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단 하나의 사랑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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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여기서 그를 보게 되다니.

비록 오래 전에 단지 한번 그를 만난 것뿐이었지만, 그의 모습은 새미의 가슴 깊은 곳에 각
인 되어 지워지지 않았다. 어디서든 첫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저  얼굴 선과 유연한 몸의 움
직임... 그가 틀림없다.

오늘은 자사제품을 뉴그린 백화점에 납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입사한지 석 달도 되지 않은 새미는 그녀에게 프리젠테이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믿어지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여 꼭 납품하고 말리라 다짐했지만, 그를 본 순간 어디론가
달아 나고 싶은 심정이 새미를 압도했다. 그가 뉴그린 백화점의 품평회 심사위원일 줄은 상
상도 못 했는데. 어떡하지...

새미는 긴 생 머리를 한 올도 빠짐없이 위로 올리고 유명 디자이너의 고급스런 아이보리 정
장 으로 세련되고 당당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차가운 외모 아래
숨겨 있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우아함과 자신감이 돋보이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를 본 순간 5분전의  자신감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지금 그녀는 금방이라도
무너 질 듯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심장박동이 터질 듯  빠르게 뛰고 호흡이 점차 거세졌
다.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어렵게 숨을 들이켜도 보았지만 땅이 회전하기라도 한 듯 눈앞이
뿌옇게 변하고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뉴그린 백화점의 심사위원은  새미의 라이벌 팀인  US의 의상을 심사하고  있었다. 다음이
(주)피 오레의 대표로 와 있는 새미의 차례였다.

드디어, 심사위원들이 새미의 앞에 서며  피오레의 의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서류를  들고
있는 금테 안경을 쓴 까다로워 보이는 중년의 심사위원이 질문을 던졌다.

"피오레라.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회사군요. 음.. 베이직은  괜찮고. 주로 타겟으로 잡고 있
는 층 은?"

"예. 저의 피오레는 ..."

새미는 심사숙고하여 선택해 가져온 샘플 중 하나를 들었다.  애써 호흡을 가다듬고 제품의
특 성을 자세히 설명하며, 밤새 준비해 온 말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반쯤 얼어 자
신이 제대로 답변을 하고 있는지 의식 할 수 없었다. 단지 시간이  지나 이 자리를 피할 수
있기만 기 도했다. 그가 자신을 알아볼까 감히 그가 서있는 쪽으로는 시선조차 돌리지 못했
다.

하지만 새미의 걱정과는 달리 그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피오레의 의상만 세심하
게 살피고 있었다.

잠시 후 심사위원들이 멀어져갔다.

이사진들이 지나가자 새미는 그때서야 한 숨 돌리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길을 지나가면 누구나 한 번은 뒤돌아볼 큰  키와 넓은 어깨, 좁지만 탄탄한 힙. 그가  입고
있는 양복은 일류 디자이너가 그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처럼 카리스마와 그의  독특한
섹시함을 한껏 살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악마의 화신인 양 온  몸에서 남성미를 내뿜으며
사라지고 있었 다.

5년 전, 단 몇 초만에 새미의 이성을 앗아갔던 매력은 아직도 변함이 없었다. 새미는 멀어져
가 는 그를 보면서 여전히 미친 듯이 떨고 있는 자신의 나약함을 저주했다. 괜히 나만 걱정
한 건 가. 날 못 알아보다니. 그럴 만도 하지. 겨우 하룻밤뿐인걸. 강석민...

새미는 그의 아파트를 도망치듯 나온 5년 전 그날 밤으로 기억을 더듬어 본다.

5년 전, 새미는 갓 스무 살이 넘은 전문대 의상학과 졸업반이었다.

집안 형편으로 원하던 학교는 포기하고 온 학교였지만 그토록 바라던 디자인 공부를 할 수
있 다는 열정으로 오직 학과 공부에만 매달렸다.

다른 친구들은 미팅, 술등을 즐기면서  고등학교 때 못해 본 일에  매력을 느꼈지만 새미는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흔들릴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학업과 아르바
이 트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고, 앞으로의 취직문제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날은 가장 친한 친구인 주희의 생일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모여 파티를 가졌다. 시간이 흐른 후 분위기가 무르익자 나이트로 장소를 옮
겼 다. 주희는 그냥 집에 가겠다는 새미를 고리타분하게 산다고 놀리면서 억지로 끌고 갔다.
입학 식 날에 있었던 과 모임 행사 때 와보고 처음인 곳이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새미였지만 친구들의 부추김과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로 벌써 여러 잔
의 술을 마셨다. 화려한 조명과 신나는 음악에 반쯤 취해있던 새미는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
자신 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눈빛을 떠올리면 새미는 아직까지도 몸을 떤다. 자신의 내면을 들킨 듯한 두려움마저 일
정 도로 강렬하게 이글거리는 눈빛이었다.

새미는 그의 눈길을 피하는 것은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덫에 걸린 것처럼 그
눈빛 에 꼼짝 못 하고 있자 그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 곡 괜찮죠? 저와 춤추시겠습니까?"

새미가 겁에 질린 듯 입술을 깨물며 눈을 깜박이자 그의 눈 속의 태울 듯한 이글거림이  따
뜻하 고 유혹적인 빛으로 변하며 싱긋 웃었다. 그 순간 새미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
을 내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런 곳에서 만난 남자와는 말도 하지  않을 새미이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그
때는 반쯤 미쳤나 보다. 음악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그 남자에 취해 그녀는 조금씩 자신을
잃어 가 고 있었다.

"새미씨. 잘 해냈어요?"

기억에 잠겨 있는 새미의 등을 치며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네?"

마케팅 담당인 조남우 부장이다.

부장이라고 하지만 전 인원이 열 명도 안 되는 벤처기업이라 서른이 갓 넘은 신출내기 부장
이 다. 이번 건에 회사의 사활이 달렷다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기에 조남우 부장의 얼굴에
도 아직 긴장이 가시지 않았다.

새미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석민과의 뜻하지 않은 재회에 놀라 혀가 굳은
탓 에 답변을 준비한 만큼 성실히 하지 못 했던 상황이 떠오르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글쎄요.. 워낙 쟁쟁한 팀이 많아서.."

새미는 자신이 없어 끝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어서 샘플을 정리하고 결과를 기다리고있는 회사로  떠나야 하는데 멍하게 서 있기만  하다
니. 제정신이 아니야! 하지만 여전히 몸이 떨려  자꾸만 손이 빗나갔다. 조금 전, 석민의 뒷
모습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조 부장은 옷걸이에 걸린 옷을 접어 상자에 집어넣으면서 말을 이었다.

"새미씨는 세밀하고 꼼꼼하니 잘 했을 거야! 큰 실수만 안 했으면 됐어요. 이번이 우리 회사
에 얼마나 중요한 기회인지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사실 이런 일류 백화점의 품평회에 참가
할 기 회가 우리 회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랬다. 피오레는 젊은 층을 주고객으로  하는 의류업체지만 역사가 5년도  되지 않은 신생
기업 이다. 차별화된 색상과 케주얼한 디자인으로 업계에서 좋은  반응은 얻고 있지만 대중
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 주로 소형 보세시장을 공략하며 주  거래를 하고 있다. 아직은 국
내 시장보다는 하청 주문 형식인 국외 수출이 회사의 총매출액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 일부 신세대에게 꽤 어필하고 있어 몇 년만 지난다면 톡톡
튀 는 개성과 세련미로 국내에서 알아주는 유명메이커로 성장할 잠재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
는 주 목받는 회사이다.

뉴그린 백화점에서 품평회를 연다는 정보를 듣고 신청서를 제출하기는 했지만 참가  승인을
받 을 줄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뉴그린 백화점은 국내에서  가장 큰 백화점 중의 하나
로 고급 스런 이미지를 최우선시 하는 일류 백화점이다. 국외의 유수 할인점이 한국에 상륙
하는 이때에 도전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성공하여 작년 업계 매출액 1위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러한 뉴그린 백화점에 납품만 할 수 있다면 일반인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고 고급제품
이 라는 이미지도 남길 수 있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더욱이 피오레는 시장잠
재력은 있지만 요즘 국내외의 전반적인 경기가 악화되어 매출이  떨어지고 있고, 하청을 받
고 있던 기 업이 몇 달 전 부도가 나는 바람에 주고객을 잃어 회사존폐의 위기에  놓여있었
다. 이런 형편이 었으니 뉴그린 백화점의 참가 승인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러기에 더더욱 새미는 이런 중요한 임무가 자신에게 맡겨졌을 때  믿을 수 없었다. 이 납
품에 성공만 한다면 회사가 당장 앞에 놓인 어려움을 극복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에
서의 자신 의 입지도 굳혀 어려운 집안  형편에 보탬이 될 수 있을 텐데. 일년  전에 사 년
동안 다니던 회 사가 부도났을 때 실직으로 인해 힘들었던 생각을 하자 덜컥 겁이 났다.

피오레는 지난 번 다녔던 회사와 비교하면  아주 작은 중소기업이었지만 기나긴 실직  생활
중에 겨우 얻은 회사였고, 이 곳에서는 전에 다니던 회사보다 필요한 인력이 부족하여 자신
의 디자 인을 상품화 할 기회가 조금이나마 주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이 잘못 되어 다
시 취직할 회 사를 알아볼  생각을 하자 앞이 깜깜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외국물을 먹은
유학파를 선호하기 때문에 이름 없는 중소기업 경력이 전부인 새미가 다시 직장을 얻는다는
것은 가망이 없었다. 일류대를 나온 사람들도 일자리가 없다고들 하던데.

이 회사도 일곱 달만에 아는 선배를 통해 겨우 얻을  수 있었다. 음식점 주방에서 밤낮으로
일하 시는 엄마. 내년이면 새한이도 대학에 보내야 하는데 아직 등록금도 마련하지 못한 상
태이다.

안돼! 세상에! 5년 전 그 날 일을 잊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이제 와서  다시 나를 기억조
차 못하는 석민 때문에 일을 망치다니. 이 무슨 악연인가!

"새미씨?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겁니까?"

조부장의 꾸짖음에 정신을 차린 새미는 자신이 다른 샘플 박스에 옷을 정리하고 있는 것을
깨 닫고 얼굴을 붉히며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이상한데, 품평회 때문입니까?"

조부장은 새미가 넋을 잃은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 그녀의 얼
굴을 자세히 살피며 되물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프리젠테이션에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거 감사드려요."

새미는 얼굴에 서린 긴장을 지우기 위해 괜히 조부장에게 환한 미소를 띄어 보였다.

"무슨 소리! 새미씨 같은 예쁜 아가씨와 함께 일 할 수 있어 내가 더 좋았습니다."

조 부장은 갑작스런 새미의 다정함에 놀라면서도 기쁜 듯 웃으며 새미의 어깨를 두드렸다.

바로 그 때, 어디선가 허스키한 저음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파고들었다.

"진새미씨! 오랜만이군! 나를 기억 못 하는 것은 아니겠지?"

헉! 이 목소리는... 설마!

새미는 가까이서 들려오는 석민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숨을 흠칫 들이 쉰 채 내쉬는 것도
잊고 빳빳히 몸을 세웠다. 한 순간 시간이 멈춘 듯 동작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움
직이지 않 았다. 새미의 귀는 5년이 지난 지금도 바리톤의 굵은 음색인 석민의 목소리를 생
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처럼 목에서 등줄기를 거쳐 허리까지 가벼운 전율이 스쳐 지나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미는 움직이는 동작 하나 하나를 슬로우 비디오로 찍듯 서서히 몸을 뒤로 돌렸다. 자신을
못 알아본 줄 알았던 석민이 품평회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새미는 멍하니 입
을 약간 벌린 채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차가운 열기를  발산하며 반짝이는 그의 눈과 마
주치자 새미 는 발끝까지 저미는 충격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석민은 팔장을 끼고 입구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검은 양복 정장의 세련미와 권위적일 정
도 로 강해 보이는 모습이 아울러져 결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었
다. 넓은 이마를 보이며 뒤로 넘긴 까만 머리칼, 타오르는  검은 눈동자. 마치 적을 향해 달
려들기 전에 기선을 제압하는 야생의 검은 사자처럼 보였다.

천천히 새미의 스마트하면서도 여성스런 모습을  위에서부터 감상하듯 흩어보던 석민의  한
쪽 입꼬리가 비틀어지며 위로 올라갔다. 순간 석민에게 넋이 빠졌던 새미는 그의 비웃는 듯
한 냉 소적인 웃음에 정신을 차렸다.

5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석민을 하루에 두 번씩이나 부딪치다니. 자신의 눈이 의심스
러 웠다. 여전히 그가 손만 까닥하면 달려갈 것처럼 넋을 잃고 바라본 조금 전 자신의 모습
이 떠오 르자 수치스러워 새미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쥐구멍이라도 들
어가고 싶은 당혹감에 석민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연
기처럼 사라질 수 만 있다면.

석민의 등장에 새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조부장은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새미씨. 누구? 아는 사람입니까?"

새미가 대답을 하지 않자 옆에서 조부장이 답답한 듯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뉴그린 백화점의 강석민 이사입니다."

조부장의 질문에 석민은 새미에게 향하던 시선을 조부장에게 돌리고 손을 내밀며  자신있게
자 신의 소개를 했다.

"예? 강석민이라... 아! 안녕하세요. 저는  피오레의 마케팅 부장인 조남우라고 합니다.  이번
납 품 때문에 왔죠. 새미씨와는 잘 아는 사이인가요?"

조 부장은 백화점 이사라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자기 소개를 하며 석민의 기분을 맞추려 노
력 했다. 이사라면 납품 결과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자리가 아닌가.

그 때서야 조부장의 존재를 기억해 낸 새미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야지  생각하면서
도 빨리 도망가고 싶은 심정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석민과 자
연스럽 게 안부인사를 나누는 자신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를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 다!

석민은 새미의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조부장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글쎄요... 어떤 면에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하지만 잊지  못 할
사이 임은 틀림없죠."

조부장이 아닌 새미가 듣기를 원하며 느릿하게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순간 새미는 시선을 들어 석민을 노려보았다. 뻔뻔스럽게, 조부장 앞에서 잊지 못할  사이라
니.

하지만 그녀를 향한 석민의 차가우면서 강한 암시를 지닌 도전적인 눈빛에 용기를 잃고 말
았다. 잠깐이지만 깊은 곳에서 작은 불꽃이 타오르는 섬광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생각
으로 석민 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던 악몽 속의 주인공이 환
한 대낮에 거리 를 걸어다니고 있어... 이건 악몽이야, 잠에서 깨면 없어질 악몽일 뿐이라고!

새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석민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석민은
그 런 새미의 동작을 즐기듯이 감상하며 여전히 그녀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조롱하듯 반짝이는 석민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새미의 속눈썹이 여성스럽게 파르
르 떨렸 다. 갑자기 석민의 눈빛이 짙어지며 약탈자처럼 번뜩였다.

새미는 석민의 강렬한 눈빛을 받자 온 몸의 신경세포가 생생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묘
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새미의 전신을 흔들었다. 미칠 듯한 숨막힘 속에서도 야릇한 기대감
이 배 근처에서 온 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빠진 듯 후들거려 견본품 상자에 팔을 기대고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구두를
내 려보았다. 그녀의 갑작스런 육체적 반응을 석민이 알아챌까 두려워..

석민은 여전히 새미에게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피오레의 샘플을 잠시 흩어보다 어깨
를 으쓱거리는 태도로 보아 의상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지나가는 말투로 잠깐 관심을
내비 칠 뿐이다.

"피오레라. 아직 벤처기업이죠? 하지만 샘플을 보니 튀는 색상과 디자인이 신세대에게는 꽤
어 필할 것 같더군요."

조부장은 이때가 기회라 싶어 열심히 회사 자랑을 하였다.

"네! 작은 기업이지만 벤처이기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있죠! 유행에 민감한 변화를 쉽게 감
지할 수 있죠."

조부장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고 석민은 새미를 향해 갑작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진새미양과는 너무 오랜만이라서, 차 한 잔 같이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안돼요."

조부장과 새미는 동시에 대답했다.

새미는 석민과 편히 차 마시는 자신을 그릴 수 없었다.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석민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새미의 거절에 한 쪽 눈썹을  치켜 떴다. 왠지 다분히 연극처
럼 보 이는 동작이었다.

새미는 자신을 미친 사람 보듯 바라보는 조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거절을 했다.

"저... 오늘 회식이 있어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당혹스러운데 함께 차를 마시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새미씨. 회식은 신경 쓰지 말아요. 사장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게요."

조부장은 석민의 눈치를 살피며 손까지 흔들어가며 황급히 새미를 말렸다.

"아닙니다. 회식이 있다면 참석해야죠. 다음에  분명 기회가 있을 겁니다. 진새미양!  다음에
다시 뵙죠."

석민은 새미에게 만나서 즐거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뒤
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나가버렸다. 하지만 등을 보이기 전  그의 눈 속에서 일어서는 차
가운 번 뜩임을 새미는 놓치지 않았다.

다시 보자고? 왠지 불길한 예감에 새미는 추운 듯 부르르 떨었다. 그의 뻔뻔한 암시에 열기
가 눈 녹듯이 사라지며 대신 오싹한 한기가 새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
는지 새 미는 무의식중에 석민의 뒷모습을 좇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뒷모습은 여전히 멋
있어. 먹이를 앞에 둔 호랑이 같은 카리스마적인 눈빛도 여전하고. 그의 곁에 있으면 주위의
모든 것은 빛을 잃는다...

"새미씨. 강석민이 누군지 몰라요? 왜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날리는 겁니까?"

조부장은 꾸짖듯이 소리치며 새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저 사람을 아세요?"

아직 예민해져 있는 신경을 무시하려 애쓰며 새미는 다시 샘플을 정리하면서 조부장의 대답
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 석민이 뉴그린 백화점의 이사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무리 승
진이 걸린 일이라 할지라도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새미씨가 강석민과 아는 사이라니 의외인데. 왜 강석민과  아는 사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
까? 나도 그 사람 소문은 들은 적 있어요. 하성그룹 셋째아들로 유학파라죠. 경기가 엉망인
요즘 같 은 때 고전을 면치 못하는 다른 백화점과는 달리 뉴그린 백화점이 승승장구하는 것
도 다 저 사 람 덕분이라지, 아마. 믿을 수 없군! 뉴그린 백화점의 실세를 새미씨가 알고 있
다니. 분위기로 봐서는 보통 사이가 아닌  듯 싶은데. 새미씨가 자신만만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군요."

새로운 정보에 놀라는 새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부장은 자신의 얘기를 계속 하였다.

강석민이 하성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니. 뉴그린 백화점도 하성그룹의 계열사 중의 하나지. 완
전 히 황태자잖아.

새미는 5년 전 잠깐 만났던 그가 '강석민'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 뿐 그에 대해 아는 것
이 없었다. 새벽에 낯선 오피스텔에서 깨어 보니 옆에 석민이 허리까지 시트를 두르고 벌거
벗은 채 잠들어 있었다. 순간  전날 밤의 생생한 기억이 스치자  혼란스럽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마주 하기가 수치스러워 도망치다시피 오피스텔을 빠져 나왔다. 그 후 그 충격에서 벗
어나기까지 너 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 때  그 모든 것이 여자를 홀리는 저 눈빛 탓이야.  내가
그렇 게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게! 저 망할  인간 탓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오랜 친구를 만
난 듯이 저 렇게 담담할 수 있지. 강석민에게는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있겠지. 그 날 일이....

함께 춤추자는 석민의 말에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멍히 앉아있는 새미에게  석민이
손을 내밀었다. 처음 새미가 석민의 눈빛에서 본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따스함이 스
민 열기였 다. 그 눈빛에 넋을 잃어 최면에라도 걸린 듯 새미는  석민이 내민 손을 잡고 홀
로 나와 그에게 몸을 기댔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혀 강석민의 어깨에 기대 몸을 흔들며  새미는 아득해짐을 느꼈다. 평
소 주량보다 많이 마신 술도 한 몫 거두었음이 틀림없다.

석민이 새미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면서도 반항하기보다는 자신의 온 몸에 흐르
는 전율에 몸을 떨 뿐이었다. 석민의 가슴에 놓인 새미의 손에 석민의 빠른 심장 박동이 느
껴졌다. 이 남자도 자신과 같은 심정이라는 생각에 새미는 더욱 황홀해졌다.

사람들이 홀로 나와 빠른 댄스 음악에 맞혀 격렬한 춤을 출 때야 비로소 새미는 음악이  바
뀐 것을 알았다.

여전히 석민의 몸에 기대고 있던 새미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석민의 눈을 보니 그 속에  알
수 없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금방이라도 불 살릴 것 같은 눈빛
을 본 순간 새미가 조금이라도 현명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갔어야
옳았다.

하지만 새미는 앞으로 다가올 일에 막연한 불안을 감지하면서도 처음 느끼는 흥분에 기대감
마 저 느끼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석민의 강렬한 눈빛에 사로잡힌 듯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석민과 소개를 하고 그의 동행과  새미의 친구들은 자리를
합친 후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석민의 오피스텔, 그의 품에서 깨어난 새미는 기겁하여 도망쳐 왔다.

악몽과도 같은 6주를 보낸 후 석민을 다시 찾아 그의 오피스텔을 방문하였을 때는 이미  다
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날 저녁, 새미는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회식에 참석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회사 사람들은 그 동안 모두 가족처럼 편하게 지내어  왔다. 새미가 프리젠테이션으로 긴장
한 것을 알고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부장만은 그런 새미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
았다.

