여자..뭐 그런
거 있잖아요.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떻겠어요. 어차피 일년인데.”
태석은 보희의 뻣뻣해하는 태도를 바라보며 즐기는 것 같았다. 그의 입가에 또 미소가 번졌
다. 저런 미소를 지을 때는 뭔가 누군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떠올렸을 때일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말인데 이름을 보희라고 하지.”
놀란 보희는 그만 술잔을 떨어뜨릴 뻔했지만 손이 미끄러진 척을 했다.
“그..그러세요. 의..의미가 있나요?”
“내가 아는 어떤 여자의 이름이오. 더 이상은 알 것 없고.”
표정이 묘했다. 뭘 생각하는 거야. 혹시 변태는 아닐까 그녈 통해 비서인 보희를 대신하려는
것인가...그는 그녀에게 키스를 한 경력이
있는 남자였다. 혹시...비서는 함부로 하기 어렵고 지금의 난 괜찮다는 그런 사고 방식인 것
은 아닌지 의문이었다. 지금의 그를 속이는
것이 과연 괜찮을지 의심스러웠다. 나중에 별탈이 없길 바랄뿐이다.
보희는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잔에 담긴 술을 주욱 들이켰다. 사래가 걸려서 기침이 나
오자 그가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말투와
달리 자상한 손길이 었다.
“내일 당장 짐을 옮기는 게 좋겠군. 잠은 오늘부터.”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그건..먼저...”
그녀가 다 말하기 전까지는 그는 말을 안 하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등을 기댔다.
“큼..후...미안하지만 난 돈...”
“안 들리는 군.”
“난 돈이 필요해요. 그것도 당장. 내가 필요한 돈을 준다면...당신이 하자는 건 뭐든 할게요.
돈 좀 줘요...”
“당신은 이미 내 여자라서 난 그런 조건을 들어 주지 않아도 된다는 걸 모르나?”
자존심을 버린지 한참 이었고 더 이상 구길 자존심은 남아 있지도 않았다. 고개를 숙이면
안 되는데 자꾸 고개가 떨어지려 했다.
“절박해요. 뭐든 하겠어요...”
너무나 떨리는 목소리에 태석은 잠자코 그녀의 얼굴을 손에 쥐었다.
“절대 다른 남자는 안 돼. 나도 게임이기는 하지만 상품을 얻은 기분으로는 갖고 싶지 않
아. 얼마를 원하지?”
“2억이요...”
적지 않은 액수였지만 그녀의 몸 값을 친다면 절대 싸다고 할 수도 없는 금액이었다.
“2억이라...좋아. 주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그가 키스를 했다. 그의 몸에서 떨어진 보희가 물었다.
“좋아요. 언제 주실거죠?”
돈이 먼저였다.
“계좌를 주면 내일 은행 열리는 대로 넣어 주겠소.”
보희는 테이블에 놓인 메모지에 자신의 계좌 대신 세민의 계좌를 적었다. 그가 메모지를 받
아 들고는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누구지?”
“분명히 하지만 사생활은 서로 터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다닐테니까.”
“돈에 묶인 사람이 사생활이라고? 아까도 말했지만 다른 남자는 안 돼. 명심하는 게 좋
아.”
“주목적은 동거예요. 같이 사는 거죠. 물...물론 잠자리가 포함되어 있겠지만 내 생활사까지
는 관여하지 말았으면 해요.”
잠자리 얘기가 나오니까 마음이 떨리고 불안했다.
“당신 과거야 내 알바 아니고 당신이 뭘 하든 상관은 없어. 근데...남자는 안 돼. 알았어?
이 남자도 곧 정리하는 게 좋을 거야.
이 놈팽이가 내 여자 기둥서방 노릇하면서 등골 빼먹는 꼴은 못 보니까 말이야.”
세민이 누군지 그는 알 수 없었으니 추측은 그의 자유였다.
“그렇게 하죠.”
“그리고 클럽은 그만 나가시오. 당신이 밤일을 나가고 내가 낮일을 나가면 잠자리 일을 해
결을 볼 수 없으니까. 설마 이것도 사생활
침해라고는 안하겠지?”
그의 일침이었다. 회사 일만 발각되지 않으면 된다. 일단은 이곳을 계속 다니다가 짧은 경력
이지만 다른 곳으로 일자리를 바꿀까하는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였지만 특이할만큼 바쁜 일이 아니면 한달 전에 통보를 해야 했
다. 그나마 그녀가 제시한 금액을 그가 불평하지
않았고 밤일을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벌이가 되었다.
“보희, 당신이 먼저 씻겠소?”
그녀의 이름을 듣자 깜짝 놀랐다.
“네?”
“욕실은 저쪽, 내 방은 이쪽이오. 딴 데로 새지 말고 바로 오시오.”
그가 방안으로 들어 갔다. 유유히 사라지는 그의 등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아직 남자를
접해 보지 못한 그녀로서는 손발이 저리는 것처럼 감각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듣기는 했지만 경험은 없었다. 세민이 이 사실을 알면 그녀를 죽이려고 들것이
다. 분명히.
일단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과 대조적으로 블랙 톤의 인테리어와 사방의 거울들이 정
말 신경이 쓰였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앉았다가
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생각에 뛰어가서 잠금 장치를 걸었다. 문에 기대어 앉아 있던 그녀는
생각해야 했다.
막상 닥쳐오니 도리가 없었다. 만약 졌을 경우 그녀는 과감하게 그에게 몸을 주자는 생각이
었다. 막상 일이 그녀에게 닥치자 온 몸이
굳어 지는 것처럼 뻣뻣했다. 그렇다고 구차하게 나 처녀니까 한번만 봐 달라는 짓은 죽어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보희는 머리를 때려 가며 시간아 내월하고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안 나오고 물소리도
나지 앉자 문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희야, 뭐하는 거지?”
“아직... 기다려요. 20분 있다가 나갈게요. 나간다고요.”
그녀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더 이상 그가 재촉하지 않았다.
보희는 물을 틀어 샤워를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몇 번이고 씻었다. 벌써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만지기라도 한 듯이 그녀는 몸을
계속 씻었다. 선배들이나 친구들은 싫은 남자가 만지면 벌레가 몸 위를 기어다니듯 기분이
나쁘다고 했었다.
씻으면서 계속 눈물이 났다. 가족을 위해서라지만 정말 이렇게까지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
럴 바에는 애초부터 술집 출근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돈도 더 벌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보희는 은밀한 부분을 씻고 또 씻고 씻었다.
샤워를 마치고 큰 타월로 몸을 말린 후 마땅히 걸칠게 없어서 태석의 목욕타월을 입었다.
너무 커서 아기가 아빠 옷을 훔쳐 입은 듯이
가운 밑이 그녀의 발목까지 왔다. 뿌옇게 김이 서려 있는 거울을 닦아 내자 그녀의 화장기
없는 청초한 얼굴이 나타났다.
회사에 출근하는 보희와 눈 색깔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닮았다. 안경을 쓰면 아마 똑같이 보
일텐데 걱정이었다. 여기서는 안경쓸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생 머리카락이지만 그녀가 아침마다 공을 들여 웨이브
머리를 만들어 다녔기 때문에 인상이 달라
보였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녀의 정체가 탄로 난다면 죽고 싶은 심정이 될지
도 모른다.
또다시 태석이 문을 두들겼다. 보희는 대답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그가 좀 놀란 듯이 그녀
를 보고 있었다.
“인상이 전혀 틀리군.”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정확한 표현은 없었다.
그가 그녀를 이어 욕실을 사용했다. 태석은 욕실 안이 습한 것을 느꼈다. 그녀가 쓰고 나온
후 수증기들 때문에 습한 것이었다.
목욕한 여자를 보고 욕망을 느끼는 남자들이 있다고 하던데 그가 그 과에 속하는 모양인지
그녀의 모습에서 흥분감을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너무나 큰 가운하며 자기 얼굴보다 더 크게 감싼 머리에 쓴 수건도 화장기 없
이 하얀 피부에서 전혀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야한 여자에서 청순한 여인으로 변했다고 해야 옳았다. 가려진 모습이었다.
샤워를 하면서 자신이 좀 이상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를 돈으로 얻어 본적이 없던 그가
그녀를 돈으로 엮고 옆에 있기만 해도 좋은
여자 최보희의 이름을 그녀에게 붙인 행위는 아마 그의 비서 보희가 들었다면 경악해서 넘
어갈지도 모를 사건이었다.
그가 샤워를 하고 나가자 보희는 그의 방이 아닌 소파에 앉아 술을 먹고 있었다. 그가 샤워
를 짧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술이 벌써 3분의
1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좋은 술이었지만 꽤 높은 도수였고 급하게 마신 탓인지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그녀한테서 술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술을 마시니까 확실히 몸에 열기가 돌면서 긴장감이 싹 사라지는 군요. 김태석이라고? 당
신도 한잔해요. 돈 많은 사람들은 좋죠. 근심
걱정 없고. 배부른 소리들만 하고 있으니 말이예요. 듣자하니 아버지 복수랍시고 황회장이란
작자한테 이를 갈고 있던데 그래도 그런 사람
보살핌이라도 없었으면 당신이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을까?”
보희는 일부러 그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의 눈에 힘이 들어 가고 있었지만 딱히 내색을 하
진 않았다.
“차라리 황회장같은 양아버지였다면 난 당신처럼 배은망덕한 짓은 안 할거야, 아마. 사랑하
는 사람 때문에 몸파는 신세가 참으로
불행하지. 불행은 이런 걸 두고 불행이라고 하는 거예요. 부잣집 도련님 김태석.”
그가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아서 벽으로 던졌다. 그는 더 말은 하지 않았다. 태석은 황
회장틈에서 자신까지 없애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으로 10여년 세월을 살았다. 성인이 되어서 친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그 돈으로 독립
을 하면서 나머지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어설프게 알고 그한테 퍼붓는 그녀가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다른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
었다. 그녀 자신의 지금 상황 때문에 그한테
악담까지 하는 것이겠거니 하고 참아 넘길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입을 굳게 다물고 놀란 새끼 고양이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
를 내려다 보았다.
“할 말 없어?”
보희에게 묻는 말이었다. 그의 눈은 사과를 구하고 있었다. 그의 눈썹이 또다시 살짝 치켜올
라갔다.
“미..안해요.”
그는 곧 눈썹을 원위치 시켰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가 잡아 끌어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보희는 이제 올 때가 왔다고 생각했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나는 마네킹이야.
마네킹. 이렇게만 생각하면 돼. 처음은
아프기만 할 뿐 아무 느낌도 없다고 했고 그녀가 반응을 하지 않으면 그도 이런 관계를 오
래 지속하고 싶진 않겠지하고 생각했다.
“술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살을 섞는 짓은 하지 않아요.”
그 말은 그래서 술을 마신 것이란 소리였고 그를 자극시킨 듯 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한테 빠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도리질로 반항했지만 그의 힘 안에서는 계
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그때 그 감정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고 있었다. 태석이 사무실에서 키스하던 순간이 지금 또 찾아왔다. 그와의 입맞춤에
서 숨이 걷잡을 수 없이 꽉 막혔다. 언제
숨을 쉬는 것이었지 하는 생각들로 폐가 터져 버릴 듯 했다. 태석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자
신의 아랫도리 쪽으로 바싹 잡아 끌어
안았다.
숨쉬기가 곤란해진 보희는 그의 가운 앞섶을 꼭 쥐어 짜 보았다. 그게 통했는지 그가 천천
히 입술을 떼어냈다.
가뿐 숨을 몰아 쉬며 상기된 얼굴로 그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키스를 하면 싫은지 좋은지 알 수 있지. 당신은 날 싫어 하지 않는군. 술은 괜히 마셨어.
그리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잖아? 난 목석을 사지 않았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다가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그 말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고
그를 밀쳐 내려 했다.
“늦었어.”
그의 낮고 부드러우며 조용한 목소리가 그녀 귓가를 간지럽혔다.
보희의 가운 허리끈이 느슨해 지면서 알몸이 드러났다. 그의 양손이 그녀의 가운 안으로
파고 들어 그녀의 허리부터 천천히 쓰다 듬어
갔다. 허리, 힙, 허벅지, 다시 위로 그녀의 배와 가슴 목덜미 순으로 천천히 그녀를 몰아 세
우고 있었다. 마네킹이라는 말을 되뇌이고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온몸의 혈관들이 요동을 치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
했다.그는 마술사처럼 손 하나로만 그녀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넘어질까 두려워 그의 옷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 위에서 완전히 가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젖은 타
올도 떨어지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물기를
떨구며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 졌다.
그녀를 들어 올려 자신의 침대위로 내려 놓았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고 그가 떨고
있는 것인지 그녀가 떨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도 그도 떨고 있을 것이다.
그의 심장이 그녀의 심장 박동수와 같이 뛰고 있었다.
그를 보고 누워 있는 보희는 남자의 손길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고 그에게 끌려 들어
가려는 자신이 미웠다. 그에게 손을 댈까
두려워 침대 시트를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을 감싼 채 그의 입술이 그녀의 눈 코 입술 할
것 없이 온 얼굴에 깃털처럼 부드러운 키스
세례를 퍼 부었으며 그녀의 목덜미와 움푹 파인 쇄골과 그녀의 아름다운 언덕을 향해 키스
행진을 해 나아갔다. 그녀의 입술에서
신음소리가 세어 나오자 깜짝 놀라서 입술을 깨물어 보기도 했지만 너무나 고통스러운 고문
에 자꾸만 소리가 나왔다.
그녀 안의 열정이 그한테 달려가겠다고 악을 쓰는 통에 침대 시트가 찢어져 나갈 것 같았
다. 그가 계속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현재의 그녀인지 비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은밀한 장소로 이동을 했고 그녀의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또 그녀의 입술을 공략해서 장벽에 허점을
드러나게 했다. 서서히 열리는 장벽 사이 숲으로 그의 크고 거센 손이 밀치고 들어 왔다. 그
녀의 민감한 부위를 건드리며 그녀를
희롱하고 있었다. 따뜻하게 젖어 드는 숲에서 그의 손은 벗어 날 줄 몰랐고 결국 보희의 입
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고 아랫배에서 소용돌이
치는 열기로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그의 애무에 그녀가 넘어가고 있었다. 온몸을 갈구
하는 그의 손길과 입술, 그리고 온몸에서
느껴지는 욕망이 그녀의 온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그녀의 손이 고통에 못 이겨 그의 어깨로 다가 갔다. 뭔가를 안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깨달
음이라고 할까. 그의 목을 감싸안기가 무섭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취해도 취해도 부족하듯 수줍은 그녀의 혀에 감겨 오는
그의 따뜻한 혀에 한없이 빠져 들어갔다.
그의 감정과 그녀의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을까 그가 다급하게 서랍장에서 뭔가를 만지작 거
리더니 그녀와 그 사이에서 일을 마친 후 천천히
천천히 그녀를 향해 미끄러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 안에 누군가 침범한다는 생각에 좁은 길이 긴장을 보였고 그가 살며시 뒤로 물러
나면서 그녀의 긴장감을 풀어 주었고 남들이
말한 것처럼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그 아픔을 즐겼지만 눈물이 흐르는 까닭이 무
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 하는 내내
그녀는 행복과 불행한 마음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그녀의 첫 경험은 그렇게 시작한 것이었
다.
다음날 태석이 대가로 준 돈을 찾아 변호사 사무실로 가서 합의를 했다. 그들에게 물을 한
컵 뿌려주고 사무실을 나왔다.
경찰서로 가서 세민을 데리고 나왔다. 그는 차안에서 합의금을 어디서 났냐고 물었다.
“넌 그 일에 신경쓰지마. 누나가 알아서 했으니까.”
“어떻게? 그 큰 돈이 누나한테 어딨어. 내가 뻔히 아는데.”
“누나 돈 없는 거 알면 앞으로는 함부로 힘쓰지마. 그게 도와주는 거야.”
너무 피곤해서 말 할 기운도 없었다.
“그 일은 정말 참을 수 없었어. 내가 일을 더 해서라도 돈을 벌 테니까 누나도 이제 그 일
하지마.”
“니가 일을 더 할 필요는 없어. 그만 뒀으니까.”
“정말이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어머니 병원비 때문이라도 일을 더 하겠어.”
“아니, 넌 공부나 하면서 복학 준비나 해. 쓸데없는 일은 말고.”
“알았어. 그래도 복학 전까지 일은 계속 하겠어. 그나저나 별이는?”
“츠량이 잘 돌봐 주고 있어. 니가 어디갔는지 물어 되는 통에 난감했지. 넌 아무 말도
마.”
“츠량은 어때?”
“글쎄, 니 걱정에 애가 살이 빠질라 그런다. 누나인 나보다 더 걱정을 하는 마음 씀씀이에
고맙더라.”
“그래...”
세민은 창문 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뭐가 걱정인 거니?”
“아니야...그게... 나중에 말할게. 나중에...”
그녀는 세민의 행동에서 설마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접어 두었다.
보희는 세민과 할 이야기가 있어 집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여기 소주 한 병하고 골뱅이 무침 하나 주세요.”
“누나 술도 잘 못하면서 무슨 소주야?”
