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tata BWV 147 Jesus, Joy of Man's Desiring

Bach
17세기 후반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악가를 탄생시킨 바흐의 가문은 200여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하였다.
중부독일 튀링겐에 있는 빵집 주인으로 치터(Zither:현악 기의 1종)의 애호가였다는 파이트(1619년 사망)가 바흐가문의 옛 조상이라 하며, 파이트의 장남 요하네스(1580?∼1626)가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증조부가 된다.
유명한 거리의 악사였던 요하네스의 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하인리히는 모두 작곡가였으며 수편의 작품이 남아 있다.
요한 제바스티안의 조부는 그 중 차남인 크리스토프(1613∼61)이며, 그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다.
장남 게오르그 크리스토프는 바흐 가문에서는 처음으로 교회합창단장인 칸토르의 지위에 올랐으며, 쌍둥이 동생 요한 크리스토프와 요한 암브로지우스(1645∼95)는 거리의 악사가 되었다.
그리고 암브로지우스의 막내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大바흐)이다.
그에게는 20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1710∼84), 차남 카를 필립 에마누엘(1714∼88),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1735∼82)의 3명은 음악사에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에마누엘과 크리스티안은 전자가 ‘함부르크의 바흐’ ‘베를린의 바흐’, 후자가 ‘밀라노의 바흐’ ‘런던의 바흐’로 일컬어질 정도로 전 유럽에서 활약하고 대바흐와 헨델을 정점으로 하는 바로크음악에서 하이든, 모차르트의 빈고전파로 음악사를 크게 전환시켰다

[생애]

요한 제바스티안은 중부 독일에 있는 루터파신앙의 중심지인 아이제나흐에서 거리의 악사인 요한 암브로지우스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당숙 요한 크리스토프의 오르간 연주를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10세 때 양친을 여의고,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집에서 살면서 독일 오르간음악의 전통을 익히게 되었다. 큰형의 가족수가 늘어나자 자립을 해야 했던 바흐는 1700년 봄 북독일의 뤼네부르크로 가서 그 곳 고등학교 급비학생이 되어 루터파의 교육을 받으면서 교회의 합창단원으로서 북독일악파의 다양한 종교음 악과 친숙하게 되었다.
170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 바이마르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근무하면서 연주경험을 쌓았고, 3개월 후에는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간 주자로 채용되었다.
오르간 주자는 오랫동안 희망하였던 자리였으므로 성능이 좋은 오르간이 설치된 새 직장에 서 그는 열심히 오르간 연주법과 작곡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성가대를 훈련시키는 한편, 과거와 당시의 대가들의 작품을 필사·연구하여 점차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유명한 라단조의 《토카타와 푸가》,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사랑하는 형에게 붙이는 카프리치오》 등이 이 시기에 쓴 작품들이다.

1707년 6월 바흐는 아른슈타트에서 같은 중부독일의 뮐하우젠으로 옮겨, 성브라지우스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전과 같이 열심히 작곡하면서 교회칸타타에도 손을 댔으며,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해 가을에 그는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그 후 13년 동안에 7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그 중 빌헬름 프리데만과 카를 필립 에마누엘은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결혼한 이듬해 바흐는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가, 궁정예배당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약 10년간의 바이마르시절에 그는 오르간 주자로서 명성이 높아지고 작품도 점차 원숙해져 대가로서의 풍모를 보이기 시작 하였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전주곡과 푸가》 《토카타》 그리고 《코랄전주곡》 과 같은 오르간작품이었으며, 따라서 이 시기를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부른다.
한편 그는 교회칸타타를 거의 매달 한 곡씩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궁정악단의 연주를 통해 비발디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악파의 음악을 알게 되었다.
바흐는 이탈리아의 협주양식이라는 새로운 작곡법에도 착안, 비발디의 협주곡을 오르간이나 쳄발로로 편곡하였다.
이것이 훗날 협주곡의 명작을 낳는 기초가 되었다.
1717년 말, 그때까지 궁정의 집안싸움에 휘말리기도 하고, 또 희망하고 있던 궁정악장의 지위도 얻지 못하자, 바이마르궁정악단에 싫증을 느끼게 된 바흐는 괴텐으로 이사하였다.
괴텐궁정악단의 지위는 새바람을 찾고 있던 바흐에게 가장 조건이 좋은 것이었으며, 그는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17인으로 구성된 궁정악단을 이끌어 가면서 자유롭게 작곡과 연주에 열중하였다.
좋은 환경과 풍족한 생활 속에서 창작에 대한 의욕이 높아진 그는 잇달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1720년에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자, 이듬해 35세의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를 새로 아내로 맞이하였다.
1723년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에 취임하여 죽을 때까지 27년간을 교회음악가로 보내게 된다.
그의 임무는 기악과 성악의 개인지도와 합창단의 훈련, 그리고 이 도시의 교회음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성토마스교회와 성니콜라이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성금요일에는 수난곡이 불려졌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 성이로다》 등을 포함한 140곡 이상의 교회 칸타타, 《마태오수난곡》을 포함한 몇 곡의 수난곡, 《마니피카트》 《크리스마스 오라토리 오》 《나단조미사》 등 많은 교회음악이 작곡되었다.
이 라이프치히시기를 ‘교회음악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옳지만, 사실상 그는 이 때 대학생의 연주단체를 위해 세속적인 칸타타와 클라비어협주곡도 작곡하였고, 만년에는 대위법작법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골트베르크변주곡》 《음악의 헌정》 《푸가의 기법》 등도 작곡하였다.
그러나 이 최후의 《푸가의 기법》은 급속히 쇠약해진 시력과 뇌졸중의 발작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결국 실명한 그는 7월 28일 오후, 복용해 온 약의 해독으로 급격한 전신 허약증세를 일으켜 별세, 성 요한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작풍]

바흐는 대략 17세기 초엽에서 시작되는 바로크음악의 총괄자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북독일의 북스테후데와 남독일의 파 헬벨의 오르간음악의 작법을 습득하였다.
다음에 코렐리와 비발디로부터 이탈리아음악의 명쾌한 협주양식과 풍부한 화성, 그리고 라틴적인 형식감을 도입하였으며, 륄리와 쿠프랭에게서 프랑스음악의 섬세한 건반작법과 대담한 프랑스식 서곡을 배웠다.
이러한 당시의 온갖 음악의 전통과 각 국민의 양식이 바흐의 천재적인 개성 속에서 융화되어 긴장도가 높은 독특한 음악을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바흐를 전통적인 보수주의자, 여러 양식의 총괄자로서만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겠다.
그의 작풍에는 베토벤이 낭만파를 예견하고, 바그너가 20세기의 음악을 예견한 것과 같이, 훗날 발생한 고전파의 양식을 암시하는 많은 특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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