자물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새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부엌이  달린 5평도 안 되는 작
은 방이지만 이 방도 피오레에 취직이 되어 월세로 겨우 얻은 방이었다.

그 전까지는 지금 유럽 유학 중인 주희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새미가 가지고 있는 옷
대 부분도 주희가 입다 지겨워 버리려 하던 옷이다. 사실  오늘 입은 유명 디자이너의 옷도
주희의 옷이다. 하루하루 살아남기에 바빠 패션 디자이너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패션
이나 유행 따위는 뒤돌아 볼 여지가 없었다.

벽에 쓰러지듯 머리를 기대고 앉아 두 눈을 감으며 휴식을  취했다. 오늘 하루는 더더욱 전
쟁처 럼 느껴진다. 이대로 땅으로 꺼져버렸으면...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새미는 오늘 같은 날은 누구와도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수화기를 받지 않자 전화벨이 끊기
지 않고 계속 울렸다. 끙! 누구지?

"진새미입니다."

어쩔 수 없이 기어들어 가는 작은 목소리로 전화벨을 받았다.

"왜 이리 힘이 없어? 프리젠테이션 망친 거니?"

쾌활한 음성이 수화기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소꿉 친구인 하겸이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 라지만 눈치 없는 것은 알아주어야 한다니까. 하
겸 의 타이밍 감각은 거의 제로 수준이야.

"그래... 저.. 하겸아! 나 지금 통화하고 싶지 않아. 내가 다음에 다시 걸게."

새미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하자 수화기 반대편에서  터져 나오는 큰 목소리가 귀를  울렸
다.

"잠깐! 그렇게 기운 없을 줄 알았어. 여기 너희 집 앞이야. 당장 나와."

하겸은 새미의 거절은 예상했다는 듯이 자기의 말만 마치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야! 김하겸!"

새미는 화가 나 소리를 버럭 질렀다.

"뚜뚜뚜"

이미 전화기는 끊긴 상태이다. 새미의 입에서 한 숨이 새어 나왔다. 한참을 전화기만 노려보
다 새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 할 수  없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천천히 방문을 나섰
다.

하겸과는 초등 학교 때부터 함께 지내온 친구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파산으로 힘들어 할 때,
직 장 일로 고민 할 때 등 언제나 곁에서 새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던 친구이다. '진지'와
는 거리 가 멀고 항상 농담과 분위기 메이커로서 인기가 많다. 군대  갔다 온 후 아직 대학
교를 다니고 있다.

방을 나오니 방문 앞에서 하겸이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새미에게 윙크를 했
다.

"누가 노처녀 아니랄까봐 방구석에서 바닥만 긁고  있냐? 아무리 얼굴이 무기 라지만  요즘
세상 에 부엌문은 활짝 열어놓고."

하겸은 가장 오래된 친구지만 한번도 새미의 방안까지는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새미의 병
적 일 정도의 남성기피증을 하겸은 잘 이해해 주고 있었고,  그러한 무언의 배려가 두 사람
의 우정 을 거의 15년 넘게 지탱해주는 고리가 되고 있었다.

새미는 자신이 빠져 나온 방문에 자물쇠를 채우면서도 하겸을 노려보았다.

"오늘 정말 피곤해. 너랑 놀아줄 시간 없어. 자칭 왕자인 너야말로 그 나이에 여자  친구 하
나 없어 매일 나를 괴롭히니?"

새미는 쌀쌀맞게 하겸의 말을 받아쳤다.  갑자기 누구에게라도 말싸움을 걸고  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오빠 같은 멋진 남자가 너에게 황금 갚은 시간을 내주는 걸 영광으로나 여기라고. 그만 얼
굴 좀 펴라. 눈 돌아간다. 가자!"

하겸은 새미의 손에서 열쇠를 받아들고 그녀를 대신해서 부엌문을  잠갔다. 새미의 앞에 서
서 우아하게 대문을 열고 그녀가 먼저 나가도록 비켜섰다.

"오늘은 아름다운 숙녀를 위해 소신이 모시겠나이다."

허리를 반쯤 숙이고 손을 앞으로 내민 채 하겸이 정중하게 말했다. 중세 시대, 아름다운  숙
녀를 위해 충성을 맹세하는 중세의 기사처럼 보였다.

"넌 정말 항상 네 식이구나."

새미는 앞서 나가며 여전히 뽀루퉁 해 있다. 하겸은 대문을  닫고 나와 새미의 어깨에 팔을
두르 며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실은 설레지?"

새미는 헛웃음을 치며 따라갔다. 너를 누가 말리니.

"그래. 심장이 멎을 정도니 제발 그 팔 좀 치워줄래?"

새미는 하겸과 나란히 길을 걷으며 생각한다. 석민의 기억 따윈 잊고 아무 생각 없이  살자.
이 미 5년의 시간을 석민의 그림자에 갇혀 살았잖아. 더 이상은 싫어!

새미는 길 건너편에 서있는 고급승용차 안의 누군가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
한 채 평소보다 과장된 몸짓으로 하겸에게 매달렸다. 차안의 남자는 이를 갈았다. 여전히 그
녀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스스로를 저주하면서.
****************************
2
며칠 후,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새미는 사장의 호출에 급히 사장실로 갔다. 사장실로  향하는
새 미의 심정은 착잡했다. 사장의 작은 사무실에는 장식장 하나 없이 설렁한 책상만이 자리
하고 있었다. 물론 몇 년 동안 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직원들 월급을 주고 남는 돈은 거의
전부 재 투자하는 단계라 아직 실내 인테리어까지 여력을 쏟지 못하고 있었다.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사장은 새미를  보자 서둘러 의자에 앉았다.
새 미는 불길한 예감에 책상 앞에 서며 긴장했다.

"새미씨. 어서 와요. 어제 품평회 결과가 나왔는데 후리상사에게로 돌아갔다고 하더군."

"그래요? 저... 죄송합니다. "

새미는 실망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혹시나  하는 작은 기대는
가지 고 있었는데... 너무나 죄송스럽고 앞날이 막막해져옴을 느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미안하다고 끝날  일이 아닌 거 새미씨도 잘  알잖아. 어음이 막혀 지금
회사 상태가 말이 아니야. 이번에 백화점 건이 유일한 기회였다구."

"......"

누구보다 회사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새미는 죄송스러움에 더욱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말 실례인 줄 알지만..."

사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새미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조부장이 그러는데 새미씨가 뉴그린 백화점의 강석민 이사를 개인적으로 잘 안다면서?"

갑자기 사장의 어투가 부드러워졌다.

"예?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냥 옛날에  잠깐 알던 사이에요. 아니, 안다고도 할  수 없어
요."

사장의 뜻밖의 말에 놀라 새미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사장은 손을 내저어 새미의 말을 가로
막 고 자신의 말을 계속 이었다.

"새미씨.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요. 처음부터  뉴그린에서 우리 회사에 품평회 제의를  했던
것이 믿기지 않았어. 우리 회사가 잘 알려진 회사는 아니잖아. 그때 백화점 쪽 제의가  진새
미씨를 프 리젠테이션에 내보내라는 거였어."

새미는 그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사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무슨 뜻이지? 설마?

사장은 애원하는 말투와 강압적인 눈빛으로 새미를 설득했다.

"조부장의 얘기를 들으니 그 조건이 이해가 가더군.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준 것이 다 새미
씨가 우리 회사에 있기 때문인 거 같아. 둘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는지 모르지만  도와줘요.
새미씨! 이번 기회만 넘기기만 하면 우리 피오레도 문제없어."

사장은 썩은 동아줄이라고 잡는 심정으로 새미에게 더욱 매달렸다.

"사장님. 아니에요. 사장님이 잘 못 아신 겁니다. 전 그럴 힘이 없어요."

석민과의 만남을 피하려 힘들게 변명하는 새미의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얼굴이 화
끈거 리듯 뜨거워지고 눈앞이 아득해지는 거 같았다. 만일 사장의 말대로 석민이 자신 때문
에 피오 레에 기회를 준거라면? 아니야. 석민이 왜 그런 일을... 아냐!! 석민을 다시 만난 이
후로 악몽은 계속 되고 있었다.

"제발. 새미씨! 한번 시도라도 해 봐요. 밑져야 본전이잖아."

새미는 사장의 간곡한 부탁에 말은 해보겠다고 약속하고 사장실을 나오면서도 다시  석민을
만 날 생각에 앞이 깜깜했다. 단지 5년 전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에 불과해서 이런 부탁을
할 사이 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다시 그를 마주한다는 생각만으로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이제 와서 그에게 찾아가 피오레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면 나를 얼마나 뻔뻔
한 여자로 알까. 혹 5년 전 일을 빌미로 협박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번  품
평회를 망친 것도 모두 나의 프리젠테이션에서의 실수 때문이라면... 책임을 질 사람도 나밖
에 없다.

무엇보다 피오레는 자금사정으로 여기서 주저앉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업이었다. 국내 경기
악 화로 하청을 주던 회사가 부도로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문제없었을 기업이고, 앞으로 2-3
년 정 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젊은 층의 감각에 맡는 인기메이커로 성장할 능력도 충분한
기업이었 다. 지금 피오레는 흑자 도산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마저 쫓겨난다면 더 이상 엄마를 볼 면목이 없었다. 다시 직장을 구하기
도 하늘에서 별 따기이다. 내가 원하는 디자이너로서의 삶은 앞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엄마 혼자 힘으로 새한이 대학교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무리였다. 비록 거절당한다 할지라
도 그냥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지난번 우리 회사의 디자인을 칭찬 한 것으로 보아 그 가
치를 설명한 다면 설득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이제 겨우 수습 디자이너 수준인 자신을 품평회 대표로 보내라는 백화점 쪽 제의가
자 꾸만 마음에 걸렸다. 석민이가 시킨  일 일까. 말도 안돼! 벌써 5년도  지난 일이고 겨우
하룻밤 뿐인걸. 절대 그럴 리 없어. 내가 피오레에서 일하는 것을 그가 어떻게 알았겠어.

너에게 더 이상 갈 곳도 없잖아. 두려워하지마. 5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 상처에서 벗
어 나지 못한 거라면 넌 바보야. 한번의 실수로 평생 겁에 질려 살거니. 엄마와 새한이를 생
각하자 고. 넌 디자이너로 성공하고 싶잖아. 이 회사가 마지막  기회야! 굳은 결심으로 마음
을 다지며 아니, 자신에게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며 새미는 뉴그린 백화점으로 향했다.  5년
전 하룻밤의 쾌 락으로 지난 시간을 죄책감과 아픔 속에서  살아왔다. 이미 너무나 많은 대
가를 치렀어. 더 이상 두려움과 도망은 나의 몫이 아냐!!

이사실 비서에게 면담을 요청한 후, 새미는 석민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점점 용기를 잃어갔
다. 지금이라도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피오레의 과거  매출액 자료와 성장 추세, 최
근의 디 자인 등 준비해온 자료를 다시 한번 검토해 보며 생각을 정리해 보려 노력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이 중요해. 조금이라도 재무 지식
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자료만으로도 피오레의 가치를  쉽게 깨달을 거야. 5년 전에
스쳤던 여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피오레의 대표로 이 자리에 있는 것임을 잊으면 안돼. 며
칠 전 프리 젠테이션 때처럼  긴장하고 기죽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둘 모두에게 유리한
계약을 성사시키 는 것 일 뿐! 새미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계속 중얼거리며 떨리는 가
슴을 진정시키려 애썼 다.

하지만... 새미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자료 화일을 구겼다.

석민과 마주할 수 없다는 회의감이  시간이 지날수록 새미의 머릿속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잘못 온 거야. 이런 일로 그를 찾아온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어. 그 날 차 한잔 마시자는 제
의도 거절 한 나를 만나 줄리 없잖아. 비웃음을 사지 않는다면 다행이지...

드디어 새미는 포기하고 가방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때 여비서가 쌀쌀한 목소리로 들어가라고 알려 주었다.

새미는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달래려 숨을 깊게 내쉰 후, 접혀진 옷을 털며 이사실로 들어갔
다.

이사실 문을 열자 정면으로 자신을  주시하며 책상에 거만하게 앉아있는  석민과 마주쳤다.
그의 뒤로 고상한 남색 빛을 띄는 유리창이 세상으로부터 사무실을 차단시키고 있었다.

석민은 긴 원목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지도 않은 채 거만하게 의자에 앉아 새미를 쳐다
보 고 있었다. 회색 자켓을 걸친 석민은 회전의자에 기대어 두 손을 깍지 낀 채, 뜻밖이라는
듯 새 미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모든 것을  가진 당당함과 이미
세상을 알아 버린 냉소가 뒤섞여 저항하기 어려운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세련된 자켓 사이로 뿜어내는 야성적인 힘과 거만함이 새미를 더욱 주눅들게 했다.

새미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하며 석민의 눈을 피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 속의
신 경이 마구 엉킨 듯해  잠깐이라도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문득 한번도 그와
대화다 운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저 이로 인한 회의
와 갈망 속 에서 살면서도 이번이 겨우 세 번째 만남이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확 트인 창 밖으로 한강을 지나가는 유람선이 보였다.  반대측면은 어두운 색상의 대리석으
로 되어 있고, 실내 구조는 현대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의  가구들로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세
련되고 중후한 미를 살리고 있었다. 벽에 미술작품이 걸려 있었고, 창가에 몇 그루의 열대목
이 놓여 있 긴 했지만 차갑고 사무적인 분위기에 인간미를 심어 주진 못했다.

새미는 자신이 사무보조원자리를 면접 보러온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애송이 같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나마 자신을 이 곳으로 이끌었던 용기조차 석민의 탐색하는 듯한 눈초리에 사그
라지는 것을 느꼈다.

새미는 158센치의 작은 키였지만, 완벽한 몸매를 지녔다. 어깨에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윤
기 나는 검은 머리와 유난히 하얀 피부에 약간 눈꼬리가 올라간 커다란 아몬드형 눈이 무척
매력 적인 얼굴이었다. 눈을 크게 뜨면  얼굴에 눈만 가득한 듯 보였다. 유혹하듯  튀어나온
작지만 도 톰한 입술이 오늘은 꼭 다물고 있어 고집스러워 보였다.

보랏빛 블라우스에 검은 색 정장을 걸친 그녀는 여성스럽고 너무나 작아 남자로부터 보호해
주 고 싶은 충동이 일게 했다. 사무실 여기저기로 헤매던  시선은 촉촉한 빛을 발하며 흔들
리고 있 었다. 새미는 불안한지 손목을 계속 비틀며 손가락을 쥐어짜고 있었다.

새미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석민에게 얼마나 매혹적으로 비치는지  알지 못했다. 석민은 자
신의 사무실 안에서 떨고 있는 새미의  모습을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양 뚫어지게  바라보았
다. 5년 동 안이나 내 꿈속을 점령하고 있던 여인...

저 여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무리 찾아도 어디 사는지 단서  하나 알아내지 못했을
때 차 라리 나의 환상이 아니었나  싶었지. 아니, 흔적은 남아 있었다.  침실 가득한 그녀의
체취와 향 기, 침대 위에 떨어뜨리고 간 목걸이... 그 목걸이 마저 없었다면 정말 꿈이었다고
생각했을 지 도 몰라. 아름답고 환상적이지만 덧없는 꿈처럼 새벽이 오자 사라져버렸지.  하
지만, 마침내 나 는 그녀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

길 잃은 양처럼 겁에 질려서...

후! 감상은 금물이다. 새미가 왜 나를 찾았는지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석민은 그
녀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은 바보 같은 자신의 충동을 비웃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울림을 숨기고 일부러 냉정함을 가장했다. 새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기가 지쳤다는
듯 그가 따분해하는 어조로 먼저 말을 건넸다.

"이 곳까지 친히 찾아와 준 것을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나를 찾아오기를 5년이나 기다렸지.
하 지만 이제서야 오다니, 너무 늦은 감이  있는 것 같군. 나와는 인사도 하기 싫어하는  것
같았는 데, 무슨 일로 왔는지 물어도 될까?"

새미는 끝내 함구하리라 맹세했던 5년 전  일을 꺼내는 석민에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 거렸다. 여전히 시선을 바닥에 두고 그의 눈과 마주치지 못했다. 이 완벽한 타인과  누
구보다도 가깝게 서로를 공유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저기... 그러니까... 그 때.. 아니, 잘 지냈어요?"

어? 이게 아닌데. 새미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석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분히 조작된
몸 짓으로 한 쪽 눈썹을 치켜 떴다.

"오우, 안부를 묻으러 온 거 였군."

느릿한 어조로 석민은 말을 이어나갔다.

"백화점에서 빼 먹었던 인사가 갑자기  생각나서 늦게 나마 예의를 찾으러  온 거였나. 5년
전에 도 작별 인사 없이 도망갔지? 이제 보니 어릴 적에 가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군."

새미는 비꼬는 듯한 석민의 말투에 놀라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조 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한  어조였지만, 석민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순간 새미는 숨을 흠칫 들이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5년 전 일을 그냥 넘어가
지 않을 생 각인 모양이다.

"내 가정 교육에는 아무 문제없어요. 나는... 말장난하러 온 게 아니라고요. 그 때는 너무 뜻
밖이 라... 저기... 제가 여기 온 이유는 회사 일로..."

예상치 못한 석민의 태도에 새미의 목소리는 약하게 떨리고 말더듬은 한층 심해졌다.

"말 더듬는 버릇까지 있다니, 고쳐야 할 습관이 많은데. 새벽에 야반도주하는 버릇은 여전한
가?"

석민은 갑자기 차가운 노기가 깃 든 목소리로 새미를 다그쳤다.  깍지 낀 손을 풀며 주먹으
로 책 상을 내리치려는 듯 강하게 쥐었다. 아침에 잠에서 깬 후 새미가 사라진 것을 알았을
때의 당혹 감과 분노가 떠오르자 아직도 화가 치밀어옴을 자제할 수 없었다. 더욱이 새미의
연락처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기막힘이란! 석민은 주먹 쥔 손의 힘을 빼
지 않고 움직이 지 않은 채 흔들림 없는 말투로 새미를 더욱 몰아갔다. 석민은 정중하고 사
무적인 새미의 가면 을 벗기고 싶었다.

"넌 그 날 처녀였어. 말해봐! 일부러 처녀성을 떼기 위해 나를 택한 건가?"

새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렀다. 핸드백을 쥔 그녀의 손가락이  뼈마디가 보일 정도가 하얗
게 변해갔다. 감히...

"함부로 지난 일을 들먹이지 말아요. 나에게  다가온 것은 당신이 먼저였잖아요. 마치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라고 몰아세우다니! 이 이중인격자!"

새미는 발끈해서 이곳에 온 이유조차 잊어버리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새미는 감히 입밖에
꺼 내기도 두려운 그 날의 만남을 심심풀이 땅콩인 양 계속 입에 담는 석민의 무심함과  비
열함에 화가 나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말았다.

사무실 안의 샹들리에 조명을 받아 화가 난 새미의 얼굴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새미를 바
라보 던 석민의 눈빛이 매혹 당한 듯 짙어졌다. 석민은 그 모습에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
았다. 자 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까만 머리카락이 조명 빛을  받아 반짝이자 야성적이도록 섹
시해 보였다. 분노로 반짝이는 눈,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과 약간 벌어진 입술. 그 입술 사이
로 빨라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돌연 사무실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뀐 것을 깨닫고 새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침묵
을 잘 못 오해한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이 곳에 온 이유를  말하기도 전에 쫓겨나는 거 아닐까.  마음 같아서는 뺨이라도 한
대 갈 기고 여기를 나가고 싶지만, 회사 사람들의 생계가 나에게 달려있는걸. 새미는 자신의
울컥하는 성질을 후회하며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기가 죽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했다.

"미안해요. 5년 전 일은 다  잊었어요. 그 날 일은 실수였고,  저는 너무 오래돼서 기억조차
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과거는 잊고 사무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성인이라고  믿어
요."

석민은 자리에서 느리게 일어나 새미에게 눈을 고정시킨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눈 동자가 한층 위험한 빛을 띄고 있었다. 이제서야 나타나  겨우 그 일이 실수였다고 말하
면 다인 가! 얼마나 많은 밤을 그 기억만을 끌어안으며 잠 못 이루었는데. 나는 그 밤을 묻
어둘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럴 리가! 필요하다면 기억을 되살리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어. 나는 아직도 그날 밤을 생
생 히 기억할 수 있거든. 너의 느낌이 얼마나 애절했는지."

애무하듯 석민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하얀 이까지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눈가까지
미 친 미소는 아니어서 눈에 어린 냉기를 지우진 못했다.

새미는 숨을 삼키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석민과의 재회가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이
런 식으로 그 날 일을 물고 늘어질 줄은 몰랐다. 할 수만 있다면, 해도 된다면  자리를 박차
고 나가 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 사람들, 우리 엄마, 새한이...

새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석민을 보고 겁에 질려 뒷걸음치며  말을 이었다. 석민에게 여기
온 용건도 말하지 않은 채 도망 갈 수는 없었다.

"제발 부탁해요. 나는 이곳에 공적인 일로 왔어요. 품평회 결과가 후리상사로 결정됐다는 소
식 은 들었어요. 우리 피오레는 아직 성장기에 있는 회사지만  몇 년 안에 업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기업이 될 거예요. 우리 회사의 제품을 파는  것이 절대로 당신의 백화점에 손해를
입히지 않을 거예요. 제가 준비해 온  자료를 보시고 한 번 고려  해 주세요. 우리... 친구가
될 수도 있었잖아 요."

석민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자신의 긴장도 지우기 위해 새미는 속사포처럼 쉬지 않
고 말을 했다. 새미는 그가 자신이 준비해온 자료를 잠깐이라도 보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
했다. 자료만 본다면 사무적인 분위기로 바꾸고 석민을 설득시킬 수도 있으리라.