“너랑 한 잔하고 싶네, 오늘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얼마쯤 앉아 있었을까 누나의 이상한 행동에 그가 먼저 말문을 열
었다.
“누나... 이상해. 무슨 일이야?”
말을 꺼내기 앞서 한잔 더 술을 마셨다. 알싸한 맛이 그녀 입 전체로 감돌았다.
“나...어떤 남자랑 동거할 거야.”
“누나 남자 있었어?”
그녀한테 남자가 있었던 낌새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해 두자. 그 사람은 나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어. 나도 그 사람에 대해 별로 아
는 건 없어. 1년간 동거 하기로 했다.
일이 있어서 앞으로 출근 준비하러 아침마다 올 테지만 어머니한테 가는 건 힘들 거야. 니
가 별이랑 어머니한테 많이 신경 좀 써.”
“그 남자하고 만난 지 얼마나 됐어?”
알아야 했다.
“얼마 안 됐어. 클럽에 오는 손님이었거든.”
“누나 혹시...혹시.. 아니지? 말을 해봐. 나 때문에 그런 거지? 그렇지?”
그녀가 가족까지 숨기면서 동거를 할 사람도 아니었고 얼마 만나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
는 사람하고 그럴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었어. 네가 나였더라도 넌 그렇게 했을 거야. 감옥갈 널 생각하면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어. 이해해라.”
술잔을 기울였다.
세민은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을 쾅하고 내리쳤다. 술병이 쓰러져 술이 흐르고 잔은 떨어져
서 깨져 버렸다.
“빌어먹을, 누구야 그 자식이? 누구냐고?”
“넌 모르는 사람이야. 알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일년만 참는 수밖에 없어. 일주일 있다가
짐 옮길거야 그렇게 알아 둬.”
“모르는 척 하라고? 나 때문에 누나 인생이 엉망이 되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누나
나 어린애 아니야.”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을 무척이나 따르며 착하기만 했던 세민이도 어른이었다. 덩치도 커지
고 생각도 깊었으며 정이 많은 남자로 성장했지만
그녀는 생활을 책임진 그 순간부터 별이와 세민에게는 누나 이상이었다. 어머니이자 아버지
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힘든 내색도
슬픔도 그들 앞에서 항상 밝은 척을 해야 했다.
“넌 내 자식이야. 난 너하고 별이의 부모야.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너희한테 떠 넘길 생각은
없어. 그리고 그 남자...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야. 그냥 정을 그리워하는 그런 사람이야. 이젠 니가 별이의 부모가 되어야 해.
알았지?”
끝끝내 세민이 눈물을 흘렸다. 보희는 그 옆에 가 그를 끌어 안았다. 세민이 그녀를 감싸 안
으며 사람들이 쳐다보든지 말든지 울고
있었다. 그녀는 괜찮다는 말만 되뇌였다.
태석은 사무실 창문 턱에 앉아 있었다. 몇 일전 그는 클럽의 아가씨와 내기를 해서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다.
그 날 그는 그녀가 혈흔을 보이자 놀랐다. 그녀는 그와의 관계 때 눈물을 흘렸고 그 때문에
의심이 들었었다. 순수한 여자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었다.
“당신 처녀였어?”
그는 등을 지고 누운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아니요.”
“그럼 왜 우는 거지?”
“돈 때문에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몸을 줬는데 누가 좋겠어요? 안 그런가요?”
“그럼 이 피는 뭐지?”
“그건... 오늘이 예정일이라서 그래요.”
그녀는 침대 아래 떨어져 있는 가운을 집어 들어 입고는 욕실로 가 버렸었다.
그는 한 순간이지만 그녀가 순수하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관계를 더 요구하지 않았다. 보통의 여자들은 그런 상황일 경우 관계
갖기를 싫어했고 그 자신도 내키지는 않았다.
그녀가 샤워 후에 거실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 것을 안아 들고 침대에 눕혀 가만히 안고 그
도 잠이 들었었다.
그는 그녀에게 일주일의 시간을 주었다. 그녀가 요구한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고 도망은 갈 생각이 없으니
걱정말라고 했다. 도망을 간다 해도 그녀를 찾아내는 것은 그에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
기 때문에 그녀를 다음날 아침 보내 주었다.
태석은 문밖에 있는 보희에게 좀 미안했다. 그녀의 이름으로 클럽 여자에게 이름을 붙여 부
르고 있었다. 보희를 보면 그 날 밤의
성관계를 맺던 것이 생각이 나서 그는 욕구불만이 생기려고 했다.
전화기를 들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조심스럽지만 고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김태석이야.”
“네...”
침묵이 흐른다.
“그 날은 잘 들었갔나 해서 전화했어.”
“잘 들어 갔어요.”
“약속날짜는 잊지 않았지?”
“물론이에요. 그것 때문에 전화하신 것 같은데 걱정말아요. 더 용건이 있나요?”
“없어. 그럼 그 날 보지. 내가 준 키는 가지고 있지?”
그는 몇마디 더 한 후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녀가 자꾸 신경 쓰였고 그의 비서도 신경이
쓰였다.
“보희씨, 아까 준비하라는 서류 좀 갖다 주시오.”
인터폰으로 들리는 태석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보희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보희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태석의 전화를 받고 긴장을 풀고 있는데 인터폰 벨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 사이에 그녀의 얼굴이 헬쓱해져 있었다. 자신의 실체를 모르는 태석을 보면서 항상 긴
장해야 했고 그의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석이 준비하라고 시킨 서류를 정리해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서류를 검토한 후에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 생각에는 이 서류에 뭐가 문제인 것 같소?”
“네?”
그를 쳐다 보다가 묻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네. 이 부분은 현재 다른 업체에서 기획 중인 걸로 아는데요. 경쟁성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먼저 출시 될 것 같지도
않고요. 좀더 보완해서 다른 기술을 접목 시키는게 좋겠습니다.”
“다른 업체에서 기획 중인 걸 어떻게 알고 있소?”
그녀가 최근에 클럽에서 일할 때 이 회사 관계자들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제 친구 중 한 명이 이 회사 기술 팀에서 일하고 있어서 약간의 정보를 들었습니다.
이쪽 모바일 사업은 빨리 변화하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으려면 좀더 획기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겠군. 기술 팀장과 아이디어산업부 팀장을 호출해 주시오. 근데 요즘 건강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괜찮소?”
“네. 괜찮습니다.”
그의 손, 입술 어디 한군데를 보아도 얼굴이 화끈거려 괜찮지는 않았다. 그 날밤 그의 행위
자체가 떠오른다. 목소리 하나에도.
“오늘 저녁 함께 하겠소?”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요.”
“매번 거절하는군. 오늘은 함께 식사합시다. 내 생일이거든. 혼자 보내기가 그런데 같이 해
주겠소?”
생일이라는데 거절하기가 난감했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사표를 내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이 불안해서 도저히 그와 있는 것이 불편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서 그가 사무실에서 나왔다.
“오늘은 일찍 퇴근합시다. 식당은 내가 예약했소.”
그가 정장을 말끔히 갖춰 입고 그녀의 숄을 사물함에서 대신 꺼내 주었다. 그 숄을 받아 들
어 걸치려는데 사무실 문이 열렸다.
“오빠?”
황회장의 막내딸 민지였다.
그녀는 태석을 보자마다 그의 품에 달려들었다. 짧은 미니스커트의 하얀 정장을 입고 커트
머리의 깔끔한 모습이었다. 온 몸을 명품들로
감싸고 있었다.
“오빠, 생일 축하해. 오빠가 전화도 통 안해서 내가 그냥 왔어. 괜찮지?”
그가 보희를 신경 쓰며 민지의 팔을 자신의 몸에서 풀었다. 민지는 약간 표정이 굳었지만
애써 웃어 보였다.
“저녁 먹으러 가자.”
“어떡하지, 약속이 있는데.”
태석이 보희를 쳐다보았다.
“누구랑?”
“여기 내 비서하고 저녁 식사 하기로 했거든.”
“그래?”
그녀는 보희를 째려보았다.
“아버지 비서 아니었나?”
“내가 부임하면서 옮겼다.”
“모르는 사이들도 아닌데 같이 해도 되죠?”
말투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 그냥 빠지겠어요. 두분이서 식사하세요.”
보희는 민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전에는 보희에게 언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친근하게
대해서 귀엽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태석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그녀에게 적대감을 표하는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보희는 사무실을 먼저 빠져 나왔고 그녀를 잡으려는 태석을 민지가 잡아
끌었다.
태석은 화가 나서 나가는 보희를 보다가 민지에게 인상을 썼다.
“오빠, 내가 생일 축하해 줄게. 나아가자? 응?”
태석은 못이기는 척 그냥 사무실을 먼저 나가서 생일을 민지와 둘이 보내야 했다.
태석과 동거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었다. 그는 밤마다 그녀를 취했고 점점 그에게 빠져 들어
갔다. 그가 만지는 손길에 주체할 수 없이
흥분되었지만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그에게 등을 돌려 잠이 들었고 그는 그녀를 안고 잠이
들었다.
새벽까지 그는 그녀에게 관계를 요구하고 몇 시간 잠을 자고 그는 회사를 출근하면서 늦게
까지 일을 했지만 체력이 강한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에 반해서 보희는 그가 나가자 마자 화장을 하고 그와 차로 15분 거리인 그녀의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 입고 출근을 해야 했다.
클럽에서 일할때보다 더 몸이 피곤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세민은 걱정만 늘어놓았고 별이
는 울며 떼를 쓰기 일쑤였다.
그가 오늘도 늦게 들어 올 것 같아서 퇴근후 집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별이와 놀아 주고 그
가 평소 들어오는 시간보다 한시간 빨리
태석의 집으로 갔다. 별이가 울며불며 그녀를 놓아주지 않아서 늦게까지 집에 있었던 것이
었다. 그녀의 차를 그가 보았기 때문에 보희는
그가 볼 수 없는 근처에 차를 주차시켰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태석의 집 문 앞에 도착했다. 카드를 꽂고 비밀 번호를 누른 후 열쇠를
꽂는데 문이 열려 그녀를 놀라게 했다.
태석이 먼저 와 있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지?”
그녀는 그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 숄을 벗었다. 아직 4월이라 그런지 밤공기 찼다.
“신경 쓰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지만 내가 오기 전에는 들어 와 있어. 알았어? 처음과 태도가 상당히
틀려. 분명히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했잖아?”
그가 화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태석은 아직 의심하고 있
었다.
“미안해요. 앞으로는 그렇게 하도록 하죠.”
욕실로 들어간 보희는 옷을 벗고 욕조에 물을 틀었다. 욕조에 거품을 풀고 온도를 맞추려는
데 그가 들어 왔다.
얼른 욕조 안으로 들어가 몸을 가리며 그를 노려 보았다.
“뭐하는 거죠?”
대답 없이 옷을 벗기 시작하는 그를 보고 그만 나가라고 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도 않았다.
욕조 반대편으로 그가 들어 왔다. 마주 보고 있자니 민망하고 떨렸다.
그가 거품 아래에서 발로 그녀의 발을 건드렸다. 그녀가 자신의 발을 최대한 오므렸다.
“나가세요. 씻고 싶으니까.”
고개를 돌렸다가 그만 그녀의 몸이 욕조 물로 빠졌다. 그가 그녀의 발을 획 잡아 당겨서였
다. 그녀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꺅, 무슨 짓이예요.”
물을 마셔 켁켁 거리는 그녀를 잡아 끌어 자신의 몸에 밀착시킨 후 키스를 했다. 몇 번의
반항이 잠재워 졌고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그의 탄탄한 가슴을 더듬으며 더 적극적으로 그녀의 태도가 변해 갔다. 그의 몸이 그녀의
반응만큼 빠르게 단단해졌다.
욕조로 그녀의 등을 기댄 후 정성껏 그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그녀의 귓속으로
들어가서 그녀의 애간장을 녹였고 그의 손은
그녀의 단단해진 가슴을 지나 배를 타고 은밀한 부분을 매만졌다. 그의 손가락이 뜨겁게 달
궈지는 내부속으로 들어 갔다 나오기를 반복했고
자꾸 미끄러지는 몸을 지탱하려고 그녀의 손이 욕조 가장자리를 움켜 쥐었다.
“헉...헉.. 그만해요. 그만..”
그녀의 힘없이 헐떡거리는 말에 그가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았다. 나머지 그의 손은
욕조를 붙잡고 그녀가 물 속으로 빠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고 있었다. 그의 몸짓과 그녀의 몸짓으로 욕조안의 물들이 일렁여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자신들의 몸과 얼굴 위로 물이 덮쳐
왔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둘의 심음소리와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욕조 안에서 울려 퍼졌
다. 그의 아래에서 미끄러지는 몸을 지탱하고
그의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잠시 속도를 가다 듬으며 그가 그녀를 자신의 몸 위로 자세를
바꿨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그의 몸을 탄
자세로 그를 쳐 다 보았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목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길에 그녀가 다시
움직였다. 말을 타듯이 그를 몰아 갔다.
그가 입에서 또 그녀의 입에서 숨 막힐 듯 간헐적인 헐떡임이 들렸다. 정신이 멍해지 듯 쓰
러지는 보희를 그가 안아 주었다.
한참의 행위 끝에 찾아온 만족감에 서로를 끌어안으며 호흡을 가다 듬었다. 평온함을 찾아
가는 그의 심장소리가 아직도 그녀한테 전해져
왔다.
그의 손이 그녀 머리카락에 묻은 거품을 떼어 내 주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그가 욕조의 물을 빼고 그녀를 안은 자세로 앉아 샤워기에 물을 틀어 그
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겨 주었다. 피곤이
쌓여서인지 보희는 자신을 씻겨 주는 그의 손길에 아랑곳없이 조금씩 잠이 들었다. 잠에 취
해 그가 안아 올려 몸을 닦아주는 내내 그한테
기대 잠이 들어 있었다.
침대에 눕히는 순간에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태석은 한참 동안이나 잠든 그녀를 등뒤
로 하고 다른 방으로 가서 일을 했다.
태석이 기획한 프로젝트가 비밀리에 성사되었다. 그가 부임한 지 한달이 조금 넘었을 뿐인
데 주식도 상장되었고 그가 맡은 분야의 일들이
종전의 매출보다 더 빠르게 나아지고 있었다. 회사 내에서도 그의 인지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으며 황회장의 비리 몇 가지를 확실한
물증을 잡아 확보하고 있었다.
수호는 간간이 그의 사무실로 찾아 왔고 보희는 황회장의 전화에 일체 태석의 일에 대해서
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황회장은 그녀에게
전화하는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가 태석의 편이 되었음을 알았는지 그녀도 믿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와의 동거 생활도 그럭저럭 잘 되어 갔다. 한번은 그녀가 사표를 제출하려 했지만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고 오히려 그녀의 월급 문제
개선까지 해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계속 사무실을 나와야 했다. 아직도 계약 기
간이 11달이나 남았었다.
태석이 가끔 악몽을 꿀 때면 보희는 자다가 그를 안아 달래 주는 경우도 몇 번 있었고 그는
가끔 꽃이나 선물 등을 사와 그녀에게 주곤
하였다.
비서로서의 보희에게는 더없이 깍듯한 상관이었지만 그는 그녀가 보고 있지 않은 사이에 그
녀를 한 없이 바라 보고 있어 그녀를 불편하게
하였다. 그가 두 여자를 가슴에 담고 있다는 것이 내심 불안의 한 요인이었다.
그녀 마음 한 켠에 그에 대한 집착이 조금 생기는 것 같았다. 술을 먹고 늦게 들어와 여자
향수가 날 때마다 그리고 민지가 그에게
찾아와 온갖 애교를 떨며 붙어 있을 때는 알 수 없는 감정에 기분이 상하곤 하였다.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그는 회사에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하다 온다고 집으로 전화했다가 그
녀도 같이 회사에 있는 것을 모르는 그가 그녀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어디지?”
“왜요?”
그의 사무실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 갈까 봐 조용히 말을 했다.
“집 전화를 받은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아서.”
“친구 만나러 나왔어요. 무슨 일이죠?”
“저녁에 일찍 들어 갈 거니까 그전에는 들어와 있어.”
“네.”
그녀가 별 대꾸가 없자 그가 전화를 끊었다.
보희는 사무실에 앉아 문을 노려 보았다. 무뚝뚝하기는.
1시에 그녀는 퇴근을 했다. 그는 뚱한 표정을 하고 있어 좀 놀랐다. 그녀가 집에 없다는 사
실에 기분이 상한 모야이었고 보희는 그의
표정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
태석의 집에는 일주일에 두 세번씩 도우미 아줌마가 와서 청소만 해 줄뿐이었다. 냉장고에
는 생수랑 빵, 과일 몇 가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집에서 밥은 해 먹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는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그가 일이 늦게 끝나 밖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오는 것을 알았고 그녀도 애써 음식을 하지
않았었다.
보희는 오랜만에 장을 보러 대형 마트에 갔다.
이것저것 사서 집에 돌아오니 짐이 엄청 많았다. 그냥 그한테 따뜻한 밥이란 걸 해주고 싶
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참을 부산하게 만들다 보니 어느덧 6시였다. 식탁 위에 음식들을 가지런히 차려 놓고 그
를 기다렸다. 한시간 후에 태석이 집에 돌아
왔다.
