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콘

고수 [배우]


지금 TV 속에서는
한 남자가 빗속을 뛰어가고 있고
한 여자는 허름한 여인숙에 누워
몹시 아파하고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영업이 끝난 약국의 유리창을 깨고
약을 찾아 여자에게 건네주고
여자는 약을 건내주는 남자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는
자기 자신이 아픈 것은 벌써 잊은 듯
서럽게 울고 있습니다.

사랑은 저런 것이겠지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서로를 희생하는 것
그러고 보면
전 사랑을 하기엔 아직 철이 덜 들었나봅니다

조금 전 저는 이 드라마를 보기 위해
채널을 돌리다가
문득 당신의 마음을
이렇게 내 마음대로 돌릴 수 있는 리모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못됐죠 저..
사랑을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하려는 건
이미 사랑이 아닌 집착일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전 그래도 당신을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리모콘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을, 당신의 생각을
당신의 마음을..

그런 리모콘이 있다면
전 제일 먼저 당신을 쇼파에 앉혀두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습니다.
전화기도 꺼두고 시계도 풀어버리고…
이 세상에 당신과 나 단 두 사람만이 존재하듯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말이에요
그렇게 조용히 차를 한잔 마시고
우리의 시간만큼이나 따뜻했던 차가
당신이 제 이름을 불러주는 버튼을 누르고 싶습니다
볼륨은 아주 작게…
이따금씩 그런 꿈을 꾼 적이 있거든요
잠들어 있는 제 귓가에 당신이 작은 목소리로
저의 이름을 불러
잠에서 깨어나는 꿈…
마치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오랜 잠에서 깨어 왕자님을 만나듯 말이에요.
물론 그 꿈이 깰 때는
눈을 뜨자마자 찾아 오는 허무함에
참 많이도 쓸쓸했지만
정말 그렇게 눈을 뜰 수 있는 하루는
도대체 얼마나 행복할까요

사랑하는 당신…
당신은.. 저에게 이렇게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존재랍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모든 것을 사로잡힐 수 있는 사랑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제가 그 중 한 사람이란 사실에
그저 당신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할까요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왜 제 심장은 당신을 생각하기만 해도
이렇게 두근거릴까요…?
혹시 제 심장이
저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당신은 저에게 생명 같은 존재인데
그건 너무 부담스러우시겠죠..
그래요 그렇게 제 심장을 제일 크게 뛰게 하는
당신의 미소..
당신의 그 미소를 볼 수 있는 버튼을 눌러야겠습니다
그리고 볼륨을 크게 높여서
사랑한다는 아름다운 말과 함께 듣는 거에요

생각만 해도 벌써 눈물이 흐르려고 하지만
이번엔 울지 않을 겁니다
당신을 마지막으로 봤던 그 순간에
세상이 온통 뿌옇게 보여서 많이 안타까웠었거든요
당신도 아마 저처럼 세상이 뿌옇게 보이셨겠지요

우리..그러니까 당신과 난 참 바보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그 순간이 마지막임을 알면서
만나고도 손을 한번 잡아보거나
얼굴을 한번 만져 보거나 안아보거나..
이 밖에도 참 여러 가지 행동들을 할 수가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바보들처럼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을까요
그 순간을 돌아보면 또 이렇게 세상이 뿌얘집니다

이제 그만 리모콘의 OFF 버튼을 눌러야겠어요
당신은 제가 우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셨고
난 당신이 싫어하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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