"하하... 친구라..."

석민이 소리내어 웃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새미의 귀에도 공허하고 어색하게 들렸다.

"나도 그 날 밤 만남을 무어라 정의를 내릴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친구라고는 생각도 못했
는 걸. 우리는 그 날 친구라 할만큼 얘기는 별로  나누지 못했잖아. 그럴 시간이 없었지. 대
화 말고 다른 일에 너무 바빠서."

석민은 도망가는 새미를 비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소파에  앉혔다. 잠깐이지만 그녀와 닿
은 자신의 손에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만 뒤로 가고 의자에 앉지 그래?"

새미는 석민의 접촉에 흠칫 놀라면서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속으로 원망했다.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석민이 여기에서 나에게 폭력이라도 행사할까봐 이렇게 떨고 있니.

석민은 자신도 상석에 앉은 후, 옆에 있는 인터폰을 눌러 비서에게 차를 부탁했다.

"제발... 우리로써는 중요한 일입니다. 한 번만 읽어 봐 주세요."

얼굴이 빨개지고 화가 났지만 새미는 계속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의 조금 전의 말
을 못 들은 척하고 가방에서 준비해 온 자료를 꺼냈다.

"피오레에서 미인계를 쓰기로 한 건가. 하지만 이미 결정이 났어. 피오레가 장래성  있는 기
업이 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아직은 위험부담이 너무 많아. 우리 뉴그린은 최고만 쓰기로 유
명한데 자칫하면 그 명성에 누가 될 수도 있잖아."

어느새 석민의 어투도 사무적으로 변해  있었다. 석민은 새미가 내민  자료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거절했다. 왼 쪽 다리를 반대 편 다리에 꼬고 딱딱하게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새미
를 더욱 움츠려 들게 했다. 새미가 이 남자를 잠깐이나마  알았던 적이 있었나 자신에게 되
묻을 정도로 거만하고 차가운 모습이었다.  저런 어투와 고자세로 이사회에  참석하면 다른
이사들은 기가 죽 어 아무 말도 못 하겠는걸.

하지만 고압적인 분위기에 질 수는 없다!

"우리 옷을 보았잖아요. 질감, 색상, 디자인 모두가 최고예요. 외국 제품을 모방하는 다른 기
업 들과 비교해 볼 때 참신성과 아이디어만큼은 우위예요."

새미는 자료를 펼치고 사진의 디자이너를 가리키며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자신의 내면의 흔
들 림은 무시한 채.

"글세... 다른 이사들은 그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던데. 이것으로 이 얘기는 그만 하지."

석민은 새미의 열성에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새미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막막함을
느 꼈다. 그가 자료가 아닌 새미를 주의 깊게 살피며  새미의 열정적인 음성과 반짝이는 눈
빛을 음 미하고 있음을 새미는 눈치채지 못했다.

새미는 예상은 했었지만 석민의 무심한 태도에 질려 어깨에 흘러내린 머리를 세게 뒤로 넘
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카락이 날리며 은은한 향기가 석민이  코를 자극했고 새미의 입
술은 피라 도 맺힌 듯 서서히 새빨갛게 부어 올랐다.

새미를 바라보던 석민의 눈에 서린 냉기가 갑작스럽게 타오르는  열기로 변했다. 그의 까만
눈 동자에 번개 불 같은 섬광이 스치고 지나가며 석민이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거칠어지는
호흡 을 잡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나는 5년 전에 우리들이 시작했던 얘기를 하고 싶은데. 한번이라도 내 생각이 나던가?"

돌연 강렬하게 변한 석민의 눈빛에 새미는 온 몸에 스치듯 지나가는 야릇함을 느꼈다. 사무
실 안의 공기가 갑자기 더워진 느낌이었다.

새미는 잊고 있던 여성으로서의 자각이 깊은 곳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것을 무시하려 애쓰며
오 직 회사의 사활이 걸린 협상에만 집중하려 노력했다. 석민의 눈빛 하나만으로 익숙지 못
한 육 체적 동요가 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자 새미는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아직도 이 남자
에게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너 새미 맞니!

펼쳐진 자료를 접어 석민에게 건네는 새미의 손이 어렴풋이 떨리는 것 같았다. 석민의 질문
을 무시하고 새미는 부탁을 계속 했다.

"한 번만 계획서를 봐 주세요. 우리 회사에게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2년 정도만 넓게
본 다면 좋은 투자기회라는 것을 알 거예요. 제발..."

새미의 목소리가 애원하듯 들려왔다. 작게 기어드는 여성스런 음성이 석민의 귀를 간질이고
얼 어붙은 가슴까지 녹이고 있었다. 석민의 입술 언저리가 무언가를 참기 어려운 듯 실룩거
렸다.

석민은 새미를 한참 쳐다보다 졌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새미가 사무실에  도착한 후 줄곧
그녀 에게 향하던 눈길을 처음으로 서류로 돌려 자료를 받아들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석민이 서류를 보는 동안 침묵이  흐르고 새미는 불안한 지 다시  손목을 비틀기 시작했다.
이상 하게도 지금의 침묵이 조금  전 석민의 냉소보다 새미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연이라 도 한번쯤 다시 만나기를 기도하면서도, 혹 다시  만날까 두려움에 시달렸던 지난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스무 해 동안 지켜오던 새미의 신념을 한 순간 무너뜨린 바로 그 남
자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변함없이 그녀를 뒤흔드는 매력을 가지고.

자료를 살피는 석민을 훔쳐보며 새미는 여전히 그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연그럽게
흘 러내린 머리카락, 짙고 까만 눈썹, 윤곽이 뛰어난  이목구비에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긴
손가락, 육감적인 입술. 저 입술의 감촉이 어떠했지... 뜨겁고  부드럽게... 세상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사이 비서가 차를 내려놓고 나갔다.

시간이 꽤 흐른 후, 석민은 자료를 무심히 넘기며 지나가듯 물었다.

"애인은 있어?"

"예? "

석민의 갑작스런 질문에 놀란 새미는 새로 생긴 습관인 양 말을 더듬었다.

"아니.. 저 .. 지금은.. 그럼요. 제 나이가 몇인데요."

거짓말이었다. 새미는 석민과의 일이 있은 후 항상 남자에게 거리를 두었고, 집안을  이끌어
가기 위해 그 동안 남자를 사귈 시간이 없었다.

"성장 가능성이 많은 기업인 건  인정하지. 하지만 요즘 자금 사정이  엉망이라고 들었는데,
제품 을 생산 할 여유는 있는 거야?"

자신의 대답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회사사정으로 화제를 바꾸는 석민의 질문에  순간
당황 한 새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회사가 제품을 생산할 자체 능력이 있다면 뉴그린에 제품을 납품하는 대신  백화점 내에서
의 자리를 내줄 수는 있어. 우리 쪽에서는 자릿세와 관리비를 받는 거지."

석민의 절제되고 강한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울리고 있었다. 그는 자료를 내려놓으며,  새
미의 작은 움직임까지 헤아리려는 듯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순간 새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석민의 말을 되새긴 후에서야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야
호! 됐어! 새미는 재빨리 대답을 했다.

"감사합니다. 결코 실망시키진 않을게요."

새미는 자릿세와 회사의 현 자금사정을  계산해보며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고려해 보았다.
그 정도는 가능 할 거야. 안 되더라도 가능하게 만들면 돼!

새미는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느라 석민의 눈 속에 서린 위험스럽게 빛나는 단호함을 알아채
지 못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고요? 우리 회사의 형편을 고려해 약간의 시간만 준다면 우리 사장님은 어떤 조건
이 든 O. K할 거예요."

새미는 반쯤 성공했다는 안도감에 싱긋 웃기까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뉴그린의 자리라면
훨 씬 좋은 제안인걸. 계약상의 조건쯤은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된 이상 문제될 수 없어.

"아니, 회사간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둘 사이의 사적인 조건이지."

석민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내려놓으면 탐색하듯  새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 속
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고르게 울려 퍼지는 나른한 그의 목소리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

새미는 머릿속에서 빨간 경고 벨이 울리는 것 같았다. 사적... 조건? 새미는 주문에 걸린  듯
싸 늘한 예감이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난 5년 전에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여자에게 말없이 채인 적은 처
음이 라 늘 그 일이 끝내지 못한 엑스파일처럼 날 괴롭혔어."

석민의 어투는 바이어와 계약을 협상하듯 지극히 사무적이고 단조로웠다.

"무슨... 무슨 뜻이죠?"

새미는 입술이 바싹 마르고 온 몸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눈을 깜박거리며 얼른 혀로 입
술을 축이었다. 순간 석민의 눈빛이 까맣게 짙어졌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녀의 혀의  움직임
이 그의 몸에 스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런 뜨거운 열기에 휩싸이게  했다. 석민은 앉은
자세가 불편 한지 꼬았던 다리를 풀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한 달간의 시간! 쉽게 말해 백화점 자리와 새미의 한 달을 바꾸는 거지."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확신에 찬 어조였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새미는 점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심장박동은 미친 듯이 날 뛰기 시작했고 무언가 속에
서 막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품평회에서 요조숙녀처럼 서 있는 새미를 보고 놀랐지.  남자에게 무심한 직장여성의 표준
처럼 보였지만, 새미의 참 모습이 어떤지는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잖아. 사업상  계약이라고
생각 해 봐! 며칠 전에는 말조차 건네기 싫어하던 새미가 직접 나를 찾아온 것을 보니 이번
건이 새미에 게도 무척 중요한 일 같은데. 우리 백화점의 2층 20대자리를 빌려주겠어.  뉴그
린에서 옷을 파는 것만으로 얼마나 큰 광고효과와 이미지 쇄신이  되는 줄 알겠지. 그 대신
한 달간 5년 전에 못 끝낸 일을 마무리하고 싶어."

"그런 소리를 하다니... 진심일 리가 없어."

이제 새미의 얼굴은 분노로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몸 속의
피가 억류하는 것처럼 열이 올랐다.

"남자와 함께 보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처녀도 더 이상 아니잖아? 지금의 애인과는 손만  잡
나? 난 널 원해. 단 한 달간만! 더는 싫어."

석민은 눈을 번뜩이며 화가 난 듯 새미를 바라보며 말을  끝맺었다. 석민은 애써 무심한 척
하던 모습을 버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강렬히  타오르는 그의 눈빛만으로도 새미에게
는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왜... 그런 말을... 그건 겨우 하룻밤뿐이었잖아요?"

새미는 석민이 이건 깜짝쇼였다고 말해주길 원하는 심정이었다. 석민이 어떤 남자일까 많은
상 상을 했었지만 이렇게 야비하게 여자를 가지고 노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왜? 널 다시 보니 내가 그때  너에게 끌린 이유가 이해가 되더군.  너 역시 지금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잖아. 제길! 난 항상 널 잊을 수 없었어."

석민은 뱉어내 듯 한마디 한마디를 힘주어 거칠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새미를 내려
보 았다. 새미는 한번에 삼킬 수도 있다는 듯.

새미는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일부터 열까지 셌다.

"웃기지 말아요. 나는 거래 조건으로 내  놓은 물건이 아니에요. 당신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의 를 하다니 미친 게 틀림없군요. 그 날 일은 내 평생 최대의 실수였고, 그런 말도 안 되
는 일을 다시 반복 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당신처럼  여자를 쉽게 생각하는 남자는 질색
이야. 당신 은... 철면피야!"

모욕감에 새미는 석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이사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에 올라탔다.

아직도 흥분으로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날 어떻게 보고 그런 말
을 하는 거지. 내가 그 일을 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힘들어했는데. 그 때 일로 스스
로를 믿 을 수 없어 남자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이런 나를 감히 창녀 취급하다니.  자기가
백화점 이사 면 다인가. 백화점...  백화점? 백화점 자리를 준다고 했었지.  이런! 아니, 나는
최선을 다했어. 제 고할 가치도 없는 제의였어. 나를 팔 수는 없잖아. 아무리 힘들어도 굶기
야 하겠어!

새미는 쫓기 듯이 백화점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로 향했다.

멀어지는 새미를 석민은 이사실 창문을 통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창
에 얹은 두 주먹에 힘을 가득 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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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석민을 마지막으로 본 후 이틀이 지났다.

마지막으로 붙잡은 백화점 납품 건이 수포로 돌아가자 우울함이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지
구 최후의 날을 기다리듯 모두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하청을 맡긴 생산공장의 어음만기
가 다 가오기 전에 바이어를 뚫어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고비만 넘겨주
고 지금 미 국 바이어들과 추진 중인 협상에 성공한다면 위기를 발판 삼아 더 성장할 수 있
을 텐데. 단지 시간이 부족했다.

은행은 담보가 없는 중소기업에 대출을 해 주려 하지 않는다. 뉴그린 백화점에 진출할 수만
있 다면 그 계약서를 담보로 당장  필요한 자금을 대출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틀린
일이 된 것이다.

새미는 착잡한 심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도 석민의 제의가  귓가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자기 잘못 인 것 같아 죄책감을 느끼다가도 그를 생각하면 분노로 얼
굴이 달 아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진정되기보다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새미에 대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 석민에게  기
가 막혔다. 그 일로 헤어 나오기 힘든 상처를 받은 것은 자신이지, 남자인 석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아....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피오레의 진 새미입니다."

"새미니? 엄마야."

지금 이 시간이면 식당에 있을 어머니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대전에 계신 어
머 니를 자주 찾아 뵙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 뿐 이었는데. 새미는 반가움에 금방이라도 눈
물이 날 것 같았다. 어머니가 낮에 회사로 전화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엄마. 잘 지내셨어요? 정말 보고싶은..."

새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어머니가 가로챘다.

"새미 맞구나. 새미야! 큰일났어! 새한이가 또 사고를 쳤어. 오토바이를 타다 어린아이를 치
였 어... "

"뭐라고요? 엄마.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무슨 오토바이요? 새한이는 면허도 없잖아요."

어머니의 다급함이 담긴 목소리에 새미는 잔뜩 겁에 질러  음성을 높였다. 고등학교에 들어
간 후 새한이는 친구를 잘 못 사귀는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가출과 사고를 밥먹듯이
하고 있 었다.

"지금 병원에 와 있어. 아이가 많이 다쳐 합의를 해 주려 하지 않아. 새한이도  지금 병원에
있 어. 많이 다쳐서... 내가 해결해 보고 싶었는데... 통 얘기를 나누려 하지 않아.. 새미야! 어
쩌면 좋니? 우리 새한이 괜찮을까?"

흐느끼시는 어머니를 겨우 달랜 후 전화를 끊고  새미는 한 참을 멍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
다. 정 신이 아득해지고 눈앞이 깜깜해져 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새미는 두 손에 얼굴을 묻
고 흐느끼 기 시작했다. 오! 제발... 우리 새한이만은 제발...

마음을 진정한 후 새미는 상사에게  조퇴 허락을 받고 회사에서 나와  대전행 버스를 탔다.
서울 하늘이 노랗게만 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어렵게 살림을 돌보시고,  새
미는 서울 로 진학해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새한이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
다.

직장을 구한 후부터는 더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착하고 순하기만 하던 새한이가 고등학교에
들 어가 학교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알았을 때도 가까이에서 돌볼 수  없기는
마찬가 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나아질까 싶어 무슨 일이 있어도 졸업을 시키고 전문대라도 대학만 들
어 가 주기를 기대했는데. 또 사고라니..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대전 고속버스터미널 앞에 서서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주 본 거
리 였지만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자동차의 경적소리, 무엇이 그리 바쁜지 빠르게 지
나치는 사람들, 새미는 주위가 회전하듯 눈앞이 빙그르 돌자 벽에 잠깐 몸을 기댔다. 온  몸
에서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그 때 새미를 지켜보던 택시 아저씨가 소리치며 말을 걸었다.  정신을 차린 새미는 숨을 한
번 크 게 들이 쉰 후 택시에 올라탔다.

"성모병원으로 가주세요."

새미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피해자를 만나 빌고 빈 끝에 겨우  합의를 볼 수 있었다. 무면
허에 아이를 치어 형사입건 될 경우 구속이 뻔하기에 울면서 매달리며 사정을 했다. 사춘기
때 아버 지를 잃은 동생의 딱한 사정까지 설명하며 구걸하다시피 하여 얻어낸 합의였다.

하지만 천만 원이라니... 일주일 안에 그 돈을 당장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새한이의  입원비
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 안에 구하지 못하면 새한이는 전과자가 된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새한이를 위해 엄마가 얼마나 애를 썼던가.  이번 일이 잘못 되면 새한
이의 인생은 영영 되돌릴 수 없게 된다.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지. 그렇게 큰돈을 빌려줄  수
있는 사 람이 나의 주위에는 없는데... 아! 하나님. 도와주세요.

혼자서 힘겹게 마음을 다진 새미는 먼저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지난달에 뵈었을 때 보다 10년은 더 늦어 보이셨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핏기 없이 의자
에 앉 아 계신 어머니를 보자 울음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절대
로 약한 모 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나마저 약해지면 엄마가 기댈 유일한 버팀목이 사라지는 것이다.  긴 세월을 중소기업 사장
의 부인으로 넉넉하게 사셨던 엄마에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날벼락과도 같았다. 아버
지는 그저 한 집안의 가장이 아니라 엄마를 세상의 각박하고 차가운 풍파에서 지켜주는 방
패이자 전 부였다. 그 때는 엄마 마저 잊게 될 까봐 얼마나 겁났는지 모른다. 평생 일이라고
는 하신 적 없 던 엄마가 가정부와 식당 일까지 하시게 됐지.

어려운 형편 때문에 새미 본인은 포기하겠다는 대학을 무슨 일이 있어도 졸업은 해야 한다
며 끝까지 새미의 꿈을 밀어주신 어머니이시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고생쯤은 기꺼이
마다 하지 않으시던 우리 엄마...

"엄마! 이제 새한이는 괜찮아요. 합의 해주신대요."

새미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며 어머니를 안아드렸다. 아직도 떨고  계신 어머니가 조금씩 새
미의 품안에서 기운을 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 후, 어머니는 고개를 드시고 새미의 손을 잡으며 말문을 여셨다.

"그래... 잘됐구나... 하지만 합의금은..."

산 넘어 산이라고 사고가 난 당시에는 합의를 안  해줄까봐 걱정이었지만, 지금은 합의금이
어 머니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하여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셨다.

"걱정 마세요. 합의금은 제가 마련할 수 있어요."

새미는 명랑하게 말하면서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려 애썼다.

"네가 무슨 돈으로?"

어머니는 새미의 말에 정색을 하시고 다그치듯 물으셨다.

"겨우 오백인걸... 내가 엄마 몰래 적금 부은 것도 있고, 부족하면 하겸이나 주희에게 빌리면
돼 요."

새미는 별 걱정을 다한다는 듯이 웃으면서 어머니의 손을  부드럽게 만졌다. 어머니에게 거
짓말 을 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는 새미의 말
을 못 미더 워 하면서도 조금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셨다.

"너까지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엄마가 열심히 일해서 너의  적금이며 빌린 돈은 다 갚아줄
게."

새미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려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려 애썼
다.

어머니가 병원에 남으시겠다는 것을 거의 강제이다시피 집에 보낸  후, 새미는 새한이가 입
원해 있는 병실로 갔다. 새한이는 무릎부터 발목까지 붕대를 감아 움직이지 조차 못하고 있
었다. 얼 굴 등 온 몸이 새파랗게  멍들어 있었다. 기가 죽어 새미를 보고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 다.

"누나! 미안해. 갑자기 애가 뛰어 들었어. 피하려고 했지만.... 부딪혀서 아이는 넘어지고,  나
도 브레이크를 급히 밟는 바람에.. 그만."

새미는 병원에 누워있는 동생을 보자 화는 풀리고 안쓰러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미안해하
는 동생을 차마 혼 낼 수는 없었다.

"괜찮아. 너는 아무 걱정하지마. 누나가 다 알아서 할게. 수능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
쩌 니."

자신의 걱정을 숨긴 채 새미는  오히려 새한이를 위로했다. 만에 하나  이번 일로 새한이가
더 잘 못된 길로 간다면 그것이 더 큰 일이다.

"합의는 해줘? 그 쪽에서는 얼마를 요구해?"

새한이는 아직도 새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말라니까. 누나에게 그 정도의 돈은 있어. 이래봐도 직장 생활 4년째잖아?"

"학교에서 선생님과 한바탕하고... 그만 홧김에... 더 이상  문제 같은 거... 일으키고 싶지 않
았 어."

새한이는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미안해했다.

"그보다 너 이제 오토바이 안 타는 거다. 이번으로 방황은 끝내자. 응?"

이번 일을 계기로 새한이가 정신을 차리기만 한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었다. 새미는 새
한 이가 마음을 잡고 다시 착한 동생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랬다.

"공부는 잘 안돼. 하려고도 해 봤지만 학교는 답답해.  숨이 막혀. 선생들도 처음부터 나 같
은 것 은 문제아로 찍어놓고 관심조차 없는걸. 나는 학교에서는 모범생들 들러리에  불과해.
하지만 우 리 조직에서는 내가 짱이야."

새한이는 고개를 숙이며 작은 소리로 호소하듯 대꾸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 애들과 어울릴 수만은 없잖아."

새미는 새한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냥 새한이가 하는  대로 지켜 볼 수 없
기에 답답해져 저도 모르게 언성을 조금 높이었다.

"......." 새한이는 할 말을 잃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한아.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네가 대학가서 남부럽지 않기만을  바라며 힘든 일도 다 이
겨내 시는 거야."