앞치마를 입은 그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의 시선에 그녀의 녹색눈이 살짝 흔들
렸다.
“뭘 했어?”
“저녁 차렸어요. 오랜만에. 씻고 와요.”
“오늘은 나가서 일찍 들어 왔네. 말도 잘 듣는 군. 요리를 다하고.”
그가 주방에 차려진 식탁을 보고 한 말이었다.
“먹기 싫으면 말아요. 괜히 트집 잡지 말고.”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정장 윗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대강 소파에 던져 놓고 팔을 걷어
올렸다.
그가 앉아 이 음식 저 음식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괜히 그녀의 마음이 흡족했다가 그가
보자 얼른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었다.
“요리 솜씨가 좋군. 안 그렇게 생겼는데.”
그가 웃자 보조개가 살짝 들어 났다. 집에서는 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사람은 인상으로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예요.”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식사를 했다.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 벨이 울렸다. 그녀의 휴대폰 벨소리였다. 그녀가 받지
않고 계속 식사만 하자 그가 받아 보라고
말을 했다.
방안으로 들어가 울리는 전화를 들어 보자 세민의 번호가 떴다.
“어, 세민아. 무슨 일 있어?”
조심스럽게 방문 쪽을 보며 물었다.
“아니야. 잘 지내나 해서. 매번 나 잘 때 잠깐 왔다 가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몸은 아프지
않지. 그 인간이 못 되게 굴지는
않고?”
“그럼.”
태석은 음식을 씹다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전화가 길어지는 보희가 좀 수상했다. 말
소리가 밖으로 세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의자를 밀고 일어나 방문 앞으로 가서 치사하지만 문에 귀를 기울였다.
“알았어. 내일 12시까지 갈게. 그래. 응. 알았어, 내일 봐. 세민아.”
태석은 그녀가 전화를 끊는 소리를 듣고는 얼른 식탁 앞에 가서 앉았다. 세민이란 소리에
좋았던 기분이 말끔히 날아가는 중이었다.
보희가 앉아서 다시 식사를 하려는데 태석이 그녀를 무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젓
가락을 내려놓았다.
“누구 전화지?”
“친..친구요.”
“보희야. 거짓말 하지 말고. 누구 전화야?”
“신경 쓰지 말아요. 밥이나 먹어요.”
그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분명히 말했어. 딴 남자랑 있다가 걸리면 그땐 알아서 해.”
“어떡할 건데요?”
그녀가 지지 않고 그에게 대들었다. 그의 손을 뿌리치며 얼얼해진 손목을 만졌다.
그는 식욕이 없어져서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보희를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평소 행동과 다르게 그가 그녀의 몸을 거세게 다뤘다.
보희는 그의 행동에 겁이 나서 소리를 지르며 그를 밀쳐 버렸지만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
고 침대로 던지듯이 밀어 버리고는 옷이
찢어지든 말든 무작정 벗기기 시작했다.
“이거 놔. 나쁜 자식.”
그녀의 손이 그를 뿌리치며 뺨을 때렸고 그는 그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연약한 그녀의 입술
에 피가 날 정도로 키스를 퍼붓고 준비가
되지도 않은 그녀에게 자신의 일부를 집어 넣었다.
그는 울며 그에게 그만 두라고 애걸하는 그녀를 무시한 채 기계적인 동작으로 거칠게 그녀
를 몰아 붙였다. 이렇게까지 짐승같이 덤비는
그는 처음이라 무섭고 화가 났다. 창녀를 대해도 이렇게 까지는 않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어떤 만족감도 서로가 얻지 못했고 그가 빠져나간 자리가 얼얼하고 아팠다. 눈물이 시야를
가려 초점이 맞춰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무너져
버린 그를 밀치며 등을 돌려 누웠다. 서럽게 우는 그녀의 어깨에 그의 손이 닿았지만 그녀
는 몸서리치며 그를 떨구어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나가 버렸다.
보희는 울다 지쳐 잠이 들 때 그가 어렴풋이 그녀를 안고 미안하다고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태석은 다음날 보희를 미행했다. 그녀는 항상 낮에 집을 비운다. 태석은 그 문제에 대해서
묻지는 않았지만 수상했다. 어제 계좌번호
이름의 남자와 통화 내용이 오늘 만난다는 것밖에는 몰랐다. 그녀한테 집착 증세를 보이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고 비서인 최보희에게도
욕구를 느끼는 자신이 못 마땅했지만 보희가 무슨 이유로 그를 만나고 그가 어떻게 생겼는
지 알고 싶었다.
집 근처에서 주차된 차를 탔다. 본 듯 한 차였지만 워낙 차종이 많지 않은 나라라 크게 신
경 쓰지는 않았다. 그 뒤를 자신의 차를
타고 미행했다.
한 페밀리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후 잠시 후에 들어갔다. 가족적인 분위기였고
점심때라 그런지 여러 사람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신을 맞이하는 종업원을 무시하고 등지고 앉아 있는 보희의 테이블 근
처에 등지고 앉아서 신문으로 얼굴을 가렸다.
20분 뒤 그가 앉은 자리를 지나 그보다 약간 작은 체격의 잘생긴 한 남자가 6살이나 7살정
도 된 여자아이와 들어왔다. 조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고 아이가 있어서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혹 세민이란 이름이 여자 일 수도
있는 일이였다.
그때 꼬마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엄마.”
달음질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보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별이 왔구나. 오늘 정말 예쁘다.”
태석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슬며시 돌아보았고 분명 보희가 그 꼬마 아이를 안아 들어 자
신의 무릎 위에 앉히는 장면을 보았다. 그는
물을 한잔 마셨다.
“엄마, 엄마. 아빠가 생일 선물로 뭘 줬는지 알아?”
“뭘까? 궁금한 걸.”
“강아지 사줬어. 얼마나 귀여운데. 데리고 나오려고 했는데 너무 어려서 안된데.”
“아빠 말이 맞아. 너무 돌아 다니면 강아지한테 안 좋아.”
아이와 함께 들어온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점잖으면서 약간은 가는 목소리였다.
“거봐. 엄마도 아빠 말이 맞다잖아. 왜 아빠 말은 안 들으려고 하는 거야? 사람 차별하는
거지, 별이는?”
“아니야. 엄마한테 빨리 보여 주고 싶어서 그랬어.”
태석은 아직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보희가 아이 엄마였다는 사실과 버젓이 남편
까지 있는 몸이었는데 돈 때문에 자신의 여자가
되어 생활하고 있었다. 이로써 그녀가 그때 정말 처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확실해 지면서
혼란스러웠다.
“입술이 왜그래? 상처같은데...그 자식이 때렸어?”
“아니야.. 애 앞에서 무슨 말이니?”
“엄마 누가 때렸어?”
아이가 걱정스런 눈으로 물었다.
“아니야. 때리긴 엄마가 잘못해서 다친거야. 우리 맛있는 거 먹자. 좋지?”
“응.”
“내가 못나서 그래. 미안해 누나.”
“그런 생각하지마. 내가 자청한 거야. 누구 잘못도 아니고 그 사람 때문에 니가 이렇게 밖
에 있는 거잖아. 조금만 참자.”
태석은 그 자리를 나왔다. 인사를 하는 종업원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후 태석은 그녀를 만지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보희는 그가 왜 그런지 몰라 그가 신경질
을 부리면 부리는 대로 당황해 했다.
태석은 사무실에서도 보희에게 상냥하게 대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자꾸 생각이 겹쳐지면서 괴롭혔다. 사무실에서
무섭게 일 만하고 딱딱해진 태석을 보희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지켜 볼 뿐이었다.
“회장실입니다. 황태석 이사님께 올라 오시라고 회장님께서 전하시랍니다.”
보희는 그 전화를 받고 태석에게 인터폰을 했다.
태석은 알았다는 대답만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회장실에 다녀온 뒤에 보희를
불렀다.
“내일하고 모레 일본 출장 준비하시오. 일본어 실력이 괜찮다고 하던데. 박부장말이.”
태석은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이틀간 같이 출장 좀 가야겠소. 일본 협력 업체하고 미팅을 가야 하니까. 준비하시오.”
“네.”
사무실을 나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태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핸드폰으로 태석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를 않았다.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태석에게 인터폰을 했다.
“이사님, 보희라는 분이 전화하셨습니다.”
“누구라고?”
언성이 높아졌다.
“보희씨라는 데요...그게...”
“바꾸시오.”
보희는 전화를 연결하고 그와 통화를 시작했다.
“사무실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그가 불쾌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건..저..아, 당신 명함보고 알았어요.”
“핸드폰으로 하지 왜 사무실로 전화해?”
“당신이 받지를 않아서.”
“못 봤어. 무슨 일이지?”
“흠...요즘 왜 나한테 그러는지 알고 싶어서요.”
그가 말이 없다.
“요즘 왜 그렇게 날 못 잡아 먹어 안달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서요.”
“내가 어떻게 했나? 관계를 안 가지니까 오히려 당신한테 좋은 거 아닌가?”
“무슨 말이 그래요? 이유를 말해 줘요.”
“왜냐고? 스스로 알아 보시지. 더 잘 알텐데.”
그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무슨 일로 저렇게 저기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녀때문인
데 말을 안 하니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자신의 정체를 알아 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한번 떠보는 건 어떨까?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 갔다.
노크 소리에도 그가 대답이 없어 그냥 들어가자 그가 놀란 듯 의자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무슨 일이오?”
“저...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지...”
“그게 무슨 말이오?”
“요즘 계속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아서요.”
그의 앞에 서서 손을 모은 체 쭈뼛거리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두여자가 한 날 한 시에 무
슨 일인지 물어 오고 있었다.
“당신때문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그렇게까지 내가 험악했다면 미안하오. 주의하
지.”
그녀는 그의 대답에 속으로 안심을 하고 나왔다. 그렇다면 도대체 뭣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 날 식사 때부터 그런 것이라면 그녀의 남자 관계에 대해 의심하는 게 심해졌다는 소리밖
에는 되지가 않았다. 과연 그의 화를 돋운
것이 무엇일까. 그렇게까지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뭔지도 종잡을 수 없었다.
보희는 태석이 그래도 출장간다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전혀 그런 말을 안 했고 짐 싸
는 것을 도와준다는 그녀의 호의에 대꾸도
안하고 그가 직접 짐을 꾸렸다.
그가 먼저 공항으로 가는 사이 그녀도 집으로 가서 출장갈 짐을 들고 공항으로 향했다. 처
음 그를 만났던 곳이 인천 국제 공항이었던 걸
생각하니 새삼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석은 그녀보다 먼저 공항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짐을 맡긴 후 텝을 받아 지갑에 챙겨 두었다.
“아침은 했소?”
“아니요.”
“그럼 간단하게 뭐라도 먹읍시다.”
그가 공항내 식당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간단한 모닝 세트를 시켜서 식사를 하며 비행기 시
간을 기다렸다.
“회사에서 가는 해외 출장은 가 본 적 있소?”
“네, 일본 출장 정도만 다녔습니다. 지금이 세 번째네요.”
“그렇군. 난 일본어는 잘 몰라서. 간단한 인사 정도만 할 수 있소.”
그가 신문에서 시선을 돌렸다.
“전 간단한 생활 회화랑 비즈니스 회화를 좀 할 뿐이고 많이는 못하는데...”
“안경에 뭔가 묻은 것 같은데.”
그녀의 오른쪽 렌즈를 쳐다보며 그가 알려 주었다.
보희는 무의식중에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는 안경 케이스를 찾아 렌즈를 닦는데 그의 시선
이 느껴졌다.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얼굴!
“안경을 안 쓰니까 훨씬 낫군. 그런데...내가 아는 여자랑 많이 닮았군. 친구가 한 소리는
그냥 무시했었는데... 머리 스타일이랑
안경쓴 것 빼면 아주 비슷하군.”
“그..그래요? 누구랑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요즘은 특히 더 그런걸요. 저번에는 아
니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믿지를
않더라고요.”
“그건 그렇고 눈이 아주 까맣군. 내가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거든요.”
보희는 얼른 안경을 쓰고 얼굴을 내리고 커피를 마시는 척 했다. 누굴 닮았다는 소리는 솔
직히 들어 본적이 없었다.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다는 생각에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이었다.
퍼스트 클래스에 자리를 한 두 사람은 각자의 일을 했다. 보희는 그가 시킨 자료들을 정리
하고 그는 그 자료들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피면서 가까운 나라인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 가지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 짧은 시간
을 보냈다.
일본의 제휴 업체에서 그들을 마중 나왔다. 특유의 깍듯한 예의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그녀는 오로지 태석의 일을 도와 주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업체 쪽에서 따로 통역관을 붙여
주어서 미팅 때 별 무리가 없었다.
IT산업이 가장 비전있는 분야였기 때문에 회사측에서 각별히 투자를 점점 많이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일본 합작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 일이 태석이 맡게 된 것이었다.
태석으로서는 이렇게 큰 건을 그에게 서슴없이 내어 준 게 미심쩍었지만 일단 맡은 일은 최
선을 다 할 생각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일본 측의 사업장을 둘러 보았다. 깨끗한 환경이었고 게을리 일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들의 사업에 대한 설명을 듣는 내내
한국인과 비슷한 열정으로 회사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의 식사 대접을 정중히 거절하면서 태석과 보희는 숙소로 돌아갔다. 공항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일본 관계자들을 만나느라 아침
외에는 먹지를 못한 상태였다.
태석은 보희에게 씻고 전화를 하라고 했다.
짐을 정리한 후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그리고 다시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5월의
일본 바람은 습했기 때문에 좀 답답했다.
단정한 검은 원피스에 아이보리색의 얇은 가디건을 걸쳤다.
풍성한 웨이브 머리가 그녀 상체 주위를 휘감고 있어서 우아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지만 검
은 안경테가 딱딱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그의 방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의 방문을 두들겼다.
“밤이라 그런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군요.”
괜스레 그의 말에 얼굴에 홍조가 띄었다.
“고마워요.”
그가 그녀의 키를 받아 방문을 대신 잠궈 주었다.
“이 호텔의 스카이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합시다.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해서 상당히 배가
고프니까. 괜찮소?”
“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의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깔끔한 턱시도를 멘 지배인쯤 되는 중년의 남자가 그들을 맞이했다. 보희는 짧은 실력으로
나마 자리를 부탁했다.
레스토랑은 전망이 좋아서 인지 홀이 가득 차 있었지만 운이 좋게도 창 측으로 자리가 나서
시내가 한눈에 들어 왔다. 깜깜한 밤이라서
야경이 정말 훌륭했다.
“다행이예요. 자리가 있어서.”
태석이 그녀의 의자를 빼 주고 자리에 앉았다.
각자의 메뉴를 보고 식사를 주문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밤의 야경은 다를 바가 없군. 그렇지 않소?”
“그렇죠. 외국이라고 밤 색깔이 틀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불빛들이 특이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좋은 걸요.”
밖의 야경에 흠뻑 취해 있는 보희를 보며 그가 오랜만에 웃는 모습을 모였다.
“미안하오. 순수한 게 갑자기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소.”
식사 중간에 그가 와인을 시켰다. 서로 한잔씩 하면서 분위기가 점점 좋아졌다.
보희는 약간 호기심이 일었다.
“저랑... 이름이 같은 여자 분이 계시던데..”
와인을 마시던 그가 사례가 걸렸는지 잔기침을 하면서 냅킨으로 입을 가렸다.
“괜찮으세요?”
걱정스레 묻는 그녀를 그가 조금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냥 좀... 아는 사람이오.”
“저랑 목소리가 좀 비슷한 것 같던데요.”
모르는 여자를 말하 듯이 그녀가 자꾸 물어 보자 태석이 곤혹스러워 했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군. 신경 쓰지 마시오. 참, 어머니는 괜찮으시오?”
그가 화제를 돌릴 심산으로 그녀의 가족을 끌어 들였다.
“네. 요즘은 잘 못 가지만 간병인 말로는 괜찮으시다고 하더군요.”
다시 분위기가 꺽이고 있다.
둘은 식사를 마친 후에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자는 그녀의 말에 별 말없이 자신의 객실로 들
어갔다.
잠자기에는 이른 시간이었고 TV를 틀었지만 순 일본말이라서 주의해서 듣는 게 머리가 아
파 얼마 보다가 그냥 꺼 버렸다.
답답하기도 하고 해서 맥주를 한 캔 따가지고 테라스로 나갔다. 난간에 기대서서 야경을 바
라보고 있는데 옆 테라스에서 태석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잠이 안 오는 모양이군. 이리 건너와요. 혼자 처량하게 마시는 것보다 둘이 마시면 더 나
을 것 같은데.”
“아니요. 그냥 혼자...”
그가 일어나서 그녀에게 들어오라는 말을 하고 문을 열려고 안으로 들어갔다.
보희는 그의 방으로 건너갔다. 밖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가 룸서비스로 시킨 술을 마셨다.
술을 잘 못하는 그녀였고 그는 이미 술을 어느 정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보희는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았지만 모른 척 해야 했다. 그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
어서 그리 할 만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는데
있었다. 결국은 일 이야기가 주였다. 그에게서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느라 취한 줄도 모르고 많이 마신 탓인지 자신의 방으로 돌아
가려고 일어서는데 눈앞이 핑하고 돌았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태석이 일어서다가 붙잡아 주었다.