"대학에 꼭 가야해? 공부 말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도 많다구. 학교는 고등학교 3년만으
로 지 쳤어. 나도 누나처럼 취직해서 돈 벌 수 있어. 자동차 정비자격증도 있다구."

"뭐? 그걸 언제 땄어?"

새미는 새한이가 언제 그런 기술을 배웠는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2학년때. 가출한 적 있잖아... 하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백댄서야. 낮에 일하고 밤에
춤 연습해서 얼마든지 나도 내 앞가림정도는 할 수 있어. 학교 그만 두고 싶었지만 엄마 때
문에 참 는 거야. 앞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

새한이는 간절한 눈빛으로 새미를 쳐다보며 이해해 주길 바랬다. 새한이가 처음으로 새미에
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꿈을 말했지만 새미가 새한의 꿈을 밀어주기에는 현실이 너무 매서
웠다. 지금 당장 닥친 일만으로도 새미가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지금은 네가 아프니까 얘기 그만 하자. 그리고, 대학은 양보할 수 없어. 대학가서도 얼마든
지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어."

새미는 엄하게 새한이를 타이르며 말을 끝냈다.

고등학교 교육이 학생 개인의 개성을 무시한  채 대학을 보내는 학원처럼 퇴색해버린  것은
사실 이었다. 하지만 현실이 대학을 나와야, 그것도 일류 대학을 나와야 사람으로  인정하는
이상 양 보할 수 없었다.  우리 새한이가 세상의 중심에 서길  바라는 욕심이 속물근성이라
탓해도 어쩔 수 없어.

새미는 병원을 나와 서울로 떠나면서 서글퍼졌다. 달리는 고속버스 창가에 기대앉아 하염없
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너무 일찍 떠나신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그리웠다. 7년 전  아버
지의 사 업이 친구의 빚 보증으로 망하고 그 충격으로 인해 심장마비로 쓰러지지만 않았어
도 이 정도로 우리 형편이 어렵지 않았을 텐데.

처음에는 빚쟁이들을 피해 울산까지 도망갔었다. 그 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대전으로 이사
와 어머니가 식당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그 월급으로는 월세와 식비를 충당하기에도 급급
했다. 작년에 전세로 옮기면서 조금 어깨를 펼 수 있었지만, 새미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서
실직자 가 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원점이 되고 사정은 전혀 나아질 것이 없었다.

창 밖으로 파하란 가을 하늘이 보였다.

내 시야에 가득 보이는 이 푸르른 녹음!

그 푸르름마저 눈물겹도록 시리게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마음 편히  하늘을 바라본 게 언제
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잘 버텼지만, 조금씩 자신감이 허물어져 갔다.

아버지의 사업의 파산으로 원하던 대학과 유학의  꿈을 포기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건
새한 이의 장래를 생각해서였다. 나이  차가 많이 나서 늘 귀엽고  안아주고만 싶었던 나의
하나뿐인 동생 새한이... 새한이의 꿈 마저 허물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번에 새한이가
잘 못 된다 면 엄마도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야 한다. 생각해 내야만 한다.

천만원. 큰 돈. 새한이. 담보물이 없으니 은행에서의  대출은 꿈도 못 꾼다. 천만 원을  쉽게
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지? 은경이는 작년에 시집가면서 적금을 털었을 거야. 주희
는 아직 유럽에 있지. 하겸이는 돈이 있을까... 아니야! 하겸이도 요즘 학비 마련한다고 아르
바이트하고 있잖아...

부자... 강석민!!

석민이라면 나를 도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석민씨가 나를 과연 도와줄까. 지난 번 그렇게
소 리치면 뛰쳐나왔는데. 내가 그 때 뭐라고 말했지? 끙!

"따르릉!"

"이사님. 피오레의 진새미양 전화입니다."

"연결하세요."

석민은 새미의 전화라는 소리에 긴장하였다. 삼일 전 그런 제의를  한 후 어떻게 다시 접근
하여 사과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새미가 먼저 연락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수화기를 드는 손
이 미약 하게 떨리고 있었다.

"강석민입니다."

"... 안녕하세요. 새미예요. 시간이 괜찮다면 오늘 뵙고 싶어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새미는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제발...

"그러지. 7시에 회사로 데리러 가지."

새미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7시까지는 아직 3
시 간이 남아있다.

손목시계가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미는 건물 앞에서 석민을 기다리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았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
새 한이를 위해 최선이야. 더 이상 다른 방법을 생각 할 시간이 없잖아. 하지만 정말 석민씨
가 나 를 원할까. 나의 제안을 무시하고 없었던 일로 하자며 비웃는 것은 아닐까.

오늘 석민씨를 설득할 수 없다면 새한이의 미래는 끝이야. 이미  내 인생과 꿈은 오래 전에
엄마 와 새한이를 위해 포기했다. 나의 마지막 자존심... 마저...

그 때 잘 빠진 검은색 승용차가 멈춰 서며 석민이 창을 내리고 새미를 불렀다.

흠칫 놀라던 새미는 차문을 열고 올라탔다. 석민에게 건넬 첫 마디를 생각해 보았지만, 머릿
속 의 뇌세포가 마비라도 된 듯 하얗게 비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뜻밖이군. 새미가 나를 계속 놀라게 하는 것 알고 있나?"

석민은 핸들을 돌리며 새미를 흘끗  보았다. 새미는 사무실에서처럼 손목을  비틀며 고개를
숙이 고 있었다. 새미의 긴장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석민은 최신 유행하는 신나고 빠른 음악으로 바꾸며 조금이라도 새미의 긴장이 풀리는데 도
움 이 되길 바랬다. 자신의 무례한 제안 이후 처음 가지는 만남이라 둘 사이의 분위기를 가
볍게 하 고 싶었다.

"내가 자주 가는 대로 가지. 오늘이 우리가 갖는 첫 데이트라는 거 알고 있나.  아직은 잡아
먹지 않을 테니 손 좀 그만 괴롭혀."

새미를 바라보며 석민이 재밌다는 듯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왠지 석민의 어투에는 유머러
스한 따스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데이트라고? 지금 석민이 농담을 하고 있는 건가. 새미는 그의 미소가 어리둥절하기까지 했
다. 석민의 태도는 오래된 친구를 대하듯 편해 보였다.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지배인이 직접 문 앞까지 나와 석민을 알아보고 예약된 자리로 인도했
다. 일류 음식점으로 새미의 월급으로는 상상도 못 할 곳이었다. 인도된 자리에는  칸막이가
설치되 어 있어 주위의 시선으로부터 두 사람을 차단시켜  주었다. 테이블 위에는 비스듬이
가로질러 수를 놓은 고운 하얀 색 천이 깔려 있었고,  바로 위로 고급스런 인테리어 조명이
은은하고 로맨 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테이블 가장자리에는 고풍스런  촛대 위에 작은 노
란 색 촛불이 켜져 있었다.

석민이 주문을 하는 동안 새미는 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창 밖으로 까만 밤하늘
아래 행진하듯 지나가는 수없이 많은 차의 불빛들이 보였다.  지배인이 사라진 후에도 새미
는 석민에 게 시선을 둘 수 없었다.  석민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고, 과연 자신의  계획대로
그가 따라줄지 의심스러웠다.

석민은 계속 정중하고 익숙한 태도로 새미를 대하고 있었다.  그런 석민의 예의바름이 새미
를 더욱 긴장시키고 있었다.

귀에 익숙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석민이 새미의 잔에 와인을 따르며 어색한 분위기를 깼다.

"차안에서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는군. 이 음악 기억나? 우리가 처음 만나 함께 춤을 춘 그
곡 이지?"

새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민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후 이 곡을 들으면 항상 네가 생각났지."

"석민씨가 그 날 일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을 줄을 생각도 못 했어요."

잠시 석민을 처음 보았을 때의 기억이 음악에 어린 추억과 함께 새미를 붙잡아 과거 속으로
떠 나게 했다. 하지만 새미는 떠오르는 5년 전의 추억을 지우려 고개를 흔들었다. 5년 전 일
을 계 속 입에 담는 석민의 저의는 무엇일까. 그건 서로에게 술과 분위기에 취한 실수가 아
니었던가. 석민씨가 아직도 나를 원하는 것이 그래서 일까. 끝내지 못한 지난 일에 대한  향
수? 미련?

"왜? 이런 생각도 해 보았지. 너를 그 곳에서가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데
이트 를 했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됐을까?"

새미는 얼른 와인 잔으로 입술을 축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는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인데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어요? 말도 안돼요."

"적어도 너의 연락처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겠지."

"나를... 나를 만나고 싶었어요?"

새미는 자신과 연락하고 싶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석민의 말에  숨이 멎는 거 같았다. 6주
후, 찾아갔을 때 이미 아파트를 옮겨 연락할 수 있는 길을 끊어 버린 사람이 누구더라.

"그 때는 그 보다 더 큰 바램은 없었지. 왜 그 때 말없이 달아난 거지?"

석민의 은근한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눈빛으로 새미를
바 라보고 있었다. 음악까지 그 때와 똑같았다.

그 눈빛에 매료된 새미는 조금씩 5년 전으로 되돌아간  착각에 빠져 들어갔다. 그때도 지금
처럼 저 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지. 내 자신까지 잊게 만드는 마술 같은 힘이야. 내가 이
곳에 있는 이유도 모두 사소한 것처럼 느껴져. 어?  내가 이 곳에 온 이유라고? 안돼! 새한
이!! 새한이를 잊다니. 새미의 태도가 갑자기 차갑게 바뀌었다.

"5년 전 일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석민은 새미의 차갑게 돌변한 말투에 한 쪽  눈썹을 치켜 뜰 뿐 부드러운 눈빛을 바꾸지는
않았 다. 입가에 미소마저 띄우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을 만나자 한 것은... 저는 .. 저 당신이 마지막  했던 제의가 아직 유효한지 알고 싶어
요."

새미의 말에 석민은 와인 잔을 딱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녀를 보았다. 혹시 새미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살펴보
았다. 되묻 는 석민의 목소리에서 어리둥절함마저 느껴졌다.

"마지막 제의라고?"

새미는 석민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전 아직도 당신이 저를 원하는지 알고 싶어요."

석민은 온 몸이 굳어버린 듯 한순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 것
도 느 낄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맴돌던 추억이 묻어 있는  낭만적인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폭 풍전야와 같은 살벌하고 위험한 기운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른 후 석민의 눈에 다시 냉소적인 기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두 주먹을  불
끈 쥐었다. 무언가를 내리치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이 석민을 사로잡았다. 그의 몸이  분노로
인해 부르르 떨렸다. 폭발할 듯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오는 탓에 터져 나온 목소리에는 생각
보다 더 경멸을 품고 있었다.

"아직도 널 원한다면 그 제의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인가?"

석민의 날이 선 차가운 목소리에 새미는 기가 죽어 고개를  숙이었다. 그 제안은 날 우습게
보고 한 농담이었던 거야. 키도 작고 눈에 확 뜨일 미인도 아닌 나를 석민씨가 원할 이유가
어디 있 겠어. 바보처럼 진심이었다고 생각하다니. 이제 천  만원을 어디 가서 구하지. 스스
로에 대한 모 멸감에 참기 어려웠다.

새미는 창피하여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되 도록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 해. 금방이라도 토 할 것 같아...

"당신의 말을 오해했나 봐요. 저는 그 말이... 그러니까 진심이라고 생각했어요. 미안해요. 괜
히 바쁜 석민씨의 시간만 뺏었군요."

"그 제의가 거짓이었다 하면 금방이라도 일어나 나갈 태세이군."

새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인상을 찌푸리며 보던 석민이 뱉어 내듯 말을 이었다.

"물론."

하려 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석민은 의자에 몸을 밀치듯 세게 기대며 심호흡을 크게  내
쉬었 다. 몇 분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대답을 했다.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 제의는 진심이었고 난 아직도 널 원해. 받아들인다는 뜻인가?"

새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석민을 보았다. 석민의 얼굴도 잔뜩 굳어 있었다. 새미는 혼란스러
웠 다. 석민의 답변에 자신이 안도하는 건지 경악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농담
으로 돌리고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새한이!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이 자
리를 박 차고 나간다면... 순간 감옥의 창살 아래 서 있을 새한이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가방을 적군 앞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지킬 무기인 양 강하게 끌어안고 있던 새미의 손이 아
래 로 쳐졌다. 새미는 힘없이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정말 나를 원하는  걸까. 왜 저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그 제안을 먼저 꺼낸 건 석민 자신이면서. 하지만 석민의 눈빛에  질
려 여기서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새미는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혀에 감기는 달콤
하고 쓴맛이 목 줄기를 타고 내려가자 새미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다음 말을 하기 위
해서는 술기운이 필 요했다. 아직 더 중요한 제안이 남아있다.

"그래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라고? 못 견디겠군. 뭐지?"

석민은 몸을 뒤로 더 세게 젖히며 비아냥거렸다. 이제 석민의 말투는 숨김없이 비웃는 투였
고 눈빛은 경멸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런 석민의 비웃음에 새미는 다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돈 천 만원 때문
에 거리의 여자로 전락하는 자신의 신세가 비참했다. 자존심까지 몽땅 버리며 이 남자 앞에
앉아 있어야 하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새미의 자존심 따위는 새한의 미래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백화점 자리와 천 만원을 원해요. 돈은 일주일 안으로 준비해 주세요."

쫓기듯 재빨리 말을 마친 새미의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졌다. 마침내 말을 하고 말았어. 이제
주 사위는 던져졌다. 이 말도 안돼는 상황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석민의 입술언저리가 눈에 띄게 실룩거리더니 두 눈을 감았다 한참 후 다시 눈을 뜨며 새미
를 바라보았다. 그의 주위로 폭풍이 휘몰아치듯 어두운 기운이 일고 있었다.

새미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떨리는 두 손목을 꼭 쥐고 석민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입을
열 기를 기다리며 왠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오호! 선불이라 이거군. 어디에 쓸 돈인지는 물어도 될까?"

그녀를 탐색하던 석민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와인 잔을 들면서 조용한 음색으로 되물었
다.

"그건..."

새한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는 동안 석민은 새미의 태도를 말하고 싶지 않
은 것으로 오해하고 말을 돌렸다.

"됐어! 나도 알고 싶지 않아. 내 아파트로 이번 주 토요일에 옮겨오지."

"이번 주요? 그건 좋다는 뜻인가요?"

석민에게 질문을 던지는 새미의 어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불안감이 고스
란 히 묻어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새미는 새한이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하면서도 이번 주에 그
의 아 파트로 들어오라는 말에 당황했다. 동거라니... 내가 할  수 있을까. 지금껏 새미를 지
탱해 주던 자존심이 완벽히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5년 전 하룻밤의 사랑으로 내 자신에 대한 모멸감에서  벗어나기까지 몇 년이 걸렸는데. 앞
으로 한 달이 지났을 때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 뒤로  남자와 술은 두 번 다시 가
까이 하지 않기로 맹세했었다. 그 두 가지가 모두 이 남자 때문에 깨지다니. 새미는  갑자기
막 큰 소리로 웃고 싶어졌다. 미칠 것만 같았다.

"토요일이야! 이미 5년이나 기다렸잖아. 네가 그렇게 탐욕스런  여자인지 몰랐어. 결국 해답
은 돈이군."

석민은 와인 잔을 빙빙 돌리며, 더 이상 새미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창 밖을 바라
보았 다. 석민의 감정을 드러내는 유일한 것은 떨리는 그의  손과 금방이라도 깨질 듯 흔들
리는 와인 잔뿐이었다.

긴 침묵만이 두 사람을 감쌌다.

어느 누구도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새미는 잘 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며 진정하려 애썼다. 포크로  스테이크를 계속
찔려 대며 괴롭히는 바람에 요리는 산산조각이 나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 두 그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석민의 무심한 눈빛은 앞에 앉아 있는 새미를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새미는 터질 것 같은 분위기에 숨이 막혀 와인을 벌컥 마셨다. 빨리  마신 술 탓에 숨이 막
혀 엢 엢거리며 급히 입을 막았다.

그 때서야 석민이는 새미를 돌아보며 냅킨을 건네주었다.

"애인에게는 내 얘기를 할건가?"

"......"

새미는 석민의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어 대답을 못하고  눈만 깜박거렸다. 갑자기 웬 애인
타 령? 그는 흔들림 없는 싸늘한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확실히 전했다.

"자신의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을 말없이 용인하는  남자가 있을 리 없잖아. 당연히
그와 는 끝장이야. 나와 지내는 동안에는 나에게만 충실하길 기대하지."

애인? 다른 남자? 새미는 그때서야 며칠 전 애인이 있다고  거짓말 한 것이 생각났다. 애인
따위 못 만들게 만든 남자가 누군 대. 나는 독신주의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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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석민은 새미를 그녀의 자취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반 지하에 위치한  겨우 방 하나에 한 평
도 되 지 않는 부엌이 달린 작은 살림살이를 보고 기막힌 듯  인상을 썼다. 그 흔한 텔레비
전조차 없었 다.

"세상에! 정말 작은 방이군. 햇빛이 들기는 하는 거야. 옷은 최고로만 입으면서 살기는 이런
집 에서 살다니."

석민은 방을 구석구석 살피며 믿어지지 않은 듯이 말했다.

"혼자 살기에는 충분해요."

안 그래도 자기의 빈약한 방까지 들키게 되어 창피한 새미는 토라진 말투로 대꾸했다. 혼자
가 겠다는 것을 굳이 태워다 주고 마치 자신이 주인인 양 방 안 까지 들어와 샅샅이 살피는
모습 에 화가 치솟았다. 저 뻔뻔한 태도로 보아 이 방이 '금남의 집'이라는 것은 말해도 믿
지 않겠지.

새미의 투덜대는 말투는 무시하고 석민은 창문과 방문의 자물쇠가 단단한지 열었다 다시 잠
가 보았다.

"안전하기는 한 건인가?"

새미는 새침하게 말을 했다.

"석민씨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백 배는 안전할걸요."

'나의 정신건강에도 해를 끼치지 않고요.' 새미는 속으로 덧붙였다.

"숨겨둔 애인은 오늘 안 들어오나?"

지나가는 말투로 질문을 던지며 석민은 옷장까지 열어보았다. 새미가 보세점에서 산 옷들도
몇 벌 있지만 대부분은 주희가 이태리로 떠나면서 자신은 더 이상 필요 없다며 물려주고 간
옷들 이다. 이름만 말하면 누구나 아는 디자이너의 옷도 몇 벌 있었다. 석민이 옷에 대해 한
마디 정 도 할까 싶었는데 의외로 얼굴만 찡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인은 더 이상 만나지 않기로 했어요."

옷장은 왜 열어보는 거야. 설마 내가 저 옷장 안에 남자를 숨겨 두고 산다고 생각하지는 않
겠 지.

석민은 새미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한참동안 탐색했다. 그러다 고개를 끄
덕 이며 말을 이었다.

"내일 통장으로 돈을 입금시켜줄게! 토요일에 사람을 보내주지. 토요일 저녁은 내 아파트에
서 같이 하고 싶군... 그 때까지는 바빠서 연락 못할 거야."

마지막 말은 망설이다 덧붙였다.

석민은 이번에는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얼굴을 더욱 찡그렸다.

"뭘 먹고살지? 매일 밖에서 해결하나. 그러니 몸이 그렇게 비실 하지."

석민은 당연하다는 듯이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어 새미에게 내밀었다.

자신의 집을 감시라도 하는 듯한 석민의 태도에 반쯤 질렸던 새미는 돈까지 내미는 그의 무
자 비함에 속에서 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석민의 손을 세차게 치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당신의 아파트에서 산다고 해서 나를 함부로 여길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요. 당신의
돈은 더 이상 필요 없어요."

"우습군. 내 돈이 필요 없다니.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이 내 돈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런 집
에서 사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같이 살면서 필요한 것을 사. 생활비라고  생각
해."

석민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새미를 화가 난 듯 노려보았다.

"......"

새미는 그 돈을 석민의 얼굴에 보란듯이 집어던지면 얼마나 통쾌할까 잠시 심각하게 고려해
보 았다. 하지만 그가 자기를 돈만  아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고개를
저으며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돈을 거절했다.

"싫어요. 당신의 돈은 더 이상 필요 없어요."

석민은 새미를 한 참 동안 쳐다보다 못마땅한지 입술을 실룩거렸지만 포기하고 수표를 지갑
에 다시 넣었다.

잠깐의 언쟁으로 새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묶었던 머리가 풀어져 이마에 자연스럽
게 흘러 내렸다. 화가 나 씩씩대는 모습이 마치 심술난 새끼고양이 같았다. 새미는 그런  자
신의 모 습이 석민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했다.

석민은 새미의 머리를 올려 주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새미
는 흠 칫 놀라 반사적으로 뒷걸음을 쳤다. 석민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굳어지더니 갑자기 한
숨을 내 쉬며 새미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석민의 단단한 가슴에 부딪히면서 남성적인 체취가 밀려오자 새미는 혈압이 높아져  가슴이
터 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자신의 머리를 기댄 그의 가슴에서 빠르게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 다. 석민의 숨결이 자신의 머리를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쉽게 석민의 품
에서 자 제력을 잊어 가는 자신이 두려워 새미는 그의 가슴을 밀쳤다. 하지만 석민은 더 세
게 새미를 안 을 뿐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새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랫동안 같은 자
세를 유지했다.

한참 동안 자신을 안고만 있는 석민의 품에서 새미는 편안함과 전율을 동시에 느꼈다. 이상
하 게도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누구도 그녀를  이렇게 안아준 적이
없었다... 그만두어야해... 하지만 너무 편안하고 포근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도 괜찮을
거야.

마비된 듯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새미를 자신의 품에서 푼  후, 그녀의 눈을 한참을 쳐다 보
다 석 민이 고개를 숙였다. 새미의 반응을 시험하듯 가볍게 입만 맞추다 금방 입술을  Ep고
다시 그녀 를 바라보았다. 석민도 새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키스하는 여자처럼 새미는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석민이 남긴 부드러운 감촉
을 음미하듯이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새미가 자신의  흔적을 쓰다듬는 것을 말없
이 바라 보던 그의 눈빛이 가늘어지더니 이번에는 거칠게 다시 그녀의 입술을 빼았었다.

새미의 눈이 커졌다 꼬옥 감기며 그 입술의 부딪힘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동안 숨어살았던
육 체가 다시 살아나서 해방시켜 달라고 온 몸에서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석민의 혀가
새미의 입술을 벌리고 깊숙히 밀려 들어와 그녀의 혀를  감쌌다. 새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새미는 두 팔로 석민의 머리를 감싸 자기에게 끌어당기면서도 스스로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
했 다. 오직 자신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불꽃에만 신경을 썼다. 이 불을 끄기 위해  석민이
필요했 다. 그의 손이 블라우스를 헤치고 가슴으로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새미는 몸을 떨며
더욱 그에 게 몸을 바짝 기댔다.

그 때 석민이 거칠게 새미를 떼어 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새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멍한 눈으로 석민을 바라보았다. 석민은 화가 나 있었다.  그녀의
팔 을 꽉 잡고 있는 석민의 손 때문에 조금씩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석민이 입에서는 조금 전 열정을 함께 나눈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듣기에도 역겨운 단
어 들이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군. 오늘 밤 일은 다음을 위한 전주곡이라 생각하지. 토요일에도 오
늘 처럼 정열적으로 나온다면 천 만원도 전혀 아깝지 않을 것 같군."

짝! 새미의 손이 석민의 뺨을 쳤다. 석민은 새미의  손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를 쏘
아봤 다. 이번에는 열정이 아닌 분노로 새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날 창녀 취급하다니... 나가요! 처음 계약대로 한 달  뿐이야. 아파트에 들어간 시간부터 한
달 이 지나면 단 일 초도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있지 않을 거야."

"글세, 두고 보면 알겠지. 한 달 후 누가 매달리게 될지. 내 손이 닫기만 하면 정신 못 차리
는 새미가 아닐까. 내가 여기에서 널 안았다 해다 넌 반항조차 하지 않았을걸."

석민은 사정없이 새미를 몰아세웠다. 조금 전 자신을 그렇게 뜨겁게 달구었던 그 남자와 동
일 인물이라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새미는 천국과도 같은 환희에서 나락으로 순식
간에 추락하였다. 새미는 자괴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신은 정말 참기 힘든 남자군요."

새미는 한마디 한마디를 세게 발음하며 내뱉었다.

갑자기 석민은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그는 분노와  좌절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쳐 다보며 신음하듯 말했다.

"제길! 얼마나 많은 남자가 있었는지 궁금해지는군."

헉! 새미는 숨이 막혔다. 저 남자는 정말 나를  아무 남자나 만나고 다니는 값싼 여자로 보
는 걸 까. 지금까지의 석민과의  만남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을 할만도  하지.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너무 심하다...

석민은 고개를 흔들며 차가운 표정을 다시 유지하면서, 흐트러진 옷의 주름을 폈다.

금방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며 돌변하는 모습은  쉽게 익숙해 질 것 같지  않다. 익숙? 내가
왜 저 남자에게 익숙해져야 하는데? 흥! 한  달만 지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주겠어. 새
미는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비아냥거렸다.

"후... 몸단속 잘하고 자."

석민은 주위를 한번 둘러 보다 참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말했다. 어느새 폭발할 듯한 감정조
절을 마친 상태였다.

"이런 곳에 혼자 놔두고 가기 싫군. 어때? 내 아파트로 갈까? 짐은 내일 옮겨도 되고."

"그러면 오늘 이 시간부터 정확히 한 달이죠? 하루라도 싫은 일을 일찍 끝낼 수  있어 좋겠
지만, 됐어요! 오늘은 더 이상 일초라도 당신을 보고 싶지 않네요."

새미가 사납게 소리치며 석민을 노려보았다.

"하하..."

석민이 소리를 내며 크게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석민과 재회한 후 한번도 웃는 것을  보지 못한 새미는 그 소리에
넋이 나갔다. 환하게 웃는 그는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 웃음소리에 새미가 혼란스러워하며 이마를 찌푸리자 석민은 더 큰 소리로 웃었다.

웃음을 멈춘 석민은 여전히 당황해 있는 새미의 이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듯 가볍게 키스
를 한 후, 그녀의 집에서 나갔다.

차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멍히 서있던 새미는 자신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석민의 입술
이 이마를 스쳤을 때, 따스함이 자신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거리의 여자 취급하는 남
자에게 서 따스함을 느끼다니... 새미는 자신을 이해 할 수 없어 머리를 저었다.

오! 하나님! 한 남자를 증오하면서 또한 미칠 듯이 원할 수가 있는 건가요!

석민은 아직 타인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그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 생각을  하니 잠이 올
것 같 지 않았다.

토요일 날 아침 새미는 시끄럽게 울리는 시계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밤 새 한 숨도 못 자고 새벽에 겨우 잠든 탓에 눈자위가 거뭇거뭇 해지고 피부는  거칠거칠
해졌다.

새미는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창녀처럼  돈에 팔려 가는
건가. 4년의 사회 생활을 하면서 직장 상사나 거래처 사람들과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을 유혹
해오는 남 자들 사이에서 한 번도 흔들이지 않고 잘 버텨온 그녀였다. 물론, 석민처럼  새미
를 뿌리 채 흔 들어 놓은 남자를 만난 적도 없었지만.

5년 전 자기 모멸감에서 겨우 헤어 나온 후, 남자나 결혼과는 담을 쌓고 직장에서의 성공만
을 꿈꾸며 열심히 살아왔다.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갖다 온 실력파들 속에서 기죽을
때도 많았지만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존심 하나로 버텨왔다.

하지만... 이제 그 자존심 마저 땅에 떨어지고  나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어. 거울에  비친
자신 의 모습이 은화 서른 냥에 예수를 팔아 넘긴 가롯 유다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면서 계약동거와 들어간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매일 아침마
다 석민을 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다시 그의 침대로 들어가는  느낌은... 아! 내가 무슨
생각을!

만약... 석민이 아닌 다른 남자가 그런 제의를 했다 해도 내가 받아들였을까. 아무리  새한이
를 위해서라지만 석민이 아닌 다른 남자의 품속으로 그렇게 쉽게 나를 던질 수 있었을까.

바보! 진새미! 그렇게 지우려 노력했던 시간들이 모두 헛된 노력이었구나! 아직도 그의 손길
에 무너지듯 반응을 보이다니. 미쳤어...

새미는 생각에서 벗어나 옷과 일용품  몇 가지를 가방에 넣었다. 삼일에  한번 정도 잠깐씩
들리 자는 생각에 급히 필요한 것만 챙겼다. 그의 아파트로  모든 짐을 옮기는 것은 석민에
게 완전히 소유되는 기분이 들어 내키지 않았다. 자신이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회사에 나갈 필요는 없었다. 회사는 격주로 토요일마다 돌아가면서 쉬었
다. 그 동안은 바빠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날이 많았지만 요즘은  급히 처리할 일은 거의 없
었다.

대전에 가서 새한이의 사고에 관한 합의를 끝내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서둘
러야 한다. 석민의 퇴근 시간 전에 오려면 빠듯할 것 같았다.

새미가 옷을 갈아입고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석민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기사를 보냈어. 30분 후면 도착 할 거야."

수화기를 통해 전해오는 허스키한 석민의 목소리가 새미의 온  몸을 휘감았다. 석민의 목소
리에 도 쉽게 흥분하여 주인의 의지를 배신하는 몸의 반응이 싫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최
면을 걸 듯 새미를 꼼짝 못하게 하는 마력이 서려있었다. 이건 거의 전자동이잖아.

"저... 알았어요."

두 손으로 수화기만 꼭 쥔 채  새미는 겨우 짧게 대답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입안의 침이
마른 듯 바삭 탔다. 내가 이렇게 말을 못했던가. 왜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걸까.

"후"

석민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말을 이었다.

"열쇠는 기사에게 보냈으니 짐을 싸는 대로 아파트로 이사오도록 해. 그리고..."

석민이 말하는 중에 갑자기 말을 끊고 입을 다물었다.

새미는 조바심에 되물었다.

"네? 뭐라..."

"아니야. 뭐 필요한 것은 없어?"

석민은 단호히 말을 끊더니 갑자기 사무적인 어투로 바꾸어 재빨리 묻었다.

"없어요..."

"그럼, 회의 들어가 봐야해."

석민은 인사도 없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새미는 멍하게 뚜 소리를 울려대는 수화기만 한참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자신이 파우스트의 주인공처럼 악마와 계약을 했음이 실감났다. 싸늘한 그의 태도는
같 이 잠은 자더라도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
인지 명확하게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다... 그럴 거라 밤 새 스스로에게 되釶지만 가슴
한구석이 실망 으로 저려옴은 어쩔 수 없었다.

새미는 석민이 보낸 운전기사에게 작은 가방을 딸려 보낸 후, 대전으로 떠났다.  운전기사가
다 안다는 듯이 바라보는 것 같아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대전에 도착해서 피해자의 부모를 먼저 만나 다시 한번 사죄를 한 후 아이를 보러 갔다. 중
환자 실에 입원해 있는 어린아이를 보자 마음이  아파 왔다. 이젠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직 석민 과의 결전이 남아있지만, 중요한 것은 새한이가 무사하다는 것이다.

새한이의 병실을 열자 어머니는 오늘도 식당으로 일하러 가시고 새한이만 혼자 병실을 지키
고 있었다. 모두들 학교 갈 시간에 쓸쓸히 병실에 앉아있는 새한이를 보는 것이 가슴아팠다.
친구 들이 다녀갔는지 못 보던 꽃이 보였다.

"새한아! 잘 지냈어?"

새미는 근처 가게에서 사온 과일을 냉장고에 넣으며 활짝 웃었다. 동생과 어머니 앞에서 항
상 씩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거의 습관이 되다 시피 했다.

곧 서울로 올라가야 했지만 어머니도 없이 홀로 새한이만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지금 가
면 또 언제 보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입원해 있는 동안 내내 새한이 혼자 병실에 있을
생각을 하 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새미는 새한이가 잠 든 사이에 병실을 조용히 빠져 나와 석민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기 위해
공 중전화 박스를 찾았다. 하지만 석민의 비서에게 자신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며
주위를 서성대다 한참 후에나 수화기를 들 수 있었다.

비서에게는 그냥 피오레의 직원이라고만 설명하고 석민을 부탁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회의 중이라 바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용건을 남기시면 연락 드리겠습
니 다."

새미는 꼭 자동응답기 기계음 같다고 생각하면서  다음에 다시 전화하겠다는 말만 남긴  채
수화 기를 내려놓았다. 그 때서야 자신이 석민의 핸드폰 번호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다 시 전화했을 때는 이미 그가 퇴근 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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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미는 석민의 아파트 입구에 서서 위를 바라보았다. 아파트가 그렇게 거대해 보일 수가 없
었 다. 이미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하지만 석민과는 계속 볼 사람이고 새한이는  자
주 만나 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었다. 전화 연결이라도 됐으면 좋았을걸. 새미는 엘리베이터의
층수가 올 라가는 것을 보며 손바닥에  땀이 고이자 얼른 두 손을 문질렀다.  대학 입시 때
보다 더 긴장되 는 것 같았다.

"지금 몇 시인지 알아?"

새미가 초인종을 누르자 마자 문이 벌컥 열리면서 석민이 고함을 치며 새미를 다그쳤다. 그
는 눈에 노기를 가득 띄운 채 잡아먹을 듯 새미를 노려보았다. 마치 거인 앞에 선 난쟁이처
럼 느껴 져 신경세포가 움추러 들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소리를 치는 석민의 모습에 놀라 새미는 할 말을 잃고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심하게 화를 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지나가던 옆집 아저씨가 재밌는지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자 석민은 날카롭게 그  아저씨를
노려 보더니 쇳소리를 짧게 내지른 후, 이를 악물고 새미를 잡아 집안으로 끌어당기며 문을
닫았다. 여전히 새미의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을 빼지 않고 세게 잡은 채 다시 그녀에게 분노
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화할 줄도 모르나? 저녁 약속을  해놓고 10시가 다 되도록 오지  않다니.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누구랑 있었어?"

새미는 사나운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석민의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금씩 그에게 잡
힌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많이 아팠지만 험악한 그의 분위기에 질려 아프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저기.. 회사에 전화했었는데... 회의 중이라고..."

더듬거리며 새미는 상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석민의 앞에서  바보 마냥 더듬거리는 것이
습 관이 될 것만 같았다. 석민이 중간에서 새미의 말을 가로채며 질문을 던졌다.

"겨우 한번?"

가소롭다는 듯 석민의 비꼬는 목소리는 새미를 더욱 겁먹게 하기에 충분했다.

"두 번 째 걸었을 때는 당신이 이미 나갔다고 하더군요. 핸드폰 전화도 모르고..."

새미의 변명 투의 짧은 설명으로는 석민의 화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물론 여비서가 핸드폰
전 화번호를 내 허락도 없이 가르쳐 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게 늦은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사진 회의를 마친 후, 석민은 지금쯤이면 새미가 자신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거라 짐작하
고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자 걱정스러워 곧장 집으로 달려 왔다.
아파 트에 달랑 작은 가방만 있고 새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당장 운전기사에게 연락을 취하
니 가방 만 맡기고 그녀는 차에 타지 않았다고 했다.

곧 올 거라고 자신을 타이르며 새미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둠이 내리고 그녀에게 늦는다는
연 락조차 오지 않자 걱정 반 노여움 반으로 미칠 것 같았다.  꼭 철창에 갇힌 사나운 짐승
마냥 거 실을 왔다 갔다 하며 서성댔다. 아파트는 찾기 쉬운 위치였기 때문에 집을 못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나 하고 새미의 자취방에도 다녀왔지만 그 곳은 잠겨 있었다.

"저... 미안해요. 시간이 이렇게까지 흐른 지는 몰랐어요..."

"어디서 오는 거야?"

새미의 사과를 무시하고 석민은 여전히 험악한 목소리로 그녀의 대답을 재촉했다.

새미는 석민에게 자신의 가족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한  달이란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중에 잊기만 힘들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뭐라 다른 변명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전... 엄마한테 다녀왔어요."

제발 더 이상은 묻지 않기를...

"엄마?"

석민은 구겨진 인상을 약간 펴며 사실인지 확인하듯 새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회사 일로 바빠...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오랜만의 휴일이었거든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석민은 그 때서야 새미의 얼굴에 피곤이 서린 것을 눈치 챘다. 그의 찌
푸린 얼굴은 금방 걱정으로 부드러워졌다.

"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은 거야?"

"그것보다 팔이 더 아파요."

석민은 자신이 새미의 손목을 잡고 있던 것을 그때서야 알아채고 황급히 손을 놓았다.

자신이 잡았던 새미의 팔이 빨갛게 물든 것을 보고 놀라  신음을 내었다. 그의 얼굴이 반쯤
하얗 게 질렸다. 내일 아침이면 파랗게 멍이 들지도 모른다.

갑작스런 석민의 돌변한 태도에 새미는 당혹스러우면서도 그의 눈빛이 죄책감으로 옅어지자
웃 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어쩜! 저렇게 금방 기분이 변할 수 있지?

석민은 스스로에게 끓어오르는 화를 삼키며 두 눈을  한 참 동안 감았다 뜨고 다시 새미의
손을 잡아 맺힌 혈을 달래듯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을  잡은 석민의 손이
조금 떨린 것 같기도 했다.

새미는 석민의 부드러운 마사지에 온 몸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손목을 타고 그의
길 고 단단한 손가락이 움직이자 그 자리가 불에 탄  듯 화끈거리고, 익숙해진 열기가 온몸
으로 퍼 졌다 .

"미안해.. 세상에! 정말 아팠겠군..."

석민의 목소리가 애무하듯 작고 감미롭게 들렸다.

석민이 고개를 더 아래로 숙여 새미의 손목을 살피는 동안 그의 내쉬는 숨이 그녀의 귀볼를
스 치고 지나갔다. 새미는 귀에 스친 감촉이 발끝까지 미치는  전율에 놀라 얼른 그의 손에
서 자신 의 손목을 뺐다. 서 있기조차 힘이 들었다. 석민의 몸짓 하나에도 이렇게 민감한 자
신의 반응을 그에게 숨기고 싶었다.

이 남자는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잖아! 나에게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렇게 떨리다니...
위 험해... 새미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다가오는 석민을  막기 위해 두 손을 앞으로 내
저으며 재빨리 말을 했다.

"괜찮아요. 제발 거기 서요!"

석민은 새미가 갑자기 소리를 치며 자신을 가로막자 새미에게 다가서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녀 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새색시 마냥 머리위로 질끈 틀어 올린 머리칼 몇 올이 자연스럽게 어깨로 흘러내리고 있고,
새 미의 눈빛은 약간 흥분한 듯 반짝이고 있었다. 케주얼한 복장이 아직 고등학생처럼 어리
게 보 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멀어지려  주춤거리는 자세는 무언가에 겁을 먹은 거  같았다.
입술을 깨 물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눈길을 내리는 모습을 보니 새미를 겁먹게 한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임이 틀림없었다. 조금 전 새미를  닦달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자신의
성마름이 후회가 되었다.

이런! 새로운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첫날을 이런 식으로 망치다니... 새미의 연락을 기다리며
새 미가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언젠가 새미의  집 앞에서 본 남자를 아직도 만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등 상상력이  발동을 하면서 미치는 것 같았다.  혹 새미가 사고라도
당했으면 어 쩌지 라는 끔직한 상상에 몸서리가 나기도 했다.

후! 석민의 입에서 한 숨이 새어 나왔다.

석민은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통탄했다. 정말이지 조금 전에는  새미를 영원히
못 보는 줄 알았다. 5년 전처럼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했다면 이제 그녀를 어디서 다시 찾는
단 말 인가! 이 여인에 대한 갈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목마름이 더하다...

자신의 눈앞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불안하게 서 있는 작고 연약한 새미의 모습이 석민의 가
슴으 로 파고들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보일 듯 말 듯.  얼마나 자신의 아파트에
새미가 서 있기를 원했던가!

"밥은 먹은 거야?"

석민은 반쯤 얼어있는 새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네."

새미는 석민은 미소 작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답했다. 이 남자는 카
멜레 온 같구나! 기분이 수시로 변하고 있어. 저렇게 환한 미소를 짓지 않는다면 더 좋으련
만.

"많이 피곤하지?"

"네."

진새미! 또 시작이구나! 입에 꿀이라도  붙은 양 아무 말도  못하고 계속 '예'라니... 새미는
속으 로 자신을 꾸짖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석민의 아파트에 머물  생각에 얼었던 긴장이
아직도 풀 리지 않았다. 아니, 풀리기는커녕 시간이 더 지날수록 온 몸의 말초신경이 다  일
어서듯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그럼 어서 씻고 와. 차라도 한 잔 하지. 샤워하는 동안 내가 준비할게."

욕실의 위치를 알려주며 석민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미는 주방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아파트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앞으로  잠깐이지만 자신이 살 곳이
라 생각 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강석민! 아파트!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석민의 불같은 폭발과 갑작스런 부드러움... 차라리 분노가 더 견디기 쉬운지도 모른다. 따뜻
하 고 잘 웃는 석민은 방어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절대로 석민에게 감정적으
로 깊게 빠져들지 말자. 그는 나를 단지 욕망을 위해 일시적으로 샀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내
가 처음이고 마지막이라는 보장도 없는 도덕적으로 문란한 남자이다.

석민의 아파트를 둘러보는 새미의 심장은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도시적인 세련미와 우아함이 전체적인 분위기였다. 가정적인  분위기보다는 남자 혼자 살기
에 적당한 실용적인 미를 먼저  고려한 느낌이 들었다. 파란 색  줄무늬를 띄고 울퉁불퉁한
질감을 살린 고급벽지, 유리 탁자와 기하학적인 무늬의 소파, 거실의 구석에 놓인 철제로 만
들어진 책 장, 책장 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조각품과 두꺼운 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국적인 느 낌을 지닌 맘에 드는 예술품도 몇 점 있었다.

쯧쯧... 녹색 식물 하나 없다니... 남성 독신자 전용 모델하우스 같잖아.

하지만 거실의 넓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정취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7층에 위치한
방인 만큼 도시 전체의 윤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아마 이 야경에 취해 이 아파트를 구입하
지 않았나 싶다.

부와 쾌락을 약속하는 꺼지지 않는 도시의 화려한 불빛들... 하지만 그건 모두 껍데기일  뿐,
도 시의 약속이 얼마나 허황되고 덧없으며 깨지기 쉬운지 사람들은 알까.

나 역시 그 화려함에 속았던 적이 있었지. 그리고 그 대가로 지금 여기에 서 있다.

새미는 따스한 물로 샤워를 마친 후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일부러 석민과
마 주치는 시간을 늦추고 싶어 오래도록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의 감촉을 즐기며 샤워를
했다. 처음보다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욕실 문을 여는 순간, 주위를 적막하게 감싸 친숙하게 느껴지는 어둠, 거실 전체를 은밀하게
감 싸는 은은한 조명과 탁자 위에 세워져있는 촛불의  아른거림, 어디선가 들려오는 뜻모를
외국 가수의 애수에 젖은 감미로운 목소리가 새미의 걸음을 세웠다.