“고마워요. 왜 이렇게 어지러운 건지 모르겠네요.”
이미 술 때문에 혀가 풀렸다. 태석의 입에서 나는 술냄새인지 자신의 입에서 나는 술 냄새
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가까이 있는 보희의 입술에 태석은 머리가 아찔했다. 술기운에 그녀가 집에 혼자 아님 그가
없는 틈을 타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 지도
모를 보희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아늑한 그녀의 품이 그리웠다. 아님 눈앞에 있는 여인 때문
에 흥분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고 자연스럽게 보희의 팔이 감겨 왔다.
“태석씨...태석씨..”
그녀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달콤하게 들려 왔다.
태석은 그녀의 입술을 핥으며 보희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
락을 감으며 그녀를 탐하고 있으면서도 집에 있을
보희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으며 눈앞의 그녀가 보희일 정도로 자신이 착각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이 행동을 멈춰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이성만큼 그의 몸은 그렇지가 않았다.
태석은 그녀의 옷을 하나 둘씩 벗겨 나갔고 보희는 그의 손아래서 아무런 저항없이 오히려
그의 셔츠 단추를 풀렀다. 그녀의 가는
목줄기로 그의 입술 자국이 남았다.
그녀의 옷과 자신의 옷이 다 벗겨 질 때까지 그들은 침대까지 가지 못했다. 보희는 대담하
게 그의 몸을 탐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화난지 몰랐던 그 앞에서 항상 초조했고 그의 손길이 어느덧 그리웠던 그녀였다. 그의 온
몸을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애무해
주었다.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에 그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태석은 보희가 그의 행동에 정열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놀라면서도 그런 그녀에게서 상황을
자신한테로 바꾸기 위해 그녀를 자신의 몸 아래에
가둬 두었다.
그녀의 입술을 살짝 벌리면서 그의 긴 혀를 밀었다 당겼다를 반복하여 그녀의 애간장을 녹
였고 그녀의 가슴으로 입술이 훑고 지나가자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그녀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행복했다.
그녀의 가슴에 자리한 두 언덕을 두 손 가득 잡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유두를 핥고 빨면
서 반복적인 애무를 했다. 그녀의 은밀한 숲
속으로 그의 입술이 옮겨 갔을 때 그녀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다. 그의 입술에 몸이 활
처럼 꺽여 나갔고 그에게 조급한 마음을 알리듯
숨이 끊어 질 것처럼 헐떨거리고 그를 자신의 몸 속으로 인도하려고 하였다. 참을 수 없는
외마디 비명이 그녀의 입술을 따라 그의 귀를
파고 들었다. 그를 향해 그녀의 입구가 반색을 하며 꿈틀거려 주었다.
그런 그녀의 몸이 부드럽게 풀려 있을 때 그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천천히 굴 안으로 진
입을 시도해 보았다. 너무나 따뜻하고 촉촉함이
그를 조여 오고 있었다.
“오, 맙소사. 보희야...”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서로 놀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지금 그 순간 보희는 그녀를 안고 있는
그가 지금 상관으로서가 아닌 남자로 안고 있다는 것인데 저도 모르게 그를 상관 인식을 못
하고 그의 손길에서 그냥 무너져 버려 놀랐지만
태석은 그녀를 집에 있는 보희라고 인식하고 그녀를 안았다는 것이었다. 태석은 멈춰야 했
다. 아까 생각났을 때 진작 멈췄더라면 지금
그녀에게 미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몸은 그녀를 계속 이끌고 있었고 서로의 눈빛에서 잘못
되었다는 것을 보았지만 딱히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서로 알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보희는 그가 부하 직원이 아닌 동거녀로 알고 취한다는 것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헷갈
렸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그가
움직이는 동작에 따라 몸이 움직임을 느꼈다. 그의 품이 이렇게 좋은 줄을 이제 더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태석의 부드러운 이끌림과 마지막 힘에 절정을 느꼈다. 태석도 만족스러운 모양이었지만 곧
바로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죄책감이
들어서 인지 그는 지금 충만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 보희에게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
다.
담배를 입에 물고 한 모금 빨아 들였다가 연기를 내뿜었다. 보희는 여전히 바닥에 누워 있
었다. 무척 힘이 든 모양이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내려는데 그녀가 일어나서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해주시겠어요?”
그녀의 말에 그가 담배를 떨어뜨렸다.
“지금...뭐라고...?”
“오늘 일은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그냥 서로가 즐겁기는 했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미안하오. 당신을 다른 여자로 생각하고 안은 점 사과하겠소. 아깐 정말 심장이 따끔
거렸소. 당신한테 너무 미안했는데 사내
놈들이란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모양이오.”
“이해해요. 저도 잘 한 게 없는 걸요. 순간적으로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저 나름대로
착각한 부분이 있었어요.”
그녀가 옷을 모두 입고 어색한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그의 방을 빠져 나왔다.
보희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욕실로 갔다. 그와의 섹스 때문에 몸에서 땀이 났기 때문이었다.
렌즈를 뺀 그녀의 눈이 보희임을 확실히 밝혀 주고 있었다.
샤워를 하며 그녀는 그가 도대체 보희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와의 관계 때문에 동거하고 있는 보희를 생각해서 그가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보희는 그와의
오래간만의 섹스로 처음에는 기분이 너무 좋았었지만 그의 손길이 없었던 그동안 얼마나 그
를 그리워했는지 아는 순간 마음이 휑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를 점점 좋아하고 있는 게 불안하기도 했다. 보장되지 않는 만남에서
기대라는 것은 그녀를 더 힘들게 만들게
분명했다.
다음날 보희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했고 처음에 그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다가
그녀가 담담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는 이내 평소
하던 대로 상사와 부하 직원사이로 돌아가게 되었다.
중요한 정책 등을 일본 관계자와 처리한 후 그들은 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태석은 돌아온
그 날로 그녀와 다시 사랑을 나누었고 그의
손길은 훨씬 더 그녀를 애틋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그를 속이는 게 불편했고 지금 털어
놓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과 속임이 있었기
때문에 고백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 후로 태석은 비서인 보희에게 여자로서 느끼는 감정들을 드러 내지 않았고 살을 부대끼
며 사는 여자에게만 충실했다. 가끔 늦을 경우
보희에게 그 이유를 묻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조금이라도 늦을 것 같으면 전화로
알려 주기도 했다. 항상 꽃을 사 들고 들어
왔고 그녀에게 너무나 잘 해주었다. 그의 변화로 보희도 그에게 좀 더 많은 미소를 보내 주
었고 그가 처음 그녀를 반하게 했을 만한
미소도 자주 보여 주었다. 그런 그에게 아침을 해주고 그보다 일찍 들어올 때는 항상 따뜻
한 저녁밥을 지어 주기도 했으면 그녀가 먼저
그를 유혹하여 그의 육체를 탐하고 그가 경험한 것 중 최고의 섹스를 하였다. 둘 다 말로써
표현은 하지 않은 채 시간을 즐길
뿐이었다.
5월 31일이되었다. 회사가 창립된 지 35년을 맞은 해였다. 거의 맨손으로 건설업부터 일으켜
지금은 여러 부분에서 회사가 입지를
확실히 굽혀 나라안에서 손꼽히는 기업이 되어 있었다. 태석은 전날 보희에게 전화를 걸어
서 쇼핑을 하자고 하였다. 그는 백화점의 명품
코너를 돌며 그녀가 입을 드레스와 더운 날씨가 되어 갔지만 간단하게 두를 수 있는 모피
숄, 보석 등을 그녀에게 사주었다.
“내일 저녁에 창립 기념 파티가 있으니까 이 옷을 입어.”
따뜻한 말 한마디나 그녀에게 어울린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손수 괜찮다고 생각되는 물건들
을 사주고 한 말이였다.
유난히 빨간색의 이브닝 드레스는 피부가 하얀 그녀의 피부에 너무 잘 어울렸다. 노출이 좀
심해서 탈이었다. 등의 중간까지 깊게 파이고
가슴 부분이 강조되는 옷이었다. 얇은 끈 때문에 가는 어깨가 그대로 드러나는 옷이었다. 그
나마 검은 모피숄로 가릴 수가 있었다.
토요일 오후라 그가 일찍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녀가 목걸이를 차려고 하자 그가 그녀의 손에서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잘 어울리는 군.”
틀어 올린 그녀의 목 주변에 흘러 내린 가는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보며 그가 그녀에게 말
해 주었다.
“고마워요.”
거울 속의 그의 눈빛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가만히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의
체취를 깊이 들여 마셨다. 그녀의 맥박이
잠시 거칠게 뛰는 것을 느낀 그는 시간이 없다며 그만 나가자고 하였다. 마치 그녀 혼자 흥
분한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아마 파티에 가면 그녀를 알아 보는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지금 그 모습으로 기업 중역들
을 많이 보았었기 때문이었다.
한 유명한 호텔 리셉션 장에서 파티가 열린다고 그가 얘기해 주었다. 그녀가 좀 긴장한 것
을 보고 그가 주눅들지 말라는 말을 해주었다.
태석은 공식적인 행사가 시작된 후에 파티 장소로 들어갔다. 황회장이 축하 인사 등을 말하
고 내려온 참이었다.
여기저기 많은 명사들이 모여 있었다. 태석의 친구들이 그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오랜만이네요. 저..뭐라고 불러야 하지.”
“보희예요.”
수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붙인 이름이니까 이상한 상상마.”
“네가?”
태석은 그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더 이상 말을 못하게 저
지했다.
“오늘도 상당히 아름다우십니다. 특히 녹색 눈동자가 제 마음에 불을 지피는 것 같군요.”
태석의 친구들은 자신의 파트너 소개를 하며 그녀에게 다른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태석은 그의 친구들 뒤로 있는 황회장을 보고 있었다. 그는 아들인 황용민이 귓속말로 하는
말을 들으며 그와 보희를 언짢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입 모양을 봐서는 욕설을 내뱉는 것 같았다.
태석이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황회장을 향해 보희의 팔꿈치를 붙들고 다가갔다.
황회장은 헛기침만 할 뿐 먼저 말문을 열지는 않았다.
“창립일을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형님도 축하드립니다.”
“그래. 고맙구나. 우리 회사 이전에 네 회사이기도 한데 너도 축하를 받아야지.”
그를 올려다보는 황용민의 인사치레였다.
“가당치도 않죠. 엄연히 지금 회사의 회장님은 황회장님이신데요.”
“그 말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면 좋겠구나.”
황회장이 힘을 주어 말하였다.
“그리고 이 아가씨는 뭐냐?”
“보희라는 아가씨입니다. 저랑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런 정부년을 이런 곳에 들이다니 제정신이 아니구나. 용민이 말로는 클럽 아가씨라는데
집안에 무슨 망신이냔 말이다.”
“말씀이 좀 심하십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클럽 아가씨건 명문가 집안 아가씨건 그건 제
일입니다. 황회장님 댁에 누가 될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가 눈에 불을 키며 그에게 대들었다. 보희는 지금 상황에서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태
석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이성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넌 내 자식이야.”
“아니요. 전 처음부터 김석훈 회장님의 아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아들도 아니죠. 저희 아버
지의 죽음은 당신도 잘 알 거야.”
“그..그게 무슨 말이냐?”
“황회장 당신이 모른다면 누가 알겠습니까? 두고 보라고 확실히 보여 줄 테니까.”
그가 황회장의 귓가에 머리를 숙이며 조용히 속삭여 주고는 황회장이 심장을 붙잡으며 얼굴
이 벌개진 채 씩씩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 인사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후 보희는 태석의 옆에만 붙어있다가 그가 여기저기 인사를 하고 다니는 것이 심심하고
따분해서 테라스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곳에
있는 게 나았다. 몇몇 남자들이 그녀를 알아 보고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그녀에 대해 쑥덕
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쯤
있었을까 그녀 등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끓어 안는 사람이 있었다. 태석이라고 오해 할 수
있었지만 뚱뚱한 배가 그녀의 등을 누르고 힘찬
숨소리에 소리이 끼쳤다.
뾰족한 힐로 상대방의 발을 찍은 뒤에야 풀려 났다. 그 남자가 묻힌 침을 닦아 내며 욕을
한 바가지 해 버렸다.
“개자식, 무슨 짓이야?”
그 남자는 다름 아닌 변호사였다. 보희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시발점인 인간이었다.
“창녀같은 게. 전 그런 접대부가 아니예요.”
그녀가 했던 말을 흉내내며 그 변호사라는 작자가 다가왔다.
“이번에 건들면 내가 먼저 고소할 거야. 이건 정당 방위거든. 그때도 내 동생만 아니었으면
넌 내 손에 죽었어.”
보희는 테라스 문 쪽을 가린 그를 피해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있는 것이라고는 대리석의
차가운 느낌만이 등에 닿았다.
“웃기고 있네. 그 자식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내가 돈을 더 주지. 어때?”
그의 두꺼비같은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죽어도 너같이 비열한 돼지한테는 안 돼. 이거 놓지 못해.”
그녀가 온 힘을 실어 그의 정강이를 걷어 찼지만 살짝 빗나가서 그의 성질만 돋구고 말았
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때리려고 손이 올라왔고
보희는 눈을 감아 버렸다.
비명 소리에 눈을 뜨자 태석이 그의 손을 비틀고 있었다.
“그 작자가 누구냐고 물었나? 혜성그룹의 전 김석훈 회장의 아들은 알겠군. 그렇지? 돼지
같은 놈.”
그의 얼굴에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쓰러진 남자는 피가 나는 코를 붙잡고 부리나케 도
망가버렸다.
“고마워요.”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그가 떨어진 숄을 집어 그녀의 몸에 감싸주었다.
“여기 왜 나와서 몸자랑을 하지?”
매정한 한마디에 그를 노려 보았다.
“말이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좀 배워야 겠어요. 그리고 몸 자랑하라고 이 옷 사다
준 사람은 당신이예요. 답답해서 나왔다가 저
남자가 추근 거린 거라고요.”
그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 그녀를 다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태석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뭔가 말하고는 파티장을 나왔다.
“배고파요.”
“아까 안 먹었소?”
“난 그런 분위기에서는 밥 못 먹어요. 이방인 취급이나 받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거든요.”
“화났어?”
운전하며 그녀를 슬그머니 보았지만 보희는 바깥만 보고 있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누굴 창녀로 오해하진 말아 주세요. 상당히 거슬리니까.”
“알았소. 뭘 먹을까?”
그는 보스 클럽 근처의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식사를 한 후에는 클럽으로 향했다.
“여긴 왜요?”
“친구들하고 모임이 있소? 왜 전에 일하던 곳이라 그런가?”
“아니요.”
보희가 태석과 우아한 옷을 차려 입고 나타나자 기도들이 놀란 듯 바라보았지만 손님과 같
이 있는 그녀에게 다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서로 눈인사만 하며 지나쳤다.
VIP실로 향하는 길에 세민과 마주쳤다.
세민과 보희는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석은 기분이 상해 버렸다. 보희의 남
자를 이곳에서 봤다는 자체와 둘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가는 모습에서 화가 났다. 자신의 여자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남자에
게 특히 화가 났다. 그가 잘 지켰다면 지금
그가 질투 같은 감정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태석은 자리를 잡고 그녀를 옆에 바짝 붙어 끼고 앉아 있었다.
우연찮게도 세민이 담당 웨이터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보희는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 지
고 말았다. 태석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보희를
향해 물었다.
“왜 그러지?”
보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손님, 술은 어떤 걸로 올려 드릴까요?”
“평소 이방 손님들 먹던 걸로 가져와.”
그가 등을 돌려 나가려 할 때 태석이 그녀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보희는 그
의 가슴을 두들기며 거부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세민이 나가다가 슬그머니 돌아 보다 그녀와 태석이 키스하는 장면을 보았고
그녀와 눈이 마주 쳤다.
태석은 웨이터가 나가자 마자 입술을 떼어 냈다. 그녀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 거렸
다.
“사람있는 데서 뭐하는 짓이죠?”
떨리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부끄러운가? 남녀가 키스하는데 부끄러울 게 없지. 더구나 저 웨이터는 이런 장면도 많이
봐서 아무렇지 않을텐데 당신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태석이 다시 그녀에게 다가와 이번에는 부드러운 키스를 해주었다. 보희는 못 이기는 척 그
의 키스를 받아 들였다.
농도 짙은 키스를 하며 그와의 접촉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주위의 여건은 지금 두 사람에
게 문제가 될게 없어 보였다.
태석의 굵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가슴을 감싸고 마사지하듯 매만지며 흥분되어 가는 사이
문이 열리는 것도 모르고 일에 몰두하는데
방해꾼들이 들어와 태석이 인상을 찌푸렸고 보희는 세민을 보고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 자식, 그렇게 좋으냐? 이런데서는 그런 짓 하지도 않는 놈이 점점 변하는 구만.”
태석의 친구들이 몰려 들어와 한마디씩 핀잔 아닌 핀잔을 주며 웃고 있었다.
세민은 묵묵히 태석을 노려 보며 테이블 위에 술과 안주들을 올리며 자신의 일만 묵묵히 하
고 있었다. 태석은 그의 눈빛을 읽고도 오히려
그를 보며 웃는 것이 세민으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민이 방을 나와 보희를 찾으려고 화장실로 갔다.
문 앞에서 기다리니 여자 화장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아직도 얼굴에서 흥분의 기색이 가시
지 않는 보희가 얼굴을 나타냈다.
세민은 보희의 손목을 끌고 비어 있는 룸으로 데리고 들어가 자리에 앉혔다.
“누나, 미쳤어?”
보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 자식 일부러 그런 거라고.”
“설마...니가 오해한 걸 거야.”
“오해라고 쳐. 그런 장소에서 남자가 누나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 쉬운 여
자 대하듯이 그렇게 대하는걸 눈앞에서 보고
있는 내 심정을 알아? 그냥 도망쳐. 그 사람 누나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
“그렇지 않아. 요즘은 나한테 잘 해주고 있으니까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 남녀가
할 수 있는 키스야. 그냥 그렇게
생각해. 도망가도 그는 내가 어디 있는지 충분히 찾아 낼 수 있는 사람이야. 아예 그런 생각
은 안 하는 게 좋아.”
세민은 태석을 옹하는 보희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설마, 저런 자식한테 마음 준 건 아니겠지?”
대답이 없었다.
“누나, 정신차려. 저 자식이 돈이 많아도 돈으로 누날 산 인간이야. 결말이 뻔하잖아.”
“알아, 나도 안다구. 그러니까 그렇게 다그치지 않아도 안다고. 나도 내 맘을 모르는데 니
가 어떻게 아니? 어떻게 알아?”
보희가 그의 말에 화가 나서 대답하자 그도 놀란 눈치였다.
“어차피 계약으로 이루어진 거야. 난 돈이 목적이고 그는 내가 목적이었으니까 누구 하나
손해본 건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 돼. 내
일에 네가 나서 봐야 좋을 거 없어. 행여라도 그한테 쓸데없는 말하지. 내 존재에 대해 저
사람이 아는 건 하나도 없어. 그냥 조금만
참자. 저 사람한테 마음 줄 생각도 없으니까.”
보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세민은 그녀가 이미 태석에게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녀의
말이 진심으로 와 닿지 않았다.
“누나가 걱정되서 한 말이야. 미안해.”
“괜찮아.”
“요즘 불법 체류자 신고 기간이 생겼나 봐. 이 기간에 신고하면 일년 동안 정식으로 일할
수 있다는데 어떻게 하지?”
“츠량은 뭐라고 하니?”
“글쎄, 꺼려하고 있어. 신고하면 불안한 마음으로 밖에 안 돌아 다녀도 될텐데. 신고하면
일 년 후에 들어가야 한다는 게 싫다는데.
내 생각에도 벌써 몇 년을 가족처럼 살았는데 헤어 진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고”
“그래? 이 정도 일했으면 그 애 집안도 그렇게 어렵진 않을 텐데. 내년에는 별이도 학교에
가니까 우리도 별 걱정이 없는데. 아쉽긴
하지만 그 애도 어린 나이에 고향 가서 뭘 배워도 배워서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
세민은 슬픈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세민아, 네가 츠량을 동생처럼 아낀 것은 알지만 그 애 장래를 생각해야지. 이제 21살인데
이렇게 범죄자로 놔 둘 수는 없잖아.
일단 신고하라고 해. 그래야 그 애도 일년이라도 편하게 한국에서 일하면서 마음놓고 돌아
다닐 수 있잖아. 네가 한가할 때 츠량이 그
동안 제대로 놀지 못한 것 좀 도와 주고 그래라.”
보희가 그렇게 당부하고 밖으로 나가는 사이 세민은 츠량과의 관계를 누나에게 말하지 못하
는 마음이 답답하기만 했다. 사랑하고 있다고
정말 말하고 싶지만 딱히 츠량에게 고백한 적도 없는 그로서는 더 없이 답답했다.
다시 룸으로 들어간 보희는 접대부 아가씨들을 한 쪽 팔에 낀 채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대
면해야 했다. 태석의 친구들은 그녀를 음흉한
눈으로 보며 태석을 번갈아 가며 돌아보고 있었다.
태석은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보희가 사람들을 지나 그의 옆에 앉았다.
특별히 여자들끼리는 할 말이 없었다. 저번에 보희에게 말실수를 해서 한 대 맞았던 아가씨
도 있었지만 그녀는 보희의 눈을 피하기만
했다.
“20년 전에 있었던 그 사건 기록을 뒤져 보았는데 그냥 사고 처리로 되있더군. 근데 그 차
량 조회를 시켜 보았는데 사고 전날 정비를
한 것을 알아냈다고 사설 탐정한테 연락이 왔어. 며칠 동안 수사하다가 담당 정비사를 찾았
는데 그때 그 사고 이후에 사라졌다고 하더군.
너무 오래되어서 그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 정비 자격증하고 이름 나이 등으로 수소문
을 하고 있다더군. 경찰들이 왜 이런 사소한
일을 알아 보지 못했는지 의문이야.”
태석은 수호의 말을 들으며 술을 한잔 마셨다.
“이제 꼬리가 다 잡힐려고 하는군. 아무래도 황회장 부자의 내연 관계를 알아봐야겠어. 사
람을 붙이는 게 좋아. 아무래도 내연 관계가
있다면 그 여자들 계좌 어딘가에 돈이 흘러 들어 갔을 거야.”
태석은 다른 그의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그가 술잔을 들었다.
“이 술잔은 20년전 오늘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을 위한 잔이야. 모두들 우리 부모님과 나한
테 해 준 일은 두고두고 잊지 않겠어.”
서로의 술잔이 부딪혔고 보희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하는 말을 전부 알 수 없었
지만 그늘진 태석의 과거인 부모님의 기일이
오늘이었던 것이었다. 슬픔을 뒤로 하고 자신의 아버지 자리였을 그 파티에 참석한 태석이
가엽게 느껴졌다.
보희는 그가 술을 너무 마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운전을 해야 할 것 같아 술은 마시지
않았다.
혜미가 옆에서 그녀에게 말을 시켰다.
“언니 정말 예뻐졌다. 아찌가 잘 해주나 봐?”
보희는 그냥 웃기만 할 뿐이었다.
“에이, 언니. 좋아하는 구나. 그렇게 싫어 했으면서 미운 정이 사랑 정이 돼 버린 거야?”
“아니야. 얘가. 할머니는 어떠시니?”
“죽일년이라고 욕하면서도 밥은 꼬박꼬박 차려 주시니까 그냥 살고 있지. 건강하셔. 무슨
80먹은 노인이 그렇게 건강한지. 때릴 땐
너무 아파.”
“술 좀 작작 먹어. 몸 버릴라.”
헤헤거리며 혜미가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흥, 여시같은 눈으로 남자를 꼬드기는데 안 잘해 줄 남자가 어딨어. 뒤에서 호박씨만 요란
하지.”
또 그 여자였다. 그녀보다 나이도 어리면서 매번 반말에 빈정거리기만 했다. 보희가 한마디
하려는 찰나 태석이 나섰다. 그가 벨을
누르자 세민이 들어 왔다.
“네, 손님.”
“저 년 끓어 내고 다른 아가씨 불러. 한번만 더 내 여자한테 함부로 입놀리면 아예 이 가
게에서 내쫒아 줄 테니까 알아서 해.”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변한 여자는 콧방귀를 뀌고는 나가 버렸다. 세민은 자세한 일은 모르
지만 그 여자가 누나를 괴롭혀서 태석이 나선
것 같았다. 세민은 보희를 한 번 보고는 다시 나갔다.
자신의 파트너가 밖으로 나가서 수호가 궁시렁거렸다.
“야, 난 저 여자가 좋은데. 왜 그래?”
태석이 노려보자 수호는 웃으면서 보희에게 윙크를 보냈다. 이젠 저 윙크도 귀엽게 느껴졌
다.
그렇게 남자들은 술이 떡이 될 정도로 마셨다. 태석이 이렇게 취한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았
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해서
보희는 그의 큰 덩치를 자신의 온 몸에 실었다. 세민이 다가와 도와 주었지만 태석은 세민
의 팔을 있는 힘을 다해 뿌리치고는 그녀의
몸에 기댄 채 차에 올라탔다.
그를 옮기느라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서 정말 꼴불견이었다. 땀을 엄청 흘리며 간신히 그
를 차에 태울 수 있었다. 그녀 아닌 다른
사람이 부축하려 하면 기어이 뿌리치고 그녀한테만 기대려고 했다. 그의 안전 벨트를 잠그
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온 태석은 씻지도 못하고 욕실에 들어 앉아 구역질을 하는 통해 보희의 고생은 이
만 저만이 아니었다.
한참 후에 그를 방으로 옮겼는데 시체가 따로 없을 만큼 무거웠다.
수건을 적셔 그의 얼굴과 입 주변을 닦은 뒤 옷을 벗겨 주었다. 그는 잠꼬대인지 뭔지 욕을
하고 있었다.
“개자식, 죽여 버릴거야. 나쁜 놈들.”
보희는 누구에게 욕을 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곧 알게 되었다. 그는 흐느껴 울었다. 다 큰
남자가 우는 것은 세민이 그녀 앞에서
우는 것 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태석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엄마, 아빠’를 불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희는 그의 눈물에 주저앉아 그의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황회장의 잘못으로 인해 그의 마
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항상 짓누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도 아파 왔다.
태석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한 줄기 눈물이 그녀
의 눈에서 흘러 내렸다.
“사랑해요. 태석씨. 사랑해요.”
그녀의 고백과 함께 그의 울먹이는 흐느낌도 사라지며 그녀의 품에 안겨 조용히 잠이 들었
다.
사람은 사랑을 하면 변한다고 했던가. 태석의 무뚝뚝한 표정과 말투에도 보희는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감춰진 내면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고통으로 누군가에게 정을 쉽사리 주지 못하고 자란 탓이란
것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보희는 그에게 더 친근하게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가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
두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사랑을 나눌 때는 더 없이 자상했다. 말없는 표현이 그 순간만큼은 잘 표
현되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관계가 더 발전될 만한 상황은 되지 않았다. 그 상황이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태석의 신경이 요즘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워져 있었다. 집에서는 내색을 안 했지만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신경질적인 태도를 자주
보이고 있었다.
최근 그의 사무실이 털리는 사건이 있었다. 일본 업체와의 기밀 서류가 밖으로 유출되었던
것이었다. 그 사건이 언론에 유포되어 회사의
주식이 하락하는 상황이었다. 책임자인 태석이 회장실과 다른 중역들로 추궁을 당하고 있었
다.
보희와 태석은 한밤중에 일을 당하였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었다. 범인의 흔적은
한가지도 남아 있지 않아 태석은 짐작만 하고
있었다. 자신을 회사에서 몰아내려는 작당들은 두 사람밖에 없었다. 황회장 일가였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인 오늘 태석은 황회장과의 개인 면담 후 수호를 호출했다.
“어떻게 된 거야?”
수호가 오자 마자 그에게 물었다. 태석이 말이 없자 보희가 대신 말하였다.
“며칠 전에 이번 일본 회사와 합작으로 이루어질 프로젝트 기밀 서류가 도난당했어요. 누
군가 이 사실을 언론에 알려서 지금 주식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입니다.”
“맙소사, 어떤 자식이 그런 짓을...”
태석이 수호의 앞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지금 추궁당하는 중이야.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오고 있어.”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 군.”
“황회장이 일단 내 주식을 모두 내 놓으라는군. 그렇게 하면 회사의 대주주인 내가 책임을
지고 회사를 안정시키는 격이니 사람들이
안심을 하고 다시 회사 주식이 오를 거라면서 당분간만 그런 식으로 해서 회사가 안정되면
그때 다시 주식을 돌려준다는 그런 식이야.
황회장네 잔머리가 지금 빠르게 움직인다.”
“설마 그 작자들의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했다가는 넌 알거지가 되는 거라고.”
“맞아. 그걸 노리는 거야.”
보희는 그가 그런 식으로까지 책임 추궁을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래서 말인데. 만약 내가 주식을 내 놓으면 황회장이 주식을 헐값으로 사 드릴거야. 그렇
게 되면 황회장은 경영권에서 완전한 독재가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영영 이 회사를 되찾을 수 없잖아.”
“그래서 말인데 일단 지우형한테는 말해 놓았어. 너희들이 내 주식을 내놓자 마자 빨리 사
들여. 주식은 너한테 맡길 거야. 네가
담당할테니까 황회장이 먼저 사들일 시간은 없겠지. 그렇게 한 후에 나한테 위임장을 맡겨
라. 그런 뒤 그들의 음모를 밝히고 주주총회에서
그들의 경영권을 빼앗아야지. 할 수 있겠지?”
“그건 문제없어. 하지만 황회장이 의심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주식을 한 사람이 대거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쪼개사는 거라 크게 의심은 못 할
거야. 정보 유출 안되게 신경만 쓰면 돼.”
“알았어. 그리고 그 정비사를 찾았어. 주소는 일단 받아 뒀는데 부산 시내를 좀 벗어난 곳
에서 조그맣게 정비소를 하고 있다더군.”
그가 작은 종이 쪽지를 태석에게 건넸다.
“네가 직접 찾아가면 위험할 텐데.”
“아니 직접 가야지. 확실하게 알려면 그게 나아.”
“보희씨는 내일 나하고 부산에 갑시다. 아침 일찍 가야 하니까. 요즘 날 미행하는 자가 생
긴 것 같아. 아무래도 출장을 빌미로
보희씨하고 같이 움직여야 덜 의심을 살 테니까. 부산행 비행기 티켓 2장을 예약해 두시
오.”
“예, 알겠습니다.”
다음날 태석과 보희는 부산 건설 업체를 들러 시찰을 한 뒤 3시쯤 수호가 준 주소를 들고
정비사인 김영길이란 사람을 찾아 나섰다.
시내를 좀 벗어난 곳에 허름하고 작은 정비소가 나왔다. 60살은 될 법한 작고 배불뚝이 모
양을 한 백발의 남자였다. 그가 자동차 옆에
서서 서류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아마도 태석이 찾는 인물이 그 사람일 것이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가자 태석과 보희는 차에서 내려 초라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뭔가 적고 있던 그가 그들을 보자 인상 좋은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나쁜 일을 꾸밀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혜성 그룹에서 왔습니다.”
그가 들고 있는 볼펜을 떨어 뜨렸다. 손이 덜덜 떨리는 그를 보며 태석은 자신의 감이 틀리
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창남아 잠깐만 나가 있거라.”
그들이 보지 못한 한쪽 구석에서 신체 장애가 있어 보이는 20대 초반의 사내가 있었다. 소
아마비 환자처럼 한쪽 다리를 절며 보희의
옆을 지나갔다.
“이리..이리 앉아요.”
그가 플라스틱 의자를 보희와 태석에게 밀며 권했다.
“무슨 일로 오셨소?”
“20년 전 혜성 그룹의 동업자인 김석훈 회장님을 기억하십니까?”
한동안 말없이 담배를 피우며 그 때를 회상하는 눈치였다.
“기억하지.”
“전 그 분의 아들인 김태석입니다. 그 사고가 저는 고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황회장의 집
에서 산지 얼마 되지 않아 몰래 엿듣게
되었지요. 하지만 어렸기 때문에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었고 증거도 없었습니다. 지금 그
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당신을
수소문했지요.”
태석은 고생해서 찌든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죄를 묻는 구려. 진작 벌을 받았으면 내 자식이 저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내 죄
야.”
그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았다.
“20년 전 난 김회장의 차를 정비하던 곳에서 일을 했지. 철없이 감옥살이만 하고 다니고
부모님한테 해 드린 게 없었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홀로 남으셨는데 없는 살림에 병까지 얻으셔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
었어. 수술이라도 하면 그간 못한 효도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절실했지. 근데 황회장의 측근이 찾아 왔더군. 아무래도 뒷조사 끝에 내가 제
일 궁색하다 싶었는지 거금을 제시하더군.
갈등도 했지만 내 부모가 더 중요했어. 김회장이 죽어도 그 사람은 돈이 많으니까 자기 처
자식 배 곪을 일은 안 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차 정비때 손을 좀 봤어.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도록 말이야. 난 그 돈을 받자마자 서울을 떠
나서 부산으로 이사했지. 뉴스를 보니 차가
완전히 불타서 성한 곳이 하나 없더군.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내 어머니 살린 것에 감사하며
살았는데 40넘어 얻은 자식이 소아마비더군.
얼마나 통곡했는지 모르네. 내 죄를 내 자식이 짊어 진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어. 이제
라도 내 죄를 받으라면 받아야지.”
그는 20년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말하듯이 눈물을 흘렸다. 주름진 얼굴 선을 따라 그
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없다는 게 무슨 죄겠어요? 저희 이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공소시효는 이미 끝났
지만 황회장의 비리를 폭로하려면 어르신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협조해 주세요.”
보희가 태석 대신 부탁을 했다. 태석 성격에 그의 상황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
지의 죽음에 관계된 자에게 부탁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태석은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협조해야지. 벌을 아주 안 받지는 않겠지만 지금이라도 죄를 시인한다면 두 번 다시 악몽
은 안 꾸겠지. 젊은이 이 늙은 것이
사죄함세.”