새미의 심장이 약하게 두근거렸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예감에 두려움과 흥분을 동
시에 느끼며 자신의 몸 안 갚은 곳에서 무언가 요동치며 살아나고 있음을 감지했다.

탁자 위에는 새하얀 케이크와 먹음직한 안주 몇 가지, 두 개의 술 잔이 놓여 있었다.

석민은 음악에 취한 듯 두 눈을 감고 있다가 새미의 기척에 눈을 뜨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 렸다.

새미는 흠칫 숨을 멈추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 둘 사이에  전기가 오고 갔다. 두 사람 중 누구도  말을 꺼낼 수도
움직 일 수도 없는 마법에  걸린 듯 서로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면까지 소유하고 싶다는
듯한 열망 을 두 눈에 가득 담고.

조명을 받으며 앉아있는 석민의 모습이 마지막 남은 새미의 혼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까만 눈썹, 움푹 꺼진 눈, 그 눈 속에 크고 흔들림 없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수
많은 감각을 일시에 느끼게 해주는 저 입술. 석민도 방금 샤워를 마쳤는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 락에 아직 물기가 남아있었다. 그 촉촉함이 강하게만 느껴지던 그의 인상을 조금 부
드럽게 만 들어 주고 있었다. 저 머리 결을 흩트려 놓고 싶어...

새미는 어둠에 묻힌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시월의 가을밤이 오직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
각 에 빠져들고 있었다. 영원히 잊고 살자고 맹세했던 낭만과 사랑의 꿈을 되찾고 싶어지는
밤이 다... 낭만과 사랑... 사랑?

아니! 사랑은 아니야! 새미야! 정신차려!

저 이가 약속 한 건은 영원한 사랑이 아니라 한달 간의 일시적 욕망일 뿐이야!

문득 밤의 주술적인 마법에서 헤어 나온  새미는 차갑게 석민을 바라보고 아직은  진정되지
않아 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로맨틱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무슨 연극을 꾸미고 있죠? 침대로 끌고 가기 위해 이런 수고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석민은 새미의 차가운 반응에 한쪽 눈썹만을 치켜세울 뿐,  대답하지 않고 의자에서 서서히
일 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런 석민을 막기 위해 새미가 팔을 내밀자 그는 쉽게 새미의 반항을 잠재우고 그녀를 자신
의 품으로 조심스럽게 끌어 당겼다.

새미가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열자 석민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녀를 막았다.

"쉿..."

그래도 새미가 석민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을 버둥거리자 그가 강하게 새미를  안으며
그녀 의 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냥 음악을 느껴봐. 우린 단지 춤을 추고 있는 거 뿐이라고."

단지 춤이라고? 그 '단지 춤' 때문에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을 해보라고... 하지만
새 미의 몸과 감성은 이성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석민의 움직임에 빠져들고 있었다.

자신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은 석민의 손은 새미를 애무하듯 쉴 새 없이 부드럽게 그녀의
몸 을 헤매고 있었다. 새미의 머리위로 석민의 조금씩 거세지는 숨결을 느낄 수 있었고,  음
악에 맞 춰 가볍게 흔들리는 그의 다리의 움직임은 감칠 맛 나게 새미의 다리를 잠깐씩  스
치고 있었다.

석민의 가슴에 조용히 머리를 기대며 새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후... 그래, 이건
단 지 춤일 뿐인걸...

석민의 심장박동 소리는 어느 음악보다도 달콤한 음악처럼 새미의  귀에 들렸다. 그의 심장
박동 이 빨라지고 새미의 어깨를 안은 그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새미는 자
신의 배 근 처에서 무언가 기어다니듯 흥분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때 석민의 한 손이 새미의 가슴  근처로 조용히 올라와 반응을 살피듯 한 손가락만으로
살짝 그녀의 가슴을 스쳤다. 새미가 몸을  떨 뿐 아무런 거절을 하지 않자  용기를 얻은 듯
그는 그녀 의 목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그녀의 가슴을 좀 더 강하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옷
위로 움직이는 석민의 손이 새미를 숨쉬기 곤란한 상태로 몰고 갔다. 새미는 작은 신음소리
를 내며 그의 품으 로 세차게 안겼다.

새미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석민은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거칠 게 그녀의 가슴을 매만졌다. 그 부드러움이 석민의 손  안 가득 느껴지자 그는 새미가
움직일 수 없도록 그녀의 다리를 세게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바짝 끌어안았
다. 마치 천국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새미의 목근처를 헤매던 석민의 입술은 어느덧 위로 올라와 손의 움직임에 맞춰 그녀의 입
술을 찾고 있었다. 석민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자 새미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
으며 그 황홀함으로 빠져 들어갔다. 거칠게 그의 혀가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입안으로 침
입하고 있었 다.

비로소 자신이 있고 싶었던 장소에 온 것 같은 기쁨이 새미의 옴 몸을 휘감으면서 더욱  석
민의 감촉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이미 새미에게는 한 올의 이성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이 남자의 느낌  뿐 그 무엇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오래 잊고
살아온 감각들 이 해방을 원하며 일시에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래서 석민이 부드럽게 속도를 줄여가며  자신을 조절하는 것도 새미는  알아채지 못했다.
석민 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새미는 불만의 신음소리를 터뜨리며  그를 더 세게 끌어당겼다.
갑작스럽 게 새미의 혀가 석민의 입천장을 건드리며 그의 입술을 빨자 그는 부르르 몸을 떨
다 세차게 새 미를 자신과 떨어지게 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새미가 반쯤 눈을 감고 유혹하듯 석민을 바라보았다.

그런 새미의 여성스런 매력에 석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떤 준비도 되지 않은 널 안을 생각은 없었는데, 괜한 생각이었나?"

중얼거리듯 작게 내뱉는 석민의 말이 새미의 이성을 조금씩 돌아오게 만들고 있었다.

새미의 부풀어오른 입술을 넋을 잃고 쳐다보던 석민은 고개를 돌리고 베란다로 걸어가 창문
에 이마를 기대고 섰다.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그는 자신의 욕구불만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
을 감 았다.

새미를 눈앞에 두고 참는다는 것은  불가능처럼 느껴졌다. 뭐, 나는  성자도 아닌걸. 하지만
첫 날 부터 짐승처럼 새미에게 달려 들 생각은 아니었다.  서로에게 익숙할 시간을 주고 자
연스럽게 가까워 질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5년 전의 실수는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

새미는 석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워 했다.  내가 또 무엇을 잘못 한 걸까.  아마도
남자 에 미친 여자처럼 석민에게 안기는 내가 혐오스러웠나 보다. 나도 내가 혐오스러운걸...
돌처럼 차갑던 '진새미'는 어디로 간 걸까... 항상 저 남자 앞에서는 수치스러운 모습만 보이
는 구나. 새 미는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새미가 자기모멸감에서 헤매는 동안 석민은 그녀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려 질문을 던졌다.
조 금 전 둘 사이에 있었던 기억으로 그의 눈에는  자조적인 빛이 남아있었고, 어조는 차분
했지만 먼 곳에서 들려오듯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래, 어머니는 안녕하셔?"

어머니? 새미는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 석민의 질문을  이해하려 얼굴을 찡그렸다. 어찌할
바 를 몰라 비틀던 손목을 풀고 그의 질문을 되물었다.

"오늘 늦은 것이 어머니를 만나고 와서 라고 했잖아?"

그 때서야 새미는 석민의 질문을 이해하고 짧게 대답했다. 엄마의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새 한의 얘기는 물론이고.

"건강하세요."

석민은 과거를 회상하며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석민은 거실 안에 서 있는 새미를  바라보며, 처음 본 순간 번개라도 맞은  듯 자신의 넋을
빼앗 은 새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시끄럽고 정신없이  번쩍이는 나이트에서 마치 딴
세상에서 온 여인처럼 고고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산만하고
혼탁한 주위 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가 새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항상  이상하게 느껴졌지. 널 처음
봤을 때 너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거든."

새미는 고개를 번쩍 들어 석민을 쳐다보았다.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었어... 하지만 모든  것
이 지난 일이다. 과거와 현실 속에서 더 이상의 혼란을 겪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새한이의 미래를 건졌으니 그걸로 만족해. 저 남자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든 나는 참고
이 겨내면 되는 거야. 그리고 회사에서의 성공과 가족을 위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면 되
겠지. 이 젠 나의 삶에 무언가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무섭다...

"새미를 다시 만나고 싶었어. 네가 어떤 사람이든, 누구의 여자가 되어있든 그런  것은 중요
치 않게 느껴졌어... 그냥 널 다시 보면, 볼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싶었던 적이 있었
어."

석민의 눈빛은 여전히 먼 곳을 헤매고 있었다.

석민의 무언가 뜻이 담긴 고백이 새미의 숨을 잠시 멎게  했다. 하지만 그의 고백이 과거형
임을 알아챈 순간 차가운 물에 잠기기라도 한 듯 한기가 느껴졌다. 남자들이란 항상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한다고 하던데... 그 이유인가.

"그래서 나에게 이런 더러운 제안을 한 건가요?"

새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게 감정적으로 빠져들기를 거부하
는 새미의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석민은 강한 자조감에 입술을 비틀면서 대답을 했다.

"더러운? 그렇게 느껴졌나?"

석민은 한 참 동안 말을 잊지 못하고, 자신의 귀가 의심스러운 듯 새미를 바라보았다.

석민도 새미를 여기까지 몰고 온 자신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후회했지만 중요한 것은  다시
새미 를 가까이에 둘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
과거는 잠시 묻어둔 채 새로운 시작을 만들 수 있기를 은밀히 기대했는데... 그녀의 감정 섞
이지 않은 메마른 목소리가 석민에게 상처를 주었다.

석민은 조용한, 하지만 냉소가 깃든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의 꿈꾸던 조금  전의
눈빛 도 다시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돈을 끼어 놓고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너야. 그런 너에게 여전히 끌리
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 나의 기분은 좋았을  거 같나? 나 역시 내 자신이 '깨끗'하
게 느껴지 지는 않더군."

석민은 유난히 '깨끗'이란 단어를 세게 발음하며 새미를 조롱했다.

새미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돈을
돌 려주며 나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새미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 모든 일을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건가요?"

석민의 눈이 분노로 커졌다 작아지며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불끈  쥔 손에 힘이 가득 들어
갔다.

"너는 나를 화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거 같군. 물론 아니야."

물론이라고? 그러면 왜 나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거야.

그래! 그건가. 나와의 계약이 더럽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나를 원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운 거
야. 마치 내 스스로가 내 자신을 혐오하는 것처럼.

새미는 머리 속에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에 더욱 수치감을 느끼고 고개를 숙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죄는 아니잖아? 새미 역시 나를 원하는 마
음 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아니야! 나는 저 치를 원치 않아! 더 이상은 아니라고!!

새미는 자신의 생각에 빠져 머릿속의 생각을  입에 담아 소리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경악 을 했다. 저 이의 눈빛을 보니 내의 말을 들은 것이 틀림없어.

석민의 눈빛이 짙어지면서 새미에게 성큼섬큼 다가서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새미는 움츠려
들며 뒷걸음을 쳤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와의 거리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처녀처럼 보이는군. 남자들이 항상  그 모습에 취해 너에게  몰려들었나? 남자들의 욕망을
위해 서는 너처럼 쉽게 뜨거워지는 여자가 필요한  법이지. 결혼이 아닌 정사를 위한 애인!
그것이 너 에게 딱 어울리는 역이야!"

석민은 새미를 더욱 구석으로 몰아세우며 가차없이 말을 끝낸 후 거칠고 강하게 그녀의 입
술을 빼었었다. 분노를 새미에게 뿜어내듯  정열은 있지만 일말의 부드러움도  없는 잔혹한
키스였다.

새미는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그 뜨거운 열기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키스를 시작했던 것처럼 빠르게 새미에게서 입술을 떼어 낸 그는 그녀를 경멸하듯 노려보며
마 지막 일침을 가했다.

"한 달 후 너의 매력에 여전히 내가 빠져들지는 심히 의심스럽군!"

석민은 충격에 빠져 있는 새미를 남겨 둔 채 뒤를 돌아서 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새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저 방을 치워놨어. 편히 쉬도록 해..."

새미는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석민이가 알려준 방으로  들어갔다. 씩씩거리며 서성대다 분
을 삼키지 못해 베개로 침대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쁜 놈! 카사노바! 이... 이... 더 이상의 욕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애꿎은 베개만 못 살게
굴 다 피곤에 지쳐 겨우 잠이 들었다.

한 밤중에 석민이 새미가 자고 있는 방에 들어와 그녀의 잠든 모습을 한 참 동안  지켜보다
한 숨을 쉬고 이불을 끌어 주고 나가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새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
다. 이 마에 석민의 따뜻한 입술의 감촉을 느끼고 자신이 살포시 웃었다는 것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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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석민의 아파트에 들어온 지 오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나날이
계 속 됐다. 석민은 새벽부터 나가  밤늦게나 되서야 들어오기 일쑤였고, 어떤 날은  한번도
그와 마 주치지 못 한 채 하루가 가는 적도 있었다. 석민은 새미와 마주쳐도 정중하게 행동
할 뿐 그녀의 생활을 터치하지도, 몸에 손 하나 까닥 하지도 않았다. 토요일 밤의 그 남자와
는 전혀 다른 인 물 같았다.

첫날과 둘째 날은 새미 스스로 석민을 일부러 피해 다녔다. 토요일 밤, 그의 냉혹한 말과 잔
인 한 키스가 잊혀지지 않아 그와 부딪치면 못 본 척 지나쳤다. 무엇보다 석민의 품에 안기
기라도 하면 모든 것을 잊고 빠져드는 자신의 나약한 자제력이 더 못 미더웠다. 이성으로는
자신의 배 경을 이용한 석민의 비열함과  성적 문란함을 호되게 비판하지만 새미의  가슴은
그를 그리워하 고 있었다. 새미가 못 견디어 하는 것은 석민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자신의 이
중성이었다.

셋째 날이 되자 석민이 자신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원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 스스로가 새미를 피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연락처도 새벽에 일찍 나가면
서 탁자 위에 적어놓고 가고 필요한 일은 주로 메모나 전화를 이용할 뿐 식사 한번 같이 한
적이 없었 다. 말 그대로 아파트를 같이 쓰는 동거인  일뿐, 그 이상은 없었다. 서로가 철저
하게 사생활을 지켜주고 있었다.

하지만 새미는 석민이 늦게 들어오는 날은 그가 들어올 때까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괜한
걱정 이라고 잠을 자보려고도 했지만 심장만 방망이질 칠 뿐 침대에 누어 시간만 보냈지 정
작 잠은 오지 않았다. 그러다 그가 들어온 인기척이 나서야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잠 들
수 있었다.

한번은 석민이 늦게 들어온 적이 있었다. 새미는 나가서 인사를 하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 껴져 잠이 든 척을 하였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방문을 노크하는 것이 아닌가. 새미는 드
디어 자신을 찾나 싶어 덜컥 겁이 나  계속 자는 척 했다. 하지만 석민은 그저  한 참을 서
있다 그냥 돌아가는 것이었다. 새미는 석민이 그렇게 쉽게 포기할 줄 몰랐다

물론 회사는 뉴그린 백화점과의 계약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새미를 더욱 혼란으로 몰고 갔다. 석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
도 할 수 없었다. 어쩜 더 이상 나에게  아무 미련도 남아 있지 않나 보다. 남자에 홀린  듯
매달리는 내게 질렸나 봐. 스스로에게 되새긴다. 잘 됐어, 잘 된 거야... 진짜?

창 밖으로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오후부터 하염없이 내리던 비는 아직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디오에서는 귀에 익
은 클래식 음악이 새미의 가슴을 녹이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에 젖어 얼룩진 세상의 촉촉
함! 이 세상의 더러움마저 저 비에 깨끗이 씻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며칠 동안의 석민의 무거운 침묵이 새미를 참기 어려운 긴장  상태로 몰고 가고 있었다. 시
간이 지날수록 폭풍 전야의 고요함만큼이나 불안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저 내리는 비와 함
께 녹아 없어지기를...

빗소리에 묻어나는 아련함을 되새기며 그녀는 잠시 과거 속으로 여행을 떠나본다.

석민을 지우려 노력하던 유난히 길었던 스무 살의 겨울. 아스라하게 들리는 스무 살의 순수
가 다른 이에겐 낭만이었지만, 나에게는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 견디기 어려운 책임이 되어
옭매 어 왔었다. 기쁨은 기억하기 어려운 오래 전의 느낌이었고, 삶, 기억, 망각조차 또 다른
구속이 되어 나를 힘들게 했지...

5년 전, 옛날의 나로 돌아가기 위해서 지워야 했던 이름 하나... 석민...

그의 얼굴, 손길, 감촉이 떠오를 때면 그 이름이 수치심인지 분노인지 그리움인지 구별 못한
아 픔이 되어 가슴에 파고들어 심장을 쥐어짰다.

그리고 겨우 그 이름을 먼 과거 속으로 떠나보냈을 때는 이미 평생을 끝없는 외로움 속에서
홀 로 하기로 맹세한 이 후였지. 짙은 외로움 속에서 생각나던 이름만 아는 타인을 숨어 그
리워 할 자격조차 나에게는 없었음으로.

그런데... 그를 다시 만나고. 나는 지금 일상처럼 그의 아파트에 서 있다......

새미는 자신의 눈에서 소리 없이 한 방울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놀라
상 념을 없애고 얼른 눈물 자국을  지웠다. 두 번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선 닫았던 마음
문을 더 욱 단단히 여미는 것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새미는 석민의 무관심에 자신이 반가워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진심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거실 건너편에서 예의바르고 무관심으로 타인처럼 행동하는  그를 보면 왠지 적
막한 사 막에 홀로 서 있는 듯 가슴 한 구석이 써늘해졌다.

어제는 남아 있는 짐을 챙기러 자취방을 갔다가 돌아오면서 '어서 집에 가서 쉬어야지'하고
생 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짧은  시간에 이 곳을 집이라고 생
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후, 회사에 도착하자 옆 테이블의 여직원이 전화가 왔다며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수화
기를 들자마자, 하겸은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진새미! 너 지금 어디서 뭐하는 거야? 왜 집에는 안 들어와?  밤새 너에게 받지도 않는 전
화하 느라 한 숨도 못 잤다구!"

새미는 하겸의 야단을 들으며 한 숨을 쉬었다.

곧 하겸이 눈치 챌 거라 생각했지만 아직은 무어라 변명 할 말을 만들지 못했다. 대전에 계
신 어머니께는 다시 친구 집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안심하시고 믿어 주셨지만 하겸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새미의 친구는 하겸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겸아! 지금은 바빠서 안되고 업무 끝나고 저녁에 보자."

겨우 달래서 전화를 끊고 난 후, 새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이건 시어머니  보다
더 하다니까. 그건 그렇고 뭐라 말하지. 나 역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걸.

뉴그린 백화점과의 계약이 성사됨에 따라 회사는 활기로 가득  찼다. 사장은 백화점과의 계
약을 담보로 은행 등 금융기관에 대출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계셨고, 직원들은 최대한
효율적으 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케팅담당  팀은 본격적으로 미국 바이어와의  계약을 협상
중이고 생산관 리 팀은 백화점과의 계약을 설명하며 하청을 준 생산 공장장에게 어음 만기
를 조금만 늦춰 달 라고 사정하고 있었다.

새미에게는 디자이너팀장과 함께 백화점의 내부 인테리어의 업무가 주어지면서  회사외부로
나 갈 일이 많이 생겼고 한층 바빠졌다. 혹 사장님이 이번 백화점 건으로 자신을 특별히 우
대하시 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할 정도로  파격적인 업무 배당으로 인해 회사에서의  위치가
확고해지고 있었다. 새미는 기본적인 테마를  잡기 위해 잡지와 사진을  뒤적이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닐 거야. 석민에게 단 둘 만의 계약이라고 단단히 못 박아두지 않았던가.

오후 내내 새미는 시장조사를 위해 압구정동과 명동을 돌아다녔다.  시장조사를 마친 후 다
시 회사로 돌아와 디자인팀장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전체적인 실내 분위기를 상의했다. 진취
적이고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지금까지 피오레의 상징이었지만, 새 천년을 노린 사이버 마네
킹을 주인 공으로 분위기를 바꾸어 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았다.

새미가 회사의 일을 마치고 건물을  나서자 인상을 쓴 채 하겸은  새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단 히 벼르고 온 모양이다. 하겸은 새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새미를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 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독립심 강한 새미는  그런 하겸이 반갑지 만은 않지만
위로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헤헤.."

새미는 배시시 웃으며 하겸에게 장난을 걸었다. 하지만 하겸은 끔쩍도 하지 않았다. 늘 장난
꾸 러기 같은 하겸이지만 한 번 진지해지면 누구도 못 말린다.

"그런 식으로 넘어가려 하지마."

하겸은 확실하게 못 박으며 새미를 노려보았다.

후. 장난이 아닌걸!

"하겸아. 나 배고파. 우선 뭐라도 먹으면서 얘기하자."

새미는 하겸의 부루퉁하게 나온 입을 무시하고 억지로 잡아끌어 가까운 음식점으로  데리고
갔 다. 구수한 된장찌개가 일품이라 회사에서 단골로 자주 오는 집이었다. 이 곳에 올  때마
다 비슷 한 음식점에서 일하시는 어머니가 생각나서 새미가 특히 좋아하는 곳이었다.