그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보희는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태석은
말없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보희는 그를 일으켜 세운 후 명함을 주고 조만간에 연락을 한다는 말을 하고 태석을 따라
나섰다.
택시 안에서 태석은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 저 사람처럼 부모를 위해 한 짓이 아니라 자기 사리사욕 때문에 저질렀다고 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목을 부려 놓았을 거요.
정말 부모를 위해 모든 할 수 있는 게 자식이군. 내 아버지 때문에 그래도 한 사람이 살았
다는 군. 기막힌 일 아니겠소? 최보희씨?”
“부모 형제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요?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할 수 있지만 그때
저 분의 상황에서라면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전 목숨이라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걸요. 이사님은 어떠세요?”
“아직.. 모르겠군.”
보희는 그의 대답에 좀 서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일이 하나 해결은 된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
퇴근 시간이 되어 갈 때 쯤이었을까 문이 열리며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세민이 들어 와서
보희는 반가운 마음보다는 놀라서 뒤로 넘어 갈
뻔했다.
“누나, 생일 축하해. 놀래켜 줄려고 그냥 왔어. 아직 안 끝났어?”
허겁지겁 일어나 세민이를 쫓아냈다.
“세민아 밑에 내려가 있어 내가 금방 내려갈게. 빨리.”
“왜 그래?”
보희가 강제로 그의 등을 떠밀며 밖으로 내보내려는데 태석이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는 세
민을 발견하는 순간 먹이를 발견한 사자 마냥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세민과 태석은 서로 경계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저..그러니까.”
보희가 제대로 말을 못하고 있는 사이 퇴석과 세민 둘 다 그녀를 쳐다보며 묻는 듯한 눈빛
을 보냈다.
“동생입니다.”
“동생?”
태석은 불쾌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 친동생이예요.”
“클럽에서 본 것 같은데 맞나?”
“네.”
보희는 모른체 하며 물었다.
“어...어떻게 아시죠?”
“보희씨 동생이 일하는 클럽에서 본 적이 있소. 당신 동생이 그 클럽에서 일하는 줄은 몰
랐군.”
“네. 학교 휴학 중에 잠깐 아르바이트 식으로 하는 거예요. 죄송하지만 저 먼저 퇴근하겠습
니다.”
“오늘이 저희 누나 생일이라서 축하해 주려고 왔습니다.”
세민은 계속 건방진 말투로 그를 대했다. 보희는 그를 보며 절대 가만히 있으라고 애원의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태석의 허락을 받고 그보다 먼저 퇴근을 하는 순간까지 태석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가만
히 서서 그 둘이 나가는 뒷모습을 한참을
보았다.
태석은 자신의 여자와 관계된 남자가 비서의 동생이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혼란스럽기만 했
다.
보희는 세민이 궁금해하는 것을 무시한 채 아무 말도 말라며 차를 타고 회사를 빠져 나왔
다.
집 앞에 도착해서 세민이 보희를 못 내리게 막았다.
“얘기 좀 해.”
“할 얘기 없어. 내려.”
“아니, 난 할 얘기 있어. 없어도 들어. 그 회사 당장 그만둬. 그리고 그 자식 집에서도 나
와.”
“싫어.”
“왜 싫어. 미쳤어. 왜 그 자식이 상관이라는 말 안 했어.”
“묻지 않았잖아.”
그녀의 대답에 세민이 더 화를 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지금? 그 자식이 모른다며? 알게 되면 가만 있을 것 같아. 가만
있을 것 같냐구?”
“여태껏 잘 속이고 있어.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알게 하지도 않을 거니까.”
“지금까지 버텼다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웃기지마. 그 자식한테 농락 당하면
서 회사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앉아서
그 자식이 시키는 일이 잘도 되겠어, 어?”
“그럼 어떡할까? 카드 내기해서 이겼다면 돈만 받고 끝냈겠지만 졌잖아. 너도 어쩔 수 없
었다는 건 이제 인정해. 누나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나 때문에 비참하다고?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사랑하는 것 때문에
비참한 것 아니야?”
그만 그를 때려 버렸다.
세민은 억지로 화를 참고 있었다. 그가 차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가도 보희는 한참을 차안
에 앉아 눈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그를 보는 눈을 세민이 읽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끝까지 마음 숨기고 태석에게도 알리
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만 세민이 알아 버린
것이 속이 상했다. 몸서리치게 싫었는데 정말 싫었는데 좋아해 버리다니 정말 바보 같았다.
그녀 생일이라고 츠량이 음식을 많이 만들어 두었다. 셋이서 깜짝 파티를 열려고 했었는지
여기저기 알록달록한 풍선들이 달려 있었고
별이는 선물로 생일 카드를 예쁘게 그리고 붙이고 해서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즐거워야
할 생일이 엉망이 돼 버렸다.
“동생이랑 같이 살고 있소?”
일을 하다 말고 그가 물어 보았다. 뜸금없는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네?”
“그러니까 동생이랑 같이 사냐고 물었소?”
“아, 아니요.”
지금은 퇴석과 살고 있다.
“동생이 혹시 결혼했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결혼이라니?
“아니지만 왜 그러시죠?”
“아니오. 그냥 궁금해서. 학생이라고 했던가?”
자꾸 동생 질문을 하기에 점점 불편해 졌다.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사과를 했다.
“미안하오. 남의 가정사에 관심을 갖아서. 그냥...동생이 호감 가게 생겨서 물어 본 거요.”
“네...군대 갔다 와서 법학과 3학년 복학 전에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그렇군. 이름이 뭐지?”
“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요? 그냥 동생 이름을 묻는 건데.”
태석은 보희가 뭔가 숨기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묻는 것이었다.
“최세민이예요.”
“여자친구는 있소?”
“잘 모르겠어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자꾸 제 동생 얘기를 물으시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불안감을 감추며 물어 보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대답만했다.
태석은 누나라는 보희가 동생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 그에게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 것은 아닌지도 궁금했다. 동생이 딸까지 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혹시 세민의 딸이
아니고 그와 살고 있는 여자만의 자식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세민의 나이를 따져 보았을 때 아이의 나이가 많았다. 미성년자
때 아이 아빠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건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일하는 중간에 밖에서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려 됐다. 보희의 전화 같은데 희미하게 들려서
보희가 못 들은 것 같아 태석이 알려 줬다.
“전화 왔는데 가서 받아 보시오. 아까부터 계속 울리던데.”
“어머.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보희가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직접적인 충격을 받은 것처럼 아팠지만 곧 괜
찮아졌다.
“괜찮소? 안색이 창백하군.”
“이상하게 가슴이 아프네요. 괜찮아요. 이제. 금방 오겠습니다.”
보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자신의 사무실로 나갔다.
끊겼다가 전화가 다시 울렸다. 병원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그녀에게 전화하는
경우는 급한 경우가 아니면 없었다.
“여보세요?”
“청평요양소입니다. 최보희씨 되시나요?”
“네, 전데요.”
“어머님이 많이 위독하셔서요. 요즘 들어 부쩍 안 좋아지시더니 위급한 상태예요. 혈압도
계속 떨어지시고 의식이 불규칙적이시니까 지금
빨리 오셔야 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가시는 건 아닐 거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뭘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고 계속 앉았다
일어 났다를 반복하며 눈물을 닦기만 했다.
“세민아, 누난데 별이랑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어머니가 안 좋으시데. 그래, 알았어.”
자꾸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훔치며 태석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말없이 서 있는 보희를 태석이 쳐다보고는 울고 있는 보희에게 다가 왔다. 그에게 안겨서
위로 받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더
힘들었다.
“바쁜 줄 알지만 어머니께서 위독하시다고 하셔서 조퇴를 해야 겠습니다.”
“많이 안 좋으시군. 어서 가 봐요. 여기 일은 괜찮소. 운전할 수 있겠소?”
“네,”
불안해 보이는지 그가 운전을 해 주겠다고 했지만 동생들과 가야 하기 때문에 안 된다며 그
를 만류했다. 렌즈 때문에 눈이 아팠다. 빨리
렌즈를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회사를 나가기 전까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차에 올라타자 마자 안경을 벗어 던지고 렌즈를 뺐다. 그래도 눈물 때문에 자꾸 눈 앞이 흐
려지고 있었다.
집에 들러서 별이와 세민이를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츠량도 가고 싶어했지만 자진 신고
를 하지 않아 불법 체류자의 몸으로 나다니기가
뭐해서 그냥 집에 있으라는 말을 하고 나왔다.
별이가 불안해 보였다. 병원에 간다는 말에 무섭다며 가기 싫다는 것을 억지로 달래서 데려
가는 것이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였다.
병원으로 가니 간호사들이 어서 들어가라며 그녀들을 부추겼다.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어머니는 산소 마스크를 쓰고 온갖 기계들을 몸에 붙이고 계셨
다.
의사 선생님은 그녀를 밖으로 불렀다.
“아무래도 오늘밤을 넘기시기 힘드시겠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
다.”
“선생님, 살릴 방법이 없을까요? 네?”
“아시겠지만 워낙 체력도 약하신데다가 정신적인 충격이 크셨지요. 게다가 심장이 워낙 약
하셔서 방법이 없습니다. 심장 이식 수술이
한다고 다 할 수 없다는 것은 아시잖습니까? 정말 어떻게 도와 드릴 일이 없습니다. 죄송합
니다. 편안히 가실 수 있도록 옆에서 같이
계셔 주세요.”
그녀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위로했지만 위로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지켜 온 사람
인데 보낼 자신이 없었다. 비록 병원에 있는
어머니였지만 보희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었다. 대꾸 없이 그녀가 하는 말도 듣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마음을 숨김없이 말할 수
있는 분이셨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셋이 병상을 둘러앉아 이제나저제나 깨어날까 한시도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너무 마르고
초췌한 모습의 어머니였다. 자식 사랑 남편
사랑에 항상 울다가도 웃던 분이셨다. 비록 사랑이 그리워 아버지들이 떠난 후 새로운 사랑
에 목말라 하던 분이셨지만 그런 어머니를
탓하지 않았다. 이제 그 아버지들 곁으로 가려는 어머니가 부럽기만 했다. 아버지 품에서 편
안한 생활을 했던 보희로서도 그들 곁에 가면
다시 힘든 생활을 하지 않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어머니가 그들이 온지 몇 시간만에 눈을 가만히 떴다.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 그들을 보며 진심으로 웃고
계신다. 어머니가 뭔가 말을 하시려는지 입을 벙긋거리셨다.
의사가 와서 산소 마스크를 벗겨 주었다.
“어머니, 보희 왔어요. 알아보겠어요?”
고개를 끄덕이신다. 가는 길에 정신이 돌아오신 걸까?
“우리 딸, 보희. 미안하다. 내가 못나서 널 고생시켰구나. 현실이 너무 싫어서 바보같이 외
면만 했구나.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도
아는 척하기가 겁나서...”
힘들게 말하며 목이 메어 와 말씀을 못하셨다. 일부러 정신이 나간 척 하신 어머니지만 밉
지 않았다. 어머니 때문에 그녀가 이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거였다.
“네가 사랑하는 남자도 보고 싶고 손자도 안아 보고 싶고.. 우리 세민이 잘되는 것도 보고
싶고.. 우리 막내 별이가 학교 가는 것도
봐야 하는데 자꾸 네 아버지들이 나보고 오라는 구나. 윽...”
어렵사리 말을 하시다가 심장에 무리가 왔는지 고통을 호소하고 계셨다.
“미안하다. 미안해..헉..헉..이 죄를 다 어...”
그녀를 보며 울고 있는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다. 맺혀 있던 눈물이 떨어지는 데도 눈동자
가 움직이지 않는다. 기계음이 삐 소리를
내지만 듣고 싶지가 않았다.
“어머니, 어머니, 계속 말씀하세요. 내가 다 듣잖아. 말하란 말이야. 몇 년만에 말하는 건데
더 말해야지. 말해요. 제발...”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었지만 의사와 간호사 세민이 별이가 그녀를 끌어낸다. 의사가
맥을 집고는 어머니의 눈을 감겨 드렸다. 그녀를
보는 눈이 서서히 닫혀 버렸다.
격렬하게 우는 그녀의 모습에 별이가 놀라서 울었고 세민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보희를 끌어안아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너무
흥분한 보희의 처절한 몸부림을 당할 수가 없었다.
“아아아악~”
절규를 하다 보희가 뒤로 넘어갔다.
얼마 뒤 깨어났을 때 그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일어난 일이 꿈이라고 생각하고 주
위를 둘러 보았을 때 주변은 온통 하얀 벽들이
그녀 시야에 들어 왔다.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깨셨군요. 기분은 어떠세요?”
“어딨죠?”
간호사는 누굴 묻는지 알았다.
“옆건물에 있어요. 모든 일은 이 쪽에서 해 주고 있으니까 다른 불필요하신 일은 없으실
거예요.”
보희가 일어나 발을 딛자 간호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갑자기 일어나시면 안 좋아요. 빈혈기도 좀 있고...혹시 알고 계세요?”
“뭘 말이죠?”
눈물을 훔치며 신발을 신었다.
“임신하셨어요. 정확한 검진을 받아 보시면 아시겠지만 알고 계신가요?”
그녀가 하는 말을 처음에는 알아 듣지 못했다. 동공이 넓어지는 것 같았다. 항상 피임을 했
다. 물론 그녀가 아니라 태석이 한
것이었지만 임신을 할 만한 일이 없었다.
“모르셨어요?”
미안하고 민망한 표정과 말로 간호사가 물었지만 모른다고 말하기가 민감한 문제였다.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께서 저렇게 되셨는데 힘든 시기에 임신하셔서 어떡한대요. 조심하세요. 안정이 제
일이라고요.”
간호사는 그녀를 영안실로 안내했다. 염을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별이는 밖에 두고 세민과
둘이 염을 지켜보았다.
어디 한군데 자기 어머니인데 그 혼이 빠져 생기가 없었다. 어머니의 차디찬 시신을 만지며
또 다시 울음이 크게 나왔고 세민이 그녀를
부둥켜 안아 같이 소리내어 울었다. 한참을 울고 염이 끝나자 세민과 보희는 분향소로 올라
갔다.
분향소의 향을 피워 둔 사이에 어머니의 영정 사진이 놓여 있었다. 밝고 생생했던 당시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금방이라도 나오실 것
같이 웃고 계셨지만 그 뿐 그녀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외면한 친척들이라 올 만한 사람도 없었다. 세민과 보희는 애써 자신의 친한 친구들
도 부르지 않았다. 가시는 길을 그들끼리
조용히 보내드리고 싶었다.
“누나, 어머니 어디에 묻지?”
“글쎄, 내 아버지 옆에 묻어 드리고 싶은 게 내 마음이지만..그럴 수가 없구나.”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국군묘지에 안치되셨기 때문에 민간인인 어머니는 묻히실 수가 없었
다.
어머니가 과연 어느 분을 더 사랑하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어머니는 모든 아버지들을 사
랑하셨다는 생각에 누구 옆에만 묻어 드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화장하자.”
힘없는 목소리로 보희가 말하자 세민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좋아하실 까.”
“어머니도 어느 한군데 묻히시면 싫지 않을까? 7년을 병원에서 갑갑하게 지내셨는데. 그냥
그렇게 하자. 화장해서 강가에 뿌려
드리자.”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든 별이를 보았다. 어머니는 별이를 세민과 보희 보듬듯 못
보듬고 사랑 주지 못한 것에 한이 맺히셨을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머니 대신 보희와 세민이 더 사랑을 주고 키워야 겠다는 생각
에 그녀의 약해졌던 마음이 다시 강하게
일어나는 것 같았다.
태석은 이틀째 불안했다. 비서인 보희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 지각 한 번하지 않고 여지껏
열심히 일한 보희는 어제 오후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전화를 받고 나간 후 연락이 되고 있지 않았다.
거기다가 집에 있어야 할 그의 여자도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전원이 나가서 그 두 여자
가 전화를 받을 생각도 할 생각도 안 하고
있는 상황이라 지금 태석의 기분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회사일이 잘 풀릴려고 하니까 보희가 그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클럽 사장인 지우에게 전화
를 걸어 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지만 주소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아이와 남자가 있다는 것 밖
에 모르고 있었다. 계약 관계라지만 너무
무관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보희가 세민과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보희가 어머니 때문에 청
평에 내려가 있는 상태였고 아마 세민도
내려갔을 것이었다. 세민의 여자친구가 그의 여자라면 그녀도 내려갔을 수도 있었다.
보희가 세민과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 머리에서 열이 나는 것처럼 흥분되었다. 그
동안 그녀의 외출에 눈을 감고 있기는 했지만
오늘은 그것을 봐주고 싶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태석 자신보다 세민이란 사람을
더 생각한다는 것에서 질투심이 말도 못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태석은 인사과에 전화해 비서인 보희의 집주소를 알아냈다. 회사 일이 거의 끝날 때 쯤이었
다. 하지만 집에서도 전화를 받지 않자 그
길로 보희의 집을 찾으러 나갔다. 의외로 그의 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다.
주택가에 들어서서는 차를 세워 두고 일일이 걸어다니면서 주소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녀
집 근처의 가게집에 들어가서 집을 정확히
알고는 조금 더 가서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모두 똑같은 네모 모양의 집들이 한 골목에 여러개 였지만 대문마다 걸린 주소로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세대 주택이라 대문이
열려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일층으로 올라갔다. 문이 여러 개 있었기 때문에 하나하
나 문을 두들겨 보아야 했다. 첫 번째 집에서
가장 끝에 있는 집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집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와 본 것이었다. 문을 두
들기자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어딘지
모르게 억양이 이상했다. 확실히 보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문이 열리고 경계의 눈빛이 짙은 예쁜 여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무..무슨 일이시죠?”
그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그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겁에 질린 큰 눈으로 더듬더듬 말
을 이었다.
“네. 최보희씨 회사 동료입니다. 보희씨가 결근을 해서 찾아 왔습니다. 안에 있습니까?”
여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제 병원에 간다고 조퇴를 했는데 그 병원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찾아가시려고요?”
그녀가 뭔가 절박하게 물어 왔다.
“그건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보희언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동생들하고 갔어요. 저도 가고 싶
은데 어떻게 가는지 몰라서 저는 집에
있습니다.”
그녀가 울먹이며 또박또박 그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태석은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는 기분
이었다. 너무 경황이 없어서 보희가 연락을
못했을 거라는 생각과 직장 동료로서 문상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생각만 하
다가 보희에게 있을 일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랑 가시겠습니까?”
“정말이요?”
“괜찮으시다면 저랑 가시죠? 병원 이름은 아시죠?”
“네. 잠깐만요.”
그녀는 허둥지둥 들어가 검은 옷을 차려 입고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나왔다. 그녀가 입
은 옷은 상복으로 산 것은 아닌 듯 색깔만
맞혀 있고 나온 것 같았다.
그는 종이를 받아 들고 그녀를 차에 태운 뒤 출발했다.
요양소로 가는 차 안에서 그는 보희에게 아주 어린 여동생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고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는 보희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름 외에는 알려 주기를 꺼리는
눈치여서 태석도 굳이 묻지는 않았다.
보희의 여동생이 어릴 거라는 생각은 못해 보았었다. 혹시 그 날 본 아이는 보희의 동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보희에 대해 잘못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좀 누그러지는 것 같았지만 세민과의 관
계를 생각하니 다시 머리가 복잡해 지는 것
같았다.
청평에 도착 후 자신과 같이 온 츠량이라는 아가씨를 데리고 요양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밤이 된지 얼마 안되어서 인지 밖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안에는 환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그들을 돌보는 간호사들이 눈에 띄었
다.
데스크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간호사는 태석의 외모에 놀란 눈을 하더니 금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에게 무슨 일로 왔
냐며 친절하게 물어 왔다.
“최보희씨 가족이 사망해서 이 요양소에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어머, 그러세요? 보희씨하고는 무슨 관계세요?”
그녀가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본 나이가 좀 지긋한 여자가 그녀를 꾸짖으며 다른 일을
시키고 대신 얘기해 주었다.
“최보희씨 찾으신다고요?”
“네.”
“제가 안내해 드릴께요. 어제밤에 돌아가셔서 그래도 삼일 내리 고생안하는게 다행이예
요.”
그녀가 그를 안내하며 얘기를 계속했다.
“정신도 없는 어머니한테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다 했는데 심장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큰일이 났었죠. 그래도 임종을 본 것이
다행이었죠. 어머니 돌아가시자 마자 뒤로 넘어가서 얼마나 놀랐던지. 그래도 이렇게 훌륭한
애인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예요. 많이 위로
해 주세요.”
그녀의 말에 태석은 좀 당황했다.
“네?”
“보희씨, 어머니가 정신없이 말하는 걸 들었는데 그 쪽이 아닌가 보네요. 보희씨랑은 무슨
관계시죠?”
“직장 상관입니다.”
“제가 실례를 했네요.”
태석은 보희에게 애인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좀 아이러니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는 그와 살
고 있는 여인을 더 좋아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감정이 생긴지는 얼마 되지는 않았고 그녀에게 고백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저 건물이예요. 분향소에 상 당한 사람이 보희씨 가족밖에 없으니까 찾기가 힘들지는 않
을 거예요.”
태석과 츠량은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서둘러 분향소로 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독특한 향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는 차에서 꺼낸 봉투에 부조금을
넣을 생각으로 문 앞에서 잠깐 머뭇거리고
있었고 츠량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상집 치고 너무 조용했다. 안을 둘러보니 그 곳에는 하얀 상복을 입은 여자와 작은 꼬마 여
자 아이와 검은 양복을 입고 앉아 있는 세민
그리고 츠량만 덩그라니 있었다. 고개 숙여 울고 있는 보희는 츠량을 안고 울음을 터트렸고
레스토랑에서 봤던 어린 여자 아이가 덩달아
울었다.
그를 먼저 알아 본 것은 세민이었다. 세민의 얼굴이 굳어지며 그를 뚫어 져라 쳐다보고 있
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태석은 먼저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 상주인 세민에게
절을 하려 했지만 그는 곡은커녕 앉은 자세
그대로 있었던 것이었다. 태석은 할 수 없이 옆에 앉아 있는 보희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그
녀 곁으로 다가 갔다.
“보희씨, 뭐라고 위로 해야 할지 모르겠소.”
보희의 울음소리가 뚝하고 끊겼고 시끄럽게 우는 아이의 소리 때문에 적막한 공기가 깨지고
있었다. 보희도 움직이질 못했다.
그녀도 세민도 아무도 말도 움직이지도 않아서 태석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는 자신
의 여자가 이곳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좀 나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 기분도 잠시뿐이었다.
“보희언니, 이분이 저도 데려와 주어서 올 수 있었어요.”
츠량은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었다. 그러면서도 태석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곧 보희는 츠량을 품에서 떨어트리며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태석의 심장이 왠지 모르
게 두근거렸다.
보희가 고개를 들었을 때 태석은 자신의 눈이 믿기지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 듯 자리
에 주저 않아 버렸다.
“당신...어떻게 된 거지?”
그의 목소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희미하게 들렸다.
“미안해요.”
“뭐?”
안경도 쓰지 않았고 웨이브 머리도 아니고 녹색 눈을 하고 그를 보며 울고 있었다. 그의 비
서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그의 동거녀가
앉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조금씩 상황이 파악되어 갔다.
두 여자를 지금까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도 못한 채 갈등했던 자신을 생각하자 화가 났다.
그때 닮았다고 느꼈을 때 의심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었는지 멍청하게 당했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보희의 손목을 있는 힘껏 잡
아 채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했다.
세민이 그의 팔을 잡아 만류하려 했지만 그의 성난 눈빛에 주춤거렸다.
“밖에 가서 얘기하고 올 테니까 츠량이하고 별이하고 여기 있어.”
세민이 따라 나오려는 것을 보희가 막았다. 태석의 손에 이끌려 끌려 나오다 시피 밖으로
나왔다.
그는 다짜고짜 보희의 뺨을 한 대 올려 부쳤다. 그는 저주받을 욕설을 하며 분이 안 풀리는
지 옆의 나무기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보희는 그에게 맞은 뺨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무 감각도 느낄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
켜 벤치에 가서 앉았다.
“미안해요. 정말 속일려고 한 게 아니예요. 난 두 군데서 일을 한 것뿐이고 당신이 그 사이
로 들어 왔어요.”
“내 탓이란거야?”
“그건 아니예요. 난 돈이 필요했고 당신의 제의가 아니면 돈 나올 곳이 없었어요. 이길 줄
알았어요. 내기 카드에서 져 본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내 꼴을 보고 좋았겠군.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비웃었겠어?”
그가 화를 내며 그녀의 팔을 쥐어 흔들었다.
“아니예요. 정말 그런 적은...”
“웃기지마. 일본 출장 때도 당신은 날 비웃었어. 그러면서 당신은 나한테 몸을 줬지? 어차
피 한 번 준 몸 인심쓰듯이 줬겠지.”
“그렇지 않아요. 난..난.. 클럽에서 날 추근대던..창립기념일 파티에서 당신도 날 해꼬지 하
던 남자 기억할 거예요. 그 남자가
나한테 하는 행동을 보고 내 동생이 흥분해서는 폭행을 저질렀어요. 합의금으로 어마어마한
액수를 불렀기 때문에 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왜 그 후에는 말을 안 했지? 물론 못했겠지. 복수심으로 날 우롱할 생각이었을 테니까.”
“물론 못 했어요. 그래서 회사에 사표도 냈지만 당신은 오히려 거절했죠. 나라고 회사에서
까지 당신을 보는 게 편치 않았으니까. 내가
불법으로 클럽에 다니는 걸 알면 난 어차피 해고 당했겠죠. 하지만 난 돈이 절실히 필요했
기 때문에 해고를 당하면 다른 곳에서의
재취업이 어려웠기 때문에 별 다른 도리가 없었어요.”
그가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었지만 그녀는 그 소리에 더 괴롭웠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빌었지만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 눈물도 가증스러워. 이젠 끝이야.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계약은 내가
깬 거니까 몸 팔고 받은 돈은 돌려 주지
않아도 돼. 그리고 회사도 나오지 마. 그 가면같은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보희는 몸을 끌어 안았다. 그가 그녀의 가슴에 비수가 되는 말을 하는데도 그녀는 그에게
눈물로 호소해 보았다.
“미안해요. 이렇게 빌게요. 제발.”
“내가 용서해도 우리 관계는 섹스일 뿐이야. 뭐가 달라지지?”
그는 그녀가 애걸하며 잡은 팔을 뿌리쳤다.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그녀의 눈물 때문에 그의 시야가 흐려진 듯 그녀의 눈동자 색깔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흔
들리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그 말도 믿지 못해. 이제 회사가 내 손안에 들어오니 2억은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지. 더
큰 걸 바라는 거라면 착각한 거야. 당신은
내 돈을 즐긴 것 뿐이야. 당신한테는 더 이상 투자할 가지가 없다고.”
“아니예요. 아니예요. 진심이예요. 사랑해요.”
그녀는 멀어지는 그의 등에 대고 외쳤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세민이 얼마 뒤 나와 땅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그녀를 안아 주었다.
“어떡하지.. 이젠 저 사람 밉살스런 말도 못 듣고 얼굴도 못 보고...”
너무 울어 힘이 빠진 채 세민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울먹였다.
“잊어버려. 내가 애초에 안된다고 했잖아.”
“잊으라고... 그게 가능하니? 어?”
그의 가슴을 때리며 다시 통곡을 하듯 눈물을 쏟는 보희가 걱정스러웠고 결국 또 보희는 기
절을 했다.
잠을 자고 나면 잊혀질까?
태석은 서울로 오는 내내 운전을 어떻게 하고 왔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이 마비되었
었다.
자신의 머릿속을 온통 뒤덮었던 두 여자가 실상은 한 여자라는 사실이 그에게 더 할 수 없
는 쓰디쓴 기분을 맛보였다. 한 여자였기에
그가 그렇게도 두 여자에 대한 감정으로 혼란스러워했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동거녀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에 그녀에게만 잘하려 애썼던
것을 생각하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수호가 두 여자가 닮았다 했을 때 그는 무시하고 넘어 갔었지만 바보같이 자기만 몰
랐던 것이 화가 났다. 알았었다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그가 당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었다. 하지만 태석은 그냥 모르는 척 지나쳤다. 그때 조금만
신경을 썼었다면 아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동생인 세민은 보희의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질투했던 사실 조차 기
가 막혔다.
태석은 매일 집에 들어가자 마자 집안에 있는 술이란 술을 다 마실 생각으로 계속 술만 마
셔댔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가 않고 정신만
더 뚜렷해지면서 보희의 얼굴이 아른거리고만 있었다. 자신을 속인 여자에 대해 더 화를 내
고 소리를 질러야 했지만 그녀와 함께 한
시간들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보희의 짐을 전부 꾸려서 밖에 내 놓았다가 다시 집안에 들였다. 그녀 냄새가 난다. 침
대에 누워도 욕실 안을 들어가도 그녀
냄새가 은근히 베어 있는 듯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보희는 인사과에 사표를 직접 내고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다른 비서 없이 혼자 일
을 처리하고 있었고 그를 모함한 황회장의
결정적인 단서를 찾지 못해 힘든 상황이었다. 곧 있을 주주총회에서 황회장은 완전히 태석
을 매장하려 들 것이다. 그 전에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런 일과 보희의 일이 겹쳐서 태석이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수호는 태석의 상황을 알고
나서 당황해 했다. 비슷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수호도 그 일은 놀랄 만한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일주일 후 태석에게 뜻하지 않은 방문객이 찾아 왔다.
보희의 동생이라는 세민이 찾아 온 것이었다.
“반갑다는 말은 못하겠군요.”
태석이 그의 사무실에 들이 닥친 세민에게 한 말이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석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우리 누나가 일부러 당신을 속였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당신이 끼어 들 문제도 아니고 지금으로선 보희를 다시 볼 생각은 없소.”
“이건 내 문제이기도 해요. 누나가 클럽에서 일할 때 지저분하게 구는 손님들이 많았죠. 내
가 클럽에 일을 나가기 시작하면서 누나가
그런 고초를 격으면서 일하는 것에 항상 마음이 무거웠어요. 그런데 몇 달 전 술이 심하게
취한 남자가 누나를 때리고 욕하면서 막나가는
여자 취급을 하더군요. 그때 당시에 나는 화가 났고 참을 수 없어서 그 남자를 흠씬 두들겨
패 줬는데 재수없게도 변호사를 건드렸어요.
합의금으로 팔천만원을 부르더군요. 난 그냥 감옥가고 말테니까 누나에게 그냥 있으라고 했
지만 누나는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든 날 그렇게
두려 하지 않았고 내가 유치장에서 나오던 날 당신과 동거하게 되었다더군요. 우리 누나는
가족을 위해 7년을 희생했어요. 가족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버릴 사람이었다고요.”
세민은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며 말을 했다. 하지만 태석은 냉담했다.
“누나도 그러더군. 하지만 날 가지고 놀았어. 그건 부정할 수 없지.”
“그건 당신 생각이겠죠. 누나는 그만 두려 했고 당신은 말렸으니. 당신하고 같이 사는 여자
가 나예요. 그러니까 해고해 주세요.
이럴까요?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어요?”
그가 태석의 멱살이 쥐어 잡았다.
“불쌍한 우리 누나를 가지고 논건 당신이야. 집안의 모든 일을 떠맡고 정신이 왔다갔다 하
는 어머니 요양비에 동생 뒷바라지하는 누나의
삶을 당신이 알아? 누나는 단지 자신을 희생하면서 당신에게 간 건데 지금 당신은 그 눈속
임에 스스로 들어와서 이제 와서 임신한 여자를
내쳤잖아, 안그래? 최소한 구질구질한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이걸 전해 주라고 하더군. 생
각 같아서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었지만
당신을 생각하는 누나의 마음을 봐서 참았어.”
그는 태석의 멱살을 놓고 그 앞에 서류 봉투를 던졌다.
“나야 말로 당신이 내 누나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제 누나도 당신이라면 치가
떨린다고 하니까.”
그는 태석의 대답도 듣지 않고 사무실 문을 부서져라 닫고 가버렸다.
태석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이 몽롱했다. 태석은 세민이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보희가 임신했다는
말이 정말 사실일까? 그는 피임을 한번도 안한 적이 없었다. 항상 피임을 했다. 그렇게 해야
뒷 탈이 없다는 그의 신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피임을 했었다는 생각에 혹시 정말 보희가 딴 남자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 머리 속에 번개처럼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일본 출장 당시 갑작스런 두 사람의 사랑 행위에 미처 피임을
할 생각을 못했었다. 혹시 그때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는 지금 상황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허탈감에 빠져 있었다.
세민이 그에게 주고간 서류 봉투를 열어 보았고 그가 준비해 오던 일본 회사와의 프로젝트
서류들과 계약서 등 기밀 서류가 들어 있었다.
결국 양심에 찔려 일이 들통나자 사무실을 턴 범인이 보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얀
봉투를 발견하고는 그 안의 내용물을 읽었다.
‘당신을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였어요. 너무나 절박한 상황이었고 당신이 내 상관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당신이 접근해 오는 것이 너무
싫었죠. 내 직업이 탄로나면 회사에서 해고될 테니까 당신의 그런 제의는 받아 들일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당신에게 말했듯이 당신
아니면 그런 돈을 구할 수 없었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두 번 다시 당신 앞에 나타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이 서류는
황회장의 사무실에 있는 비밀 금고에서 빼낸 거예요. 그 금고는 황회장과 황상무 밖에 모르
는 곳이예요. 우연히 제가 보았고 서둘러
잠그는 것을 보아서 그때 비밀 번호도 외우고 있었죠. 혹시나 해서 사람들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몰래 빼 온 거예요. 아마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난리가 났을 거예요. 그 밖의 서류들은 지난 번 주가 하락되었을 때 황회장이 주
식을 몰래 매입한 증거들이예요. 회사를
당신이 다시 찾았으면 좋겠네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미안해요.’
태석은 자신의 손안에 있는 편지지를 구기며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이 너무 혼자만의 착각
에 빠져 진실을 보지 못하고 또 암울한 가면
속에 숨어 울던 것은 아닌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 날 밤 태석은 수호와 상의할 것이 있어 클럽에서 만났다.