하겸이 그토록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앞에 놓고도 먹으려 하지 않자 새미는 할 수 없이 머리
싸 매며 하루 종일 고민하여 그럴 듯 하게 각색한 시나리오를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학교 선배 언니가 살던 아파트에 잠깐 살고 있어.  그 언니가 이번에 한 달간 미국
으로 연수에 가셨거든. 그 사이에  자기 집 좀 봐 달래.  그래서 잠깐 들어와 살고 있는  거
야."

하겸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누구?"

"너 군대 간 사이에 알던 선배야. 네가 내 주위 사람 다 아는 것도 아니잖아."

"전화라도 미리 해 주면 안되니? 그런데 널 뭘 믿고 아파트를 통째로 맡겼을까?""

하겸이 다시 농담을 하는 것을 보니 화가  풀렸다는 신호이다. 다행이다! 새미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내 인간성이야 자타가 공인하는 KS마크잖아!"

새미가 필요 없다는 것을 하겸은 끝끝내 석민의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었다. 자신의 주위에
왜 이리 신사인 척 하는 남자가 많은 지 짜증이 났다. 혹 석민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하겸이
무어라 생각할 지 앞이 깜깜했다. 저 우정을 가장하는  태연함으로 어머니에게 고해 바치는
날이면... 끝 장이다!

하지만 시계를 보니 아직 열 시도 되지 않았다. 석민이 돌아 올 시간이 되려면 멀었다.

"야! 이 지역 땅 값 장난이 아니던데. 네 선배라는 사람 꽤 사나보다."

하겸은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달콤하게 웃으며 새미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새 미의 어깨를 연신 주무르며 장난스런 미소를 띄우며 말을 했다.

"새미야! 아파트 구경 좀 시켜 주라! 응?"

"뭐?" 새미는 하겸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안돼! 네가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 해도 그건 안 된다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새미는 딱 잘라 거절했다.

하겸은 아쉽다는 듯이 아파트를 쳐다보며 여전히 입맛을 다졌다.

"그래도 아까운걸. 그럼, 이것만 약속해 줘."

새미는 왠지 너무 쉽게 끝나는 것이 불안해 하겸의 다음 말을 숨죽이며 기다렸다.

"그 선배 귀국하면 제일 먼저 나 소개시켜주는 거다. 나는 연상이 정말 좋더라."

진지하게 말하는 하겸의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 새미는 깔깔거리며  크게 웃었다. 하겸을 잘
알 기에 농담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돈 많은 여자가 아니라?"

새미가 되받아 치자 하겸은 억울하다는 듯이 울상까지 지우며 손사래를 쳤다.

"아냐. 연상의 여인! 물론 돈까지 많다면 금상첨화지만."

마지막 말을 끝내며 하겸은 새미에게 윙크를 했다. 새미와 하겸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새미는 하겸을 보내고 웃으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석민은 새미가 웃는 모습을 7층 높이인 자신의 아파트에서 끊어 오르는 화를 달래며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자신 앞에서는 저렇게 밝게 웃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무엇이든 박살
내 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을 석민을 사로잡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일부러 일을 만들어 회사에 늦게 까지 남아 있었던 자신의 불필요했던 배
려 가 떠올랐다. 문득 문득 새미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고 보고싶어서 일찍 집으로 가
고 싶은 충동이 일 때도 많았지만, 그녀를 위해 인내를  보여주기로 다짐하고 또 그렇게 행
동했다.

우연히 새미와 부딪히기라도 하면 안고 싶은 갈망에 온 몸이 떨렸지만 순간의 욕망으로 망
치기 에 그녀는 그에게 너무 소중한 존재였다. 그 전에 신뢰를 쌓고 싶었다. 우선 오직 성적
인 이유 로 새미를 이 곳에 불러들였다는  그녀의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 일주일이 넘도록
그녀를 홀로 놔두었다. 여자와의 관계에서 정신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인 적은 이번이 처음
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또한, 새미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욕망이 자신
을 삼킬 듯 괴롭혀 참 기 어렵게 했다. 매일 밤 자기 전에 찬물로 샤워를 했지만 그녀를 향
한 갈망은 식을 줄을 몰랐 다.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내가 애쓰는 동안 다른  남자와 저렇게 히히덕거리다니. 지금
이라 도 당장 내려가 남자의 멱살을 잡고 둘을 떼어놓고 싶었다. 가만, 저 남자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맞아! 새미의 자취방에서 함께 나오던 그 남자!

제길! 석민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새미가 그와 헤어졌다고 했을 때 철
썩 같이 그녀의 말을 믿었다. 애인을 나 몰래 계속 만나면서 나의 아파트로 들어와 사는 이
유가 뭘 까.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돈이다...

석민은 속에서 쓴 물이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
었지 만 다시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괴로웠다. 그녀의 순수하고 신비롭게 까지 보여지는
아름다 움에 잠시 눈이 멀었던 것이다. 그는 난생 처음 미칠 듯 질투에 휩싸이자 어찌할 바
를 몰랐다.

석민이 분노를 삼키려고 애쓰는 사이에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석민은 온 몸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새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머! 오셨어요?"

새미는 적어도 열 한 시가 넘어서야 올 줄 알았던 석민의 예상치 못한 등장에 어색하게  미
소를 지었다. 토요일 이후로 마주쳐도 짧은 대화만 오고 갔을 뿐 그와 지금껏 오래 마주 한
적은 없 었다. 그래서 갑작스런 석민과의 마주침이 당황스러웠다.

새미는 문을 닫고 구두를 천천히 벗으면서 진정할 시간을 가졌다. 언제쯤이면 저 남자를 편
안 하게 대할 수 있을지 궁금해하면서...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새미는 석민의 안에서 차갑게 불타오르는 분노를 보지 못한 채 질문을 던졌다.

"식사는 해셨어요?"

석민의 입술 언저리가 실룩거렸다.

"음... 밖에서 먹고 왔어."

석민은 자신의 화를 숨기기 위해 짧게 대답했다. 밖에서 먹고 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오랜
만 에, 아니 새미가 아파트로 이사온 지 처음으로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일곱 시부터 기다
리고 있 었다. 하지만 배고픈 것은 이미 잊혀진지 오래다.

석민은 새미를 잡고 흔들어야 할지,  소리쳐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망설이며 어디서 오는
길인 지를 물었다.

"어디서 오는 거지?"

"아... 친구 만나서 저녁을 함께 했어요."

친구라... 친구란 단어에 숨어있는 은밀하고도 복합적인 의미가 석민을 괴롭혔다.

"남자... 여자?"

맙소사! 석민은 이런 유치한 질문까지 던지게 만드는 새미가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네?"

새미는 그때서야 석민에게서 뿜어 나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서서히  긴장하기
시 작했다. 이번에도 연락도 없이 늦어 화가 난 건가. 왠지 남자 친구를 만나고 왔다고 말하
면 불 위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 같아 본능적으로 저도 모르게 거짓말이 입에서  튀어나
왔다.

"여자요... 대학 동창이에요.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불필요한 설명까지 덧붙이고 아차 싶었다. 새미의 귀에도 변명처럼 궁색하게 들렸다.

석민은 새미의 거짓말에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역겨움을 느꼈다. 그의 눈빛이 한층 위험스
럽 게 빛나고 입술은 한 일자로 굳어졌다.

새미는 거실 전체에 흐르는 험악한 분위기에 압도당할 것  같았다. 현관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 어와 석민을 마주하고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테이블  위에 핸드백을 아무렇게나 던
져놓고 그가 화가 난 이유를 알아내려 얼굴을 찌푸리고 그를 살펴보았다.

지난 며칠 동안의 고요함을 답답하게 여긴 것에 대한 응답인가. 잠깐이나마 그 고요함을 깨
고 싶다는 충동을 가졌다니...

오후 내내 내부 인테리어에 관한 시장조사를  하기 위해 압구정동 의상숍을 돌아다닌  탓에
발목 이 지끈거리고 시작했다. 새미는 허리를  숙여 발목을 만져보았다. 피가 맺힌 듯  아파
오자 얼굴 을 찡그리며 발목을 천천히 돌려보았다.

화를 삼키며 새미의 동작을 유심히 지켜보던 석민은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가 앉아있는 소파
아 래에 한 쪽 무릎을 끊고 앉았다.

새미는 자신의 손을 치우고 대신 발목을 잡는 그의 손을 말리며 황급히 소리쳤다.

"괜찮아요!"

석민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외침을 무시하고 왼 손으로 발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 발바닥을
정 성스럽게 돌렸다. 바로 조금 전 화가 나 있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부드럽고 조심스
러운 손 길이었다. 한 참 후 다른 발목으로 옮겨 다시 동작을 반복했다. 갓난아기를 달래 듯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그녀의 지친 발을 달랬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석민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새미는 처음에는 떨리고 당혹스러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온  몸의 긴장이 풀어지며
나른 해졌다. 석민의 능숙한 손길에  힘이 빠지면서 발목의 뻐근함 대신  익숙한 열기가 그
자리를 대 신했다. 자신의 가슴 근처에 손만 뻗으면 잡힐 듯이 그의 까만 머리가 보였다. 새
미는 야릇한 충동을 느끼자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손으로  매만지면 미끄러지며 손가락 사
이로 빠지곤 하던 그의 머리카락의 감촉이 얼마나 감미로웠던가...

은근히 마사지를 하는 손길을 즐기던 새미는  피곤했던지 온 몸이 노곤해지며 피로가  풀리
자, 앉은 채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석민의 싸늘한 눈길을  느
낀 것은 나의 착각이었나... 음...

어느새 석민의 손이 발목을 거쳐 무릎까지 아주 조심스럽게 올라오고 있음을 새미는 알아채
지 못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 위로 반쯤 올라간 치마 속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새미는 잠결에 기분 좋은 몸의 긴장감과 흥분을 느끼고 달콤한 미소를 띄우며 한 숨을 내쉬
었 다. 아... 이 꿈에서 깨지 말기를... 그의 계획된  집요한 손의 움직임에 맞춰 새미는 무의
식중에 허리를 뒤틀었다. 돌연 석민의 손이 그녀의 속 옷 안으로 들어오자 새미는 기겁하여
잠에서 깼 다. 꿈이 아니었어...

새미는 석민의 손을 뿌리쳤다.

"말해봐! 내가 누구지?"

새미에게서 손을 뗀 석민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끊고 앉아 그녀를 강렬하고 무섭게 노려
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나운 분노가 여과 없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었다.

"석... 석민씨...!"

새미는 얼른 올라간 치마를 끌어내리면서 석민의 이름을 속삭이듯  약하게 불렀다. 그의 손
길에 아직도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갑작스런 그의 분노에 두 눈만 깜박이면서...

"그래... 석민이야! 똑똑히 봐. 널 이렇게 미칠 듯한 흥분으로 몰고  가는 것은 다른 이도 아
닌 바 로 나야! 강석민이라구!"

석민은 다짐하듯 강조하며 소리를 버럭 지른 후, 저지하는 새미를 거칠게 소파에 뉘이고 그
녀 의 몸 위로 올라왔다. 그의 입술이 저항하는 그녀의 입술에 세게 부딪쳐왔다. 그는  강제
로 그녀 의 입을 벌려 혀를 밀어 넣고 잔인하고 야만스럽게 키스를 했다. 석민의 손은 그녀
의 깊은 곳을 헤매고 있었다.

새미는 정신을 잃을 듯 아득해지며 점점 다른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영혼이 꿈속을 헤매이
듯 눈앞에 불꽃이 터지며 온 세상에 그와 단 둘만이  존재하는 환희를 느꼈다. 어느새 새미
의 옷은 반쯤 벗겨져 있었다.

새미는 그의 푹풍같은 애무를 받으며 넋을 잃어 가는 가운데 문득 그의 손길이 예전과 다르
다 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언가 철저하게 계획된 차가움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예
전에는 새미를 보호하고 망설이는 부드러움과 그녀의 반응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있
었지만, 지 금은 단지 그녀에게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하려는  거친 소유욕과 폭력에
가까운 다급한 욕망만이 존재했다. 비록 둘 사이에 사랑이 없다 할지라도 분노에 싸인 동물
적인 욕망만으로 안기고 싶지 않았다.

석민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와 새미의 가슴을 깨물자 그녀는 몸서리치며 떨다 마지막 이성의
끈 을 부여잡고 그를 밀어냈다.

"싫어... 이러지 말아요. 이런 식은 싫어요."

"넌 내꺼야! 누가 주인인지 영원히 잊지 않게 해주겠어!"

석민은 새미를 거절을 무시하고 더욱 거친 움직임으로 그녀를  안았다. 저항은 용납하지 못
하겠 다는 거친 손길로 그녀의 온 몸을 더듬었다. 숨넘어갈  듯한 빠른 호흡을 삼키며 그녀
의 입을 막 았다.

새미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며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그만.... 해요. 제발...."

새미의 흐느낌이 석민을 조금씩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했다.

고개를 들어 새미의 눈을 보자 하얗게 질러 바들바들 떠는 연약한 모습이 그의 가슴속으로
파 고 들었다. 그의 입에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석민은 새미에게 손을 떼고 소파에 주저앉아 머리를 두 손에 묻은 채 타오르는 욕망과 분노
를 자제하려 노력했다. 몰아쉬는 거센 숨이 아직도 제 호흡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제기랄! 가! ... 어서 네 방으로 가!"

새미는 달음박치며 자신의 방으로 뛰어간 후 방문을 잠기고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
가 벌벌 떨려 서 있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터질 것 같은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
다.

밖에서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며 깨지는  소리가 났다. 석민의 안전이  걱정스러웠지만 감히
나갈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다음에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지고 있었다.
****************************
7

새미는 한 잠도 못 자고 번민에 휩싸였다.

지난 일주일간의 석민의 무관심과 어젯밤의 폭발... 왜 나에게 무관심하던 그가 갑자기 돌변
한 걸까. 석민의 눈빛에 담긴 분노가 다시 떠오르자 그녀는  이불에서 빠져 나와 방안을 어
지럽게 서성였다. 이런 관계가 가능 할 거라고 믿었다니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모든 것을
없었던 일 로 하여야 한다... 더 이상 석민을 마주 할 수 없다!

새미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석민은 어둠이 가시지 않은 창 밖을
내 려다보고 있었다. 거실의 테이블에는 어렴풋하게 뚜껑이 열려져  있는 양주병과 빈 술잔
이 놓여 있었다.

새미가 스위치를 올리려 하자 석민은 말렸다.

"아니! 켜지마!"

새미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의 입가에는 쓸쓸한 미소가 담겨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어둠
에 갇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그의 까만 실루엣만이 보였다. 어둠을 사이게 두고 및 분간의
침묵이 흘렀다.

"일어났어?"

주저하는 듯한 가라앉은 허스키한 목소리를 듣자 새미는 갑작스런 동요를 느꼈다.

새미는 석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어둠을 뒤로  서 있는 그의
어깨 에 짙은 외로움의 무게가 느껴졌다. 어제 일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회하는 듯한 변화에
새미는 흔들리고 있었다.

"밤 새 생각했어! 어제 일... 이성을 잃었던 거 사과할게!"

여전히 새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너를 그렇게 다룰 권리가 없는데... 많이 놀랐니? 어제는 잠시 이성을 잃었나봐."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석민은 그녀의 반응에 무기력함을 참지 못하고 거친 손길로 머리를 세차게 쓸어 올렸다.

"뭐라 말 좀 해봐!"

"저... 저도 생각을 해봤는데... 제가 이 곳에서 나가야 할 거 같아요. 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갚 을게요."

석민은 순간 짧게 욕설을 내지르며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물론  어제 실수 한 것은 알고
있 다. 하지만 밤새 번민하며 어렵게 사과를 하는 나에게 고작 나가겠다니! 너의 말 한마디
에 쉽게 너를 포기할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야! 너의 마음을  얻기가 이렇게 힘들어야
하니... 분노 와 무력감이 한꺼번에 석민에게 몰려들었다.

그의 폭력성에 놀라 새미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석민은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며 새미를 노려보았다.

"어제 일은 사과했잖아! 아직 우리 계약은 유효해! 내가 질투를 참아내지 못했다고 다시 널
보 낼 거라고 생각하지마!"

질투라니? 새미는 예상치 못한 석민의 대답에 혼란을 느꼈다.

"지난 일주일은 내가 생각이 짧았어.  네가 나에게 익숙해질 시간을  주겠다는 말도 안돼는
이유 로 일주일이나 널 혼자 내버려두다니. 이젠 우리도 지난 과거는 지우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계속되는 석민의 말에 새미는 기겁을 하고 손으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막았다. 무얼 다
시 시작해? 더 이상 그의 욕망의 도구로 남을 수는 없어!

"아니요! 돈 때문이라면 제가 어떻게든..."

"그만!"

석민은 노기등등한 큰 소리로 새미의 말을 가로막고 잠시 거세지는 숨을 가다듬었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냉정한 목소리로 차갑게 말을 이었다. 새미 앞에만 서면 자랑
해 오던 강철같은 자제력을 쉽게 잃는 자신이 싫었다.

"약속대로 피오레에게 백화점 자리를 내주었어. 다시 계약을 취소하라는 말인가?"

아! 백화점 자리... 새미는 사업상의  거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손목 을 비틀며 입술을 깨물었다 .

"나는 계약조건을 모두 이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 나에게는  이 계약을 통해 얻은
이득 이 하나도 없어. 새미도 더 이상 거리를 두지 말고 나에게 최선을 다하기를 기대하지!"

"최선이요?"

새미는 주저하면서 확인하듯 물었다.

"적어도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 동안은 나에게 충실하기로 한 것이 우리의 계약이 아니었던
가? 물론 더 이상 다른 남자에게 바칠 시간도 남아있지 않을 테지만!"

"이건 미친 짓이에요!"

"그걸 동의한 너도 이미 같은 배를 탔어.  바다 한가운데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건가? 나를
더 이상 시험하려 마!"

새미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단호한 자세로 말을 마친 후, 석민은 떨고 있는 그녀를
한 참을 바라보았다. 새미를 편하게  해주겠다는 자신의 일주일간의 희생이  모두 물거품이
되다니... 그는 입가를 비틀며 쓴웃음을 지웠다. 하지만  새미가 달아나는 것도,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오늘 저녁에 회사로 데리러 갈게."

새미를 쳐다보던 석민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베란다로 시선을 돌리며 마지막 일침을 가했다.
서 서히 새벽의 어둠은 사라지고 안개 자욱한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침은 내가 준비할게! 출근할 준비해야지."

그 말만을 남기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새미를 충격과 경악 속에 남겨둔 채.

새미는 무너지듯 쇼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맙소사! 설마 어제 못 마친 일을 끝내려 한다는 뜻일까... 안돼!

이미 석민에게 깊이 빠져버렸는걸. 아마 처음부터 그랬을 거야... 나이트에서 석민과 눈이 마
주 친 순간부터 나는 그의 것이었어. 잊었노라고, 한 순간의 실수였을 뿐이라고 믿고 살아왔
지만 한번도 석민을 지운 적이 없었던 거야. 그래서 석민이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외로움에
목이 메 이고, 그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하루는 살아갈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를  사랑
해...

오랫동안 부정해오던 진실 앞에서 새미는 쇼파에 우두커니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가 나를 원한다는 사실만으로 감격해 그의 아파트에 들어왔지. 그를 곁에서 볼 수 있다는
사 실만으로 평생을 지켜온 도덕관념을 저버릴 수 있었어. 하지만... 그와 더 깊어진 후 헤어
지게 된다면 살아갈 수 없을 거야... 더 늦기  전에 여기서 끝내야 한다. 이미 너무 늦은  걸
까.

식사를 마친 후 새미가 회사로 떠날 준비를 마치자, 석민은 그녀를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
다.

"가지. 오늘부터 내가 데려다 줄게!"

거절의 대답은 용납 못한다는 비장함이 서려있는 말투였다.

새미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눈만 깜박거릴 뿐이었다. 석민을 향해 타오르는 애정과 그 불
길 에서 재로 남기 전에 자신을 지키고 싶은 갈등 사이에서 힘겨워 하던 새미에게는 거절할
힘조 차 남아있지 않았다.

석민은 새벽의 전쟁은 까맣게 잊은 듯 새미의 망설이는 눈빛을 사로잡고 그녀의 입술에 가
볍게 키스를 했다. 살포시 스치는 감촉에 새미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 부드러움에 목
이 메이 고 울컥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벌어진 입술을 손가락으로 쓰다
듬은 후, 앞 장을 섰다. 마치 전쟁에 나가는 마냥 씩씩하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
어갔다.

석민의 선포가 있던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새미와 석민은 지하에 위치한 작은 카페를 찾
았 다. 어둡고 음침한 조명아래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벽에는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그림이
몇 점 걸려 있었다. 조명이 너무  희미해 퇴폐적인 분위기마저 일었다. 읽기 어려운  낙서가
벽에 가득 쓰여져 있었고 실내 한 가운데에는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들이 놓인 공간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연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곳을 그가 알다니... 뜻밖이었다.

"형! 우와! 오랜만이네."

석민이 들어서자마자 무대 위에서 누군가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척 했다.

어리둥절해 있는 새미에게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석민은 그들에게 다가가 모두와 포옹까지
하 며 인사를 했다. 몇십 년 동안 떨어져 살던 이산가족을 만난 듯 정겨운 광경이었다.