“이 서류들 다 어디서 났어?”
“그건 알 거 없어.”
“황회장 완전히 쪽박 차게 생겼군. 내일 모레 있을 주주 총회에서 널 낚으려다가 지가 낚
일 거다 아마. 이런 엄청난 비리가 폭로되면
아마 혈압으로 쓰러지는 거 아냐? 벌도 못 받고 하직하면 안 되는데 말이야.”
“내 주식은 잘 있겠지?”
“이 자식은 주식 맡겨 뒀냐? 걱정마. 애들하고 부모님들이 너한테 적극적인 협조를 해주고
계시니까. 워낙 분산되어 있어서 지금
대주주들한테 밀리지만 위임장을 너한테 넘기면 똑같아지는 거지. 다른 주주들은 황회장의
비리를 알면 등을 돌려 경영권에서 쫓아내는 건
이제 식은 죽 먹기다.”
“그래, 벌써 기대되는구나.”
태석이 무리하게 술을 먹기 시작하자 수호가 말렸다.
“이러다가 네가 먼저 가겠다. 작작 마셔. 속이 상해도 그렇지. 죽을 일 있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정말 괜찮다고 생각한 여자가 뒤에서 내 머리를 심하게
때렸는데 말이야. 근데 왜 이렇게 괴롭냐?”
웃고 있지만 눈이 싸늘했다.
그들이 온 걸 알고 클럽 사장인 지우가 들어왔다.
“오랜만이다. 태석아, 보희씨는 잘 있냐?”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나도 몰랐는데.”
“저번에 술 마시다가 알았지. 내가 안 게 불만인가 보구나. 눈에 힘 빼라.”
그가 술을 한잔 따라 주며 웃었다.
“세민이란 놈하고 보희랑 남매지간이란 것도 알고 있었어?”
“보희씨가 소개 했으니까 당연히 알았지.”
“근데 왜 나한테 말 안했어?”
태석이 너무나 화를 내며 분통을 터트려서 지우는 좀 얼떨떨했다.
“난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우는 무슨 일이냐며 다른 남자들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다들 설레설레 하면서 모른척하라
고 했다.
“보희씨 잘 있냐고 물었잖아.”
“잘 있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수호가 지우에게 그만하라는 손동작을 해 보았지만 지우는 못 보고 태석만 보았다. 무안한
수호는 손을 금방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말 그대로야. 약아빠진 계집같은 것 이제 신경끄기로 했으니까 형도 묻지 말았으면 좋겠
어.”
“이 자식, 불쌍한 여자보고 약아빠졌다니?”
“그렇게 불쌍하면 형이 데리고 살지 그랬어? 그래도 형수보다는 덜한가 보지?”
지우가 결국 태석의 뺨을 때렸다.
“정신차려. 네가 정말 보희씨의 일에 대해 몰라서 그러는 거야?”
“몰라.”
“바보같은 놈. 좋아하는 게 눈에 띄는데 멍청하게 있을 건 뭐야.”
“날 속였다고. 형이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군. 한 번만 더 내 얼굴 때리면 그 때는 형이고
뭐고 없어.”
태석이 일어나려 하자 지우가 말렸다.
“앉아.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보희씨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아서
얘기는 해 주지. 자기 얘기를 잘 안하는
여자지만 그래도 동거까지 하는데 너한테 얘기 할 줄 알았는데 안 했나 보군.”
그가 태석의 술잔에 술을 부어 주고 말을 이었다.
“내가 불쌍하다고 하는 건 그녀 어머니가 결혼을 네 번 하셨단다. 근데 모두 돌아가셨다고
하더군. 그래서 정신적인 충격으로 자식들도
못 알아 보고 현실도피만 하셨지. 거기다 심장도 몹시 안 좋았다더군. 그 상태로 동생을 낳
으셨는데 아이 엄마가 되시기에는 문제가
있으신 분이시라 정신병원에 있다가 보희씨가 일을 이쪽으로 옮기면서 요양소로 옮기셨어.
동생들의 부모가 되어야 했고 막내 동생이 너무
어려서 세민이랑 둘이 엄마 아빠가 되어 주었다더군. 그러다가 세민이 일을 크게 쳤어. 내가
그 자리에 없어서 일이 더 크게 벌어졌고
사실 내가 돈을 빌려 주려 했지만 거절하더라. 집사람이 예전에 오해를 한 적이 있어. 보희
씨가 돌아가신 우리 엄마하고 너무 닮아서
내가 잘 해주려고 한 게 발단이었지. 보희씨가 나서서 우리가 이혼 안하고 이렇게 살지만
혹시 자신을 도와주었다가 이상한 오해가 생길까
봐 싫다더구나. 그렇게 남 배려 할 줄 알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여자가 세상에
많지 않아. 네가 너무 멍청한 짓을 하니까
말해 주는 거야.”
태석은 보희의 새로운 면을 들었다. 보희는 몇 달을 살면서도 그에게 가족에 대한 얘기는
짧게 했을 뿐 세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난
무엇 때문에 그녀를 용서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게 과연 그녀의 잘못이었을까?
보희는 어머니 장례식 이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었다. 태석에 대한 그리움이 사묻힐
정도로 가슴이 아파 왔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세민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민은 그녀가
병원에 다녀온 사실을 알아내서 언제 말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긴 했었지만 세민의 반응은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 무조건 지
우라는 쪽이어서 보희가 눈물을 쏟고 나서야
세민이 좀 누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못 마땅해 했다.
태석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앞으로 그를 볼 수는 없지만 보희는 이 아이를 낳을까하는 생
각을 어느 순간부터 갖게 되었다. 미워했던
사랑했던 태석의 아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가장 크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보희는 신문지상을 가득 메운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황회장의 모든 비리가 낱낱이
공개되는 장면을 보았고 혜성그룹 전 김석훈
회장의 아들인 김태석이사가 그룹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그녀의 소원
이 이루어진 것처럼 눈물이 났다. 그와 이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게 그녀에게 가장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후로도 태석에게서는 연락이 없었고 세민은 그녀를 닦달하며 잊으라고 했지만 쉽지 않
은 일이었다.
더 이상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했지만 결국 또 일이 터졌다. 츠량의 어머니가 몹시 위독하
다는 소식이 접해졌고 츠량이 울고불고 난리치며
어떡하면 좋으냐는 것을 보희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츠량은 세민이 같이 슬퍼하며 자신을 위로하는 그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트렸다. 결국 보희
는 그녀에게 다시 중국으로 밀입국을 하라고
했다. 정식 출국을 했을 때는 그녀는 범죄자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보
희는 배편을 알아보았고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다.
문제는 세민이었다. 세민은 츠량이 지금 돌아가면 못 돌아 올 것처럼 굴며 자신도 가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네가 거길 왜 가려는 거야?”
“누나, 나 츠량이 좋아. 정말이야. 동생으로서의 감정이 아니야. 그동안 츠량이 불편해 할까
봐 그녀한테도 고백한 적 없었어. 그녀랑
같이 중국에 가서 거기서 결혼하고 싶어.”
“너 미쳤어? 네가 몇 살인데? 너 학생이야. 앞으로 공부를 얼마나 더 할지도 모르는데 덥
썩 결혼부터 하면 어쩌자고. 게다가 쟤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야. 문화 자체가 틀린 아이야.”
“누나, 난 확고해. 그런 문제는 내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고 이렇게 불안하게 사는 츠량
을 볼 수가 없어. 누나만 허락해 주면 돼.
누나 부탁이야.”
츠량과 세민, 그 둘 때문에 몇 일간 분위기가 싸늘했고 서로 설득을 하다 하다 결국 보희가
지고 말았다. 국제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쉽지만은 않은 생활이었고 어린애들이 결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안하
기 그지없었다.
일단 보희는 츠량이 한시가 급한 때라 먼저 중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츠량은 보희의 배려에
너무 감사해하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세민은 여권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항구에서도 서로가 얼마나 떨어지길 아쉬워하는지 그동안 자신이 왜 둘이 사이를 몰랐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 둘 때문에 속상하긴 했지만
잠시나마 태석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태석은 회사가 어느 정도 다시 원상복귀 될 때까지 정신 없는 날을 보냈다. 그래도 밤에는
보희에 대한 생각에 밤잠을 설쳤고 그렇게
매일이 반복적이었다.
그는 아마 보희에게 오히려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그는 울면서 애
원하는 그녀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그녀를 사악한
여자 취급을 하고 손까지 댔었다. 아마 그녀는 그의 사과를 받으려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태석은 그동안 자신이 보희를 못 살게 군 것을 많이 반성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이 다시 올
바르게 돌아오자 항상 그녀와 있던 시간들이
떠올랐고 그의 생활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 가고 싶었
지만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아 힘들었었다.
그는 그녀에게 애써 숨겨 왔던 감정을 완전히 받아 들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쉽진 않겠지만
청혼을 할 생각으로 반지도 샀다. 그는
전화도 일체 받지 않는 그녀를 직접 찾아 갈 생각으로 집으로 찾아 가 보았다.
긴장하며 문을 두들겼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을 두들기다가 소란해서 인지 옆집에
서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말쑥한 그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누굴 찾아요?”
“예. 최보희씨라고 이 집에 사는 아가씨를 만나려고 왔습니다.”
그녀가 문에서 누군가를 불렀다. 곧 어린 여자 아이가 나왔다. 이목구비가 보희와 많이 닮아
서 그는 보희의 동생인 것을 알았다.
“우리 엄마 집에 없어요.”
“어디 가셨니?”
그 아이와 시선을 마주치려고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았다.
아이가 옆집 아줌마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애 아버지가 공항 갈 일이 있어서 별이 맡겨 두고 데려다 주러 갔어요.”
“언제 갔습니까?”
“한시간 정도 지난 것 같네요.”
태석은 별이와 옆집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한 후 서둘러 공항으로 출발했다. 그 길을 가는
내내 그의 마음이 초조했다. 그녀를 기다릴 수
있었지만 그 시간 동안 초조한 자신의 맘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이렇게 공항으로 가는 것이었
다.
그녀와 처음 접했던 것이 생각이 나며 새삼스레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쳤다. 너무 예뻤던
그녀를 보고 그는 한 눈에 반해 버렸고
그때까지도 확실한 감정이 있지는 않았지만 지금만큼 확신에 찼던 적은 없었다.
공항에 아무렇게나 차를 대고 뒤의 호각 소리도 무시하고 공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말
이라 엄청난 인파가 공항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철이라 해외로 피서를 가려는 사람들로 엄청나게 붐벼서 그녀를 찾기에
는 힘들 것 같았다.
일단 중국행 비행기 출국장 쪽으로 가서 기다렸다. 그녀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주변
을 돌아 다녀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십 여분쯤 돌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려는데 출국장 앞에서 보희가 세민을 배웅하며 서
있었다. 그녀가 뭔가 작은 상자를 꺼내 보여
주는 것이었다.
“결혼하는데 반지가 없으면 안 되겠지?”
반지를 보며 세민이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정말 고마워 누나. 누나한테 잘 할 거야.”
“잘 살면 됐지. 어서 가 봐. 조심하고.”
세민이 손을 흔들며 티켓을 제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보희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 앞에
서 움직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오랫동안 가는 것도 아닌데 보희는 좀 허전함을 느꼈다. 일가친척이 없는 그들로서는 오히
려 간단하게 하는 결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축복할 수 없는 곳에서 그들끼리 결혼한다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세민이 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던 태석은 그녀가 움직이길 기다리며 자판기 커피를 한잔 뽑
아 들고 그녀에게 다가 갔다.
처음 그녀에게 다가가던 그는 그녀와 충돌을 했었다. 보희는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한 발자
국 움직였다. 첫 만남에서는 둘이 커피를 뒤집어
썼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에게는 커피를 단 한 방울도 묻히고 쉽지 않았다. 헬쓱해진 그녀
의 얼굴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세민이 떠나는 것을 안쓰러운 듯 출국장만 바라보며 뒷걸음질로 걷고 있었다. 태석은 그녀
가 움직임과 동시에 자신도 움직였다. 그녀와의
충돌로 쏟아지는 커피가 행여 그녀에게 닿을 새라 그쪽으로 컵을 옮겼다. 회색 정장 위로
뜨거운 커피를 쏟고 순간적인 느낌에 소리를
질렀다.
“앗, 뜨거워.”
보희는 저도 놀라 소리쳤다.
“죄송해요. 이...”
하지만 그녀는 곧 그의 얼굴을 보았고 말문이 막혔다.
얇고 시원한 파란 원피스를 입고 틀어 올린 머리에 자신을 쳐다 보는 녹색 눈동자가 그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밤마다 그를 괴롭힌 눈동자였다. 그가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는 막상 그런 그녀가 자신의 앞에 서 있자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지 몰랐다.
“여긴 무슨 일이죠?”
그녀의 말이 떨려 왔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런 옷을 다 버렸군. 그러니까..험..세탁비 대신 커피 한 잔 하겠소?”
“무슨 말이예요?”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생각만큼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빤히 쳐다 볼 뿐이었다.
“그러니까...내가 잘못했고 아...아기 말인데. 내 아이가 확실한데 아빠 없이 키우려면 혼자
힘들겠지?”
“어떻게 알았죠? 이 아이는 내 아이예요. 아빠...는 필요 없어요.”
보희는 그가 아이 때문에 그런 거라 생각하자 속이 상했다.
“내 아이이기도 해. 나랑 결혼해줘. 내 말은 그러니까...미안했소. 내가 당신의 가면극에 끼
어 든 관객인지 모르고 내가 가면극의
주인공인 것처럼 행동했어. 당신의 진실을 듣지 않고 내 생각만 했고, 또 당신을 무시하고
멸시한 점 정말 미안해. 내가 미쳤었나 봐.
당신 같은 보석을 못 알아보고 멍청하게 딴 짓만 하고 다녔어. 용서해 줄래?”
그가 바지 주머니에서 반지 상자를 서둘러 꺼내 그 안의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너무 예쁜
다이아반지가 광채를 띠고 있었다.
“진심이야. 나랑 결혼하자.”
보희는 그의 눈을 보며 진심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수도
없었고 그의 눈에서 어떤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베일에 쌓인 듯한 눈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미안해요. 자신이 없어요.”
보희는 그에게 등을 돌려 서둘러 걸어갔다. 태석이 따라오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벌써 포기한 것이라 생각을 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건지 속이 상했다.
“사랑한다. 최보희. 정말로 사랑한다.”
어떻게 걷는 건지 잊어 버린 듯이 못이 박혀 서 있었다. 그가 한 말인가?
“사랑해.”
사람들이 쳐다 보든 말든 그가 고함치듯 그녀 뒤에 소리를 질러 보았다. 보희가 뒤도 돌아
보지 않아 태석으로서는 답답했다. 그녀를 영영
놓칠 것만 같았다.
그의 고백에 눈물이 바보처럼 계속 흘러 내렸다. 결국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가려 울어 버
렸다. 그녀의 통곡에 주위 사람들이 놀란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태석이 급히 뛰어왔다.
“미안해.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 이런 거라고 미처 몰랐었어. 당신의 사랑을 거짓되게 만들
었던 내가 너무 죽일 정도로 미웠어. 당신이
용서하지 않을까 봐 겁이 났고 당신 생각에 밤잠 설치고 고민했어. 나랑 결혼하자. 아니 꼭
해야 돼. 사랑해.”
그의 품에 안겨 실컷 울고서야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 눈을 피하는 내내 얼마나 괴로웠는지 몰라요. 날 싫어할까 봐 겁이 나서 하루도 편
하지가 않았어요. 날 정말 용서해요?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해도 되요?”
그가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너무나 참아 왔던 감정이 그들이 자제력을 상실시켜 버렸다.
주위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 소리와 박수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한참의 포옹 후에 정신을 차린 태석은 주위를 둘러보며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당신을 남들한테 보여 주기 싫어. 집으로 가자.”
“그래요. 가요.”
그의 품에 안겨 옮겨 가다가 생각난 듯 그를 보았다.
“별이? 우리 집으로 가요. 동생이 찾을 지도 몰라요.”
“옆집 아주머니가 잘 돌봐주고 계실거야.”
그녀의 걱정을 날려버리 듯 그가 해 준 말이었다.
지금의 그라면 응석부리며 살아도 될 것 같았다. 처음 받을 때의 미소처럼 따뜻해 보이지만
강인한 남자였다. 그녀의 힘든 짐을 나눠
가져 주고 그녀의 동생들을 부담없이 돌봐 줄 멋진 남편감이었다. 이런 남자를 얻은 그녀가
더 바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더 이상
연극이 필요 없어져서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녀는 더 바라는 마음에 그녀 배속에 있는 그들의 2세를 매만져 보았다. 그의 시선이 그녀
의 배로 느껴진다.
지금까지의 그녀가 한 희생이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계기였을 것이다. 그런 정신 없이 세상
을 살았다면 아마 그와 사랑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한 인연으로 바뀌어 있었을 수도 있었다.
사람이 한 가지 이상의 얼굴을 가졌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겠지만, 그녀처럼 사랑에 빠
진 사람이라면 그 가면의 정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 봐 준 태석이 있기에 이제 그 가면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가면도...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