그 중 노랑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보컬로 보이는 남자가 새미를 쳐다
보 며 무엇인가 말하자 석민이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고 모두를 큰 소리를 내며 킬킬거렸
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새미는 자기 얘기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얼굴이 빨개졌다.
얼 른 모른 척하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카페 내부를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래도 지난 며칠 동안 이유 없이 석민과 돌아다니던 곳에 비하며 여기는 꽤 괜찮은 선택처
럼 보였다. 로맨틱한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에서의 어색한 정중함, 드라이브 중 내내  흐르
는 침 묵, 미술관과 박물관에서의 의미  없는 대화들. 석민과 지루한 박물관을 찾게  되다니
아직도 믿 어지지 않았다.

석민은 폭발 할 듯한 긴장 속에서도 끝없는 인내로 새미를  대했다. 석민이 무슨 말을 해도
새미 는 퉁명스런 어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새미로서는 그에게  빠져들지 않기 위한 최소한
의 몸부림 이었다. 순간 순간마다 석민의 긴장을 자신의 손으로 달래주고 싶은 충동을 힘겹
게 누르는 자 신과의 싸움이었다.

둘의 시간을 맞출 수 없을 때를 빼고는 석민은 거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새미의 회사로  찾
아왔 다. 자신이 올 수 없을 때에는 운전기사를 보냈다. 맙소사! 운전기사라니. 어젯밤 자신
을 모시러 온 운전기사의 깍듯함이 떠오르자 새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건 나의
안전을 생각한 다기보다는 마치 감시자를 세워두는 것 같아. 내가 무얼 하는지 매시간 마다
석민은 체크하고 감시한다. 생각에 잠긴 새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한 참 얘기를 나누던 석민이 새미가 앉아있는 자리로 내려오자 그들은 환호를 지르며 음악
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귀에 익숙지 않은 비트 강한 헤비메탈 풍의 음악이었지만 진정한 자
신만의 세상에서 맘껏 젊음의 열기를 발산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몇몇 손님들은 일
어서서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새미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음악에 취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그들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 냈다. 하루 종일 긴장한  탓에 움추러 들었던 신경이 음악을  듣자 완화되었고 자연스레
그들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도취되었다. 옆자리에서 그런 새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
는 석민의 존재 마저 까맣게 잊고 음악에 몰입했다.

음악이 끝나자 강렬한 무대 매너를 보여준 베이시스트가 석민의 자리로 다가왔다. 카페에서
언 더그라운드 밴드의 일원처럼 보이지 않는 짧게 자른 머리스타일에 커다란 만화풍의 그림
이 그 려져 있는 셔츠를 입었다.

어디선가 본듯한 인상에 새미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거렸다.

베이시스트는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우며 새미에게 유혹하듯 윙크를 던졌다.

"형! 이 매혹적인 아가씨는 누구야?"

"네 실력은 나아지지 않는구나! 그런 실력으로 이곳을 벗어날 수 있겠니?"

석민은 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코웃음만 치며 야유를 던졌다.

"우리의 음악 세계을 이해하지 못하는 형의 무지를 탓하라구!"

"내가 이해 못했다면 넌 지금 이 자리에 없었어!"

현민은 석민의 말에 졌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에게 말을 거는
옆 테이블의 팬들과 짧게 인사를 마친 후, 새미를 향해 정겹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우리형은 소개시켜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거 같은데, 우리끼리 하죠. 저는 여기  앉아 있는
냉혈 한의 유일무이한 동생 강현민이라고 합니다."

"네? 친동생요?"

새미는 현민의 소개에 놀라 되묻고 말았다.

"하하! 믿기지 않죠? 이런 멋없는 형에게 저처럼 인간적이고 잘생긴 동생이 있다니. 다들 놀
라 더군요. 저... 손 떨어져요."

"아!... 진새미입니다."

그 때서야 새미는 손을 내밀었다. 새미가 내민 손을 덥석  잡으며 현민은 연신 그녀에게 아
부성 이 짙은 칭찬을 해댔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평소에 형이 데리고 다리던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인데요. 새
미씨 덕분에 우리 멤버들이 힘을 얻어 최고로 멋진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그 능청스런 연기에 새미를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석민은 새미의 웃음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등을 꼿꼿이 세웠다.

"장난 그만해."

석민의 반응에 눈을 반짝거리며 현민은 더욱 새미에게 치근거렸다.

"저런! 우리 형 성질 나오네! 형이랑 그만 두고 저랑 잘 해 볼래요?"

"그만 그 손놓고 네 자리로 꺼져!"

석민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힘이 서린 싸늘한 어투로 명령을 내리고 노기 띈  눈빛으로
현 민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현민의 안색이 변하더니 새미의 손에서 황급히 손을 빼며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형! 농담이었어!"

석민의 눈치를 살피며 현민은 공손한 태도로 새미에게 사과까지 했다.

"죄송해요. 당황했어요? 우리형은 농담도 안 통한다니 까요."

둘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새미는 한 형제이지만 너무나 다른 그들의 모습에 신기해하며 몰
래 둘을 감상했다. 무표정하게 앉아 차갑고 카리스마적인 매력을  자아내는 석민과 달리 현
민은 만 사가 아무 걱정이 없다는 듯이  여유롭게 웃으며 소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
다.

현민과 얘기를 나누던 석민은 핸드폰이 울리자 밖으로 나갔다. 몸을 감싸는 정장을 입은 세
련 되고 귀족적인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카페에 있던 아가씨들 대부분이 모두 그를 쳐다
보았다.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서린 남성미에 압도당한 한  여성은 황홀한 듯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서 눈 을 돌리지 못했다.

새미는 석민에게 침을 흘리는 카페 안의 여자들을 보자 화가  났다. 저런 식으로 얼마나 많
은 여 자들을 홀리고 상처를 주었을까.

새미가 멀어지는 석민의 뒷모습에 넋을 읽는  모습을 바라보며 현민은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었 다.

"우리형이 여자를 소개시킨 적은 처음입니다. 마음 놓으셔도 돼요."

새미가 얼굴이 빨개져 대답을 못하고 음료수만 들이켜자 현민은 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
렸다.

연인사이로 오해하는 현민에게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막막했다. 불편해 하는 새미의 기분을
눈 치챈 현민은 자신이 음악을 시작한 계기를 털어놓으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는 집안의
반대가 심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음악을 포기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했다.

현민의 얘기를 듣자 그와 닮은  동생이 떠오른 새미는 그에게 정을  느꼈다. 음악을 말하는
그의 얼굴이 빛을 발하는 듯 느껴졌고 그가 지닌 생생한 삶의 열기가 그녀에게도 전해졌다.
새한이 도 이 남자와 같이 자신의 꿈을 사랑할까. 새한이가 원한다면 그의 길을 밀어주어야
하는 걸까. 그래도...

현민은 생각에 잠겨 있는 새미에게 그녀를 봤을 때부터 계속 궁금해하던 질문을 던졌다.

"우리형 만난 지는 오래됐어요?"

오랜 사이처럼 허물없이 대하는 현민의 태도에 마음이 편해진 새미는 스스럼없이 대답을 했
다.

"글세...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쯤이에요. 다시 만난 것은 얼마 안되고요... 우연히 다시 만났
어 요."

새미의 대답에 현민의 눈동자가 커지고 안색이 변하더니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현민의
입 이 벌어지며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새미씨! 맞아요! 세상에!"

"네?"

현민의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에 새미는 그를 쳐다보았다.

현민은 머리를 딱 친 후에 지금까지의 장난기를 모두 버리고 진지한 자세로 새미를 대했다.

"그 때 석민형 오피스텔을 찾아왔던 아가씨 맞죠?"

새미는 현민의 질문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저 기억 안나요? 5년 전 우리 형 오피스텔에서 본 적 있죠? 제가 불러도 그냥  달아나셨잖
아 요."

그 때서야 현민의 질문을 이해하고 새미는 그를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5년 전 석민의 오피
스텔 새 주인이었던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그녀 역시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현민은 어색한 미소를 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럴 줄 알았어야 했는데... 형이 데려올 여자가 또 누가 있겠어?"

스스로가 한심스럽다는 듯 혼잣말을 하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더니 현민은 그녀에게  고백
조로 말을 했다.

"그 때 형이 무척 힘들어했어요. 그렇게 흔들리는 형의  모습... 처음 이었어요. 완전히 넋이
나가 새미씨를 찾아 헤맸죠! 제 실수였어요. 제가 새미씨를 끝까지 뒤쫓아갔어야 했는데. 형
이 기다 리던 여자인 줄 정말  몰랐어요. 머리가 긴 아가씨라고 들었거든요. 다시  한번쯤은
찾아올 줄 알았어요"

새미는 자신으로 인해 석민이 힘들어했다는 그의 설명에 온 몸에  힘이 빠졌다. 그 날 이후
로 그 가 새미를 찾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어.

석민과 함께 보낸 밤 이후로 그를 잊으려 아르바이트를 몇  건씩 뛰면서 바쁘게 보냈다. 조
금이 라도 한가해지면 물밀 듯이 떠오르는 그에 대한 기억에 자신을 학대하다시피 하며 일
을 하는 바람에 몸무게도 6킬로그램이나 빠졌다. 밤이 되면  너무 피곤해 생각할 여유도 없
이 잠이 들었 지만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꿈속에서 석민을 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새미의 몸은 초취해지고 마음은 황폐해져  갔다. 석민의 빛나던 열
정 가득한 눈이 새미를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그녀는 6주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석민에 대한 그리움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 결과
가 어 떻든 그를 보고싶었다. 더 큰 상처를 받더라도  다시 만나 그의 반응을 확인해야만했
다.

마침내 어렵게 오피스텔 문을 두드렸을  때 처음 보는 남자가 문을  열어 당황했었다. 그냥
도망 가려다 혹시나 하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 석민씨 있나요?"

그는 새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을 했다.

"미국 갔는데... 누구시죠?"

"네?"

새미는 충격으로 한참 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딘가 혼자 숨을  곳을
찾아 천천히 등을 돌리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새미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나가자 그가 새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물어볼 게 있어요."

새미는 울먹이는 모습이 들킬까 두려워  얼른 뛰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가 쫓아오는
소리 에 버튼을 재빨리 누르고 홀로 서있는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치밀어 오르는 흐느낌
을 억제하 려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석민을 잊지  못하고 오피스텔까지 찾아온 자신이 바보
처럼 느껴졌다. 그 날 무슨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때 나를 부르던 그가 석민의 동생이었다니... 석민과의 하룻밤을 보낸 그 다음 날, 가능하
다 면 기억마저 자르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머리를 짧게 잘랐었다.

"이미 두 번이나 비행기 예약을 연기한 상태인 데다, 대학원 등록을 위해 형은 미국에 가야
만 했어요. 아버지가 형 때문에 예민해지셔서 더 이상 한국에 머물러 있을 형편이 아니었죠.
형이 미국행을 자꾸만 연기하자 다시 영화라도 만들까봐 화를  내셨어요. 새미씨 때문에 많
이 망설이 다 저에게 부탁을 했죠. 부탁보다는 협박에 가까웠지만. 새미씨가 혹시나  찾아오
면 형을 대신해 서 연락처를 받아두라고요. 하지만 새미씨가 너무 급히 뛰어가서..."

석민이 자신의 연락처를 알기 위해 현민을 오피스텔에 남겨두었다는 말에 새미는 심장이 세
차 게 뛰었다. 그 날 이후 그의 반응을 떠올렸지만 한번도 나를  찾고 싶어 할 거라고는 생
각하지 못했어. 말없이 사라진 새미 때문에 혹 당황할지도  모른다 예상했지만 끝내는 차라
리 다행이라 고 여길 거라 믿었다.

"우리형이 새미씨를 찾아낼 줄 알았어야 했는데... 석민 형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잖아요. 이
제 우리 형 그만 괴롭히고 행복하게 해주세요. 저는 형이  평생 혼자 살까봐 얼마나 걱정했
다고요. 제 실수로 결혼도 못하면 어떡하나... 여자를 믿지 않던 형이 처음으로 빠진  사랑이
었거든요. 형 수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새미는 현민의 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랑
이란 단어가 목에 걸려 어렵게 나왔다.

"형이 저를 사, 사랑했어요...?"

"당연하죠! 거의 미친 듯이 사랑에 빠졌죠!  그게 아니라면 왜 유학까지 포기하고 형수님을
찾으 려 했겠어요? 만약 형수님이 올 거라는 확신만 있었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미국으로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나를 사랑했다고? 겨우 한번의 만남으로? 그래서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오라는 말도 안 되
는 제 안을 하고, 지난 며칠 동안 나의 무심함 속에서도 정중함을 잊지 않았던 것일까. 의미
를 알 수 없는 석민의 눈빛이 사랑이라면... 현민이가 나를 위로하려 지어낸 말일 수도 있어.
우리가 한 달간의 계약을 한 사이임을 알지 못하고 혹시나 형수가 될까봐 미리 점수 따려하
는 걸 수도 있 잖아. 새미의 머리 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새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밖에 나가있던 석민은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그는  동
생과 몇 마디 얘기를 더 나누다 인사를 한 후 새미를 데리고 아파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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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아파트에 도착해서도 새미의 가슴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모두 지난  일이라고 스스로를
열심 히 타일렀지만 석민에 대한 기대가 샘솟아 설렘을 막을 수  없었다. 5년 전 한번의 만
남으로 나 를 잊지 못하고 방황했다던 현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곁에 머물러 사랑을 감
히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하는 나를 그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과거와 현재 사이의 불투명한 경계 사이에서  헤매는 그녀에게 석민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잔을 건넸다.

"내 동생 때문에 많이 놀랐지?"

새미는 고개를 들어 석민을 바라보았다. 그는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의 단추를 서너개 열
어 놓고 있었다. 긴장을 푼 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어느 때와 다르게
편안해 보였다.

"형제가 별로 안 닮았어요..."

생각에 잠겨 있던 새미는 아무 뜻 없이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석민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침묵을  지키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
다.

"사실 우린 어머니가 달라."

감정이 실리지 않은 지극히 단조로운 말투였다.

"..." 새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미안해요."

석민은 한숨을 내쉬더니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아픔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우리 어머니는 몸이 약하셨어. 늘 사업으로 바쁘신 아버지는 어머니를 돌볼 시간이 없었지.
항 상 침대에 누워 계시던 모습이 기억의 전부야...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돌아가셨어... 그래
도 어 린 마음에 어머니를 사랑했나봐... 어머니의 관에 흙이 덮일 때 어머니가 영영 깜깜한
땅 속에 갇힌다는 생각에 울면서  어머니를 여기에 두지 말라고  소리쳤지... 그래서 장례를
끝까지 못보 고 쫓겨났지만."

남의 얘기를 하듯 잔잔한 어조였지만 새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먼 곳을 더듬는 그의 눈
빛 에 담긴 상처에 그녀는 목이  매이는 거 같았다. 늘 강한 모습이었기에  이런 가슴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을 줄을 상상도 못했다. 죽음을 이해하기도  어려운 나이에 가장 사랑했을
어머니를 잃은 작은 소년의 울부짖음이 떠오르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듬해에  재혼하셨어. 우리 어머니와는 정략결혼이었기
에 처음부터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지만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는 건지. 새어머니는 다행히
도 건 강하시지만... 차가운 분이시지."

석민이 망설이다 짧게 내뱉는 마지막 말에는 짙은 냉소가 묻어 나왔다.

새미는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새로운 가족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어린아이의 영상에 신음
이 터져 나와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석민은 새미의 침 삼키는 소리에 새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새미의 커다란 눈에 눈물방울
이 그렁하게 담겨 있는 모습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나 때문에 우는 거야?"

석민은 기가 막힌 듯 새미를 바라보다 갑자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새미는 석민의 반응에 흐르는 눈물을 닫고 입을 삐죽거렸다. 내가 누구 때문에 가슴이 아픈
데...

"완전히 울보구나!"

석민은 새미가 황급히 눈물을 닦자  그 모습을 흉내내었다. 두 손으로  코를 푸는 시늉까지
하며 그녀를 계속 놀려댔다.

새미는 옆에 놓여 있는 쿠션을 석민에게 집어 던졌다.

"눈에 티가 들어가서 그래요!"

"하하! 어디 보자!"

새미가 계속 무언가를 던질 태세를 취하자 손을 번쩍 들며  사과를 했다. 하지만 석민의 입
은 귀 까지 찢어져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새미는 그의 반응에 무안해지자 방으로 들어가려 일어섰다. 석민은 일어서는 새미를 말리며
그 녀의 손을 붙잡았다.

"벌써 가려고? 가지마! 오늘 나와 같이 있자!"

새미는 석민의 갑작스런 접촉에 놀라 고개를 숙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금방 사라졌지
만 그의 눈 속에 담긴 간절한 애원을 보았다. 새미는 가슴이 뭉클해져 아무 말 못하고 자리
에 도로 주저앉았다.

문득 그와 스스럼없이 장난을 친 것이 오늘이 처음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 덕에 둘 사이에
가로 막혀 있던 미묘한 냉랭함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석민의  존재감이 물밀 듯 크게 다
가와 새미 의 가슴을 두드렸다. 돌연 아파트 가득 단  둘만이 있다는 사실이 강하게 의식되
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등줄기에 서늘한 전율이 지나가며 허리부근이 저며왔다.

야릇한 위험신호를 감지했지만 그에 대한 연민과 그와 함께 있고 싶은 갈망에 자리를 뜰 수
없 었다. 이 남자의 상처를 감싸주고 싶어. 석민씨의 차갑게 닫혀있는 마음 문을 나의  사랑
으로 녹 이고 싶어. 새미는 스르르 그의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석민은 새미를 달래기 위해 사과했다.

"누군가가 날 위해 울어준 일이  처음이라 당황했나봐... 아무 일도  아닌 걸로 눈물 보이는
너에 게도 놀랐어. 하지만, 널 놀릴 생각은 아니었어."

석민의 부드러운 음색을 띈 목소리가 거실 가득 은은하게 울러 퍼졌다. 비록 그의 목소리에
는 진지함이 담겨 있지만, 조금 전의 상황이 다시 생각난 듯 그의 눈빛에는 장난기 어린 웃
음기가 묻어 났다.

석민은 새미가 피난처인 그녀의 방으로 다시 도망갈까 그녀가 볼 수 없도록 반대편으로 고
개를 돌려 소리 없이 웃었다. 눈가에 눈물은 글썽거리고  코는 빨개져서도 자존심을 지키려
는 새미의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그조차 너무 오래 전 일이라 무감각해졌는데 새미는 마치
자신이 격은 일 인양 그를 위해 눈물을 흘러주었다. 새미가  아닌 다른 이가 석민에게 동정
을 보였다면 그것 은 참을 수 없는 일이지만, 새미의 눈물은 석민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는 새미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렸다. 새미는 내 여자이고 그런  새미를 안는 것은
세상 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씬 그녀의 향기가 코를 찌르자 몸이 빳빳이 긴장되었
다. 하지 만 새미의 곁에 있으면 항상 이런 상태이니 특별한 일도 아니다. 사무실에서  그녀
를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흥분되어 호흡이 빨라지곤 하지 않던가.

석민은 새미가 바싹 얼어 허리를 펴는 것은 못 본 척 하고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
가락 에 감으며 장난을 쳤다. 미끄러지는 감촉과 그녀만의  향기는 뿌리치기에는 너무 강한
유혹이었 다.

새미는 표현은 하지 않지만 홀로 보내야 했던 석민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아련함이 다시 떠오
르 자 어느 때 보다 그가 가깝게 느껴졌다. 그에 대한 이해와 염려가 새미의 가슴을 채웠다.
그의 손을 뿌리치고 그와 떨어져 앉아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
했다. 잠 깐 그에게 기대는 것이 큰  위험이 되냐... 곧 이 이를 영원히  못 볼 날이 올텐데,
그 전에라도 그를 기억할 추억이 있었음 한다. 약속했던 한 달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갑자기
새미는 한기가 느껴졌다. 오랜 연인처럼  허물없이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잖아. 이  아늑함을
깨고 싶지 않아...

새미의 온 몸에서 힘이 빠지며 그에게 기대왔다. 석민은 강한 보호본능을 느끼며 그녀를 더
욱 가깝게 끌어안았다. 성적인 의미보다는 그녀의 모든 것을  지켜주고픈 충동에 가슴이 저
려왔다. 언제쯤이면 내가 새미에게 상처 줄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까. 새미를  아프게
하는 것은 곧 나를 다치게 하는 것이다. 새미가 원하지 않는 일은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는
다는 것도 아직 모 르겠지. 바보 같은 나의 여인...!

그의 움직임에 마른 입술을 축이며 새미는 석민을 향한 마음을 들킬까 서둘러 변명을 했다.

"저도 아빠가 안 계셔서, 아빠 생각에 운 거 뿐이에요..."

"아까는 티가 들어간 거라며?"

석민이 장난스레 말꼬리를 잡았다.

새미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놀리는 그가 얄미워 가볍게 석민을 흘겨보았다. 그 귀염성
이 담긴 눈짓에 석민의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니?"

"거의 7년이 다 되어가요."

"음... 그럼 우리가 처음 봤을 때... 그랬구나."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그렇게 가깝게 느껴졌던 거였나..."

아무 말 없이 석민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를 했다.

그녀는 천 마디 말보다 그의 따스한 포옹이  더 큰 위로가 되어 힘겨웠던 지난 7년  세월의
그림 자가 물밀 듯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마지막으로 위로를 받은 것이 언제였던가.  아마
아빠가 돌아가시고 처음 일거야. 석민을 만난 이후로 눈물이 부썩 많아졌다. 그 전에는 쉽게
울지 않았 는데, 아빠가 너무 보고싶어... 새미는 석민에게 더욱 바싹 다가가며 그의  셔츠에
눈물을 닦으며 코를 훌쩍거렸다.

석민은 어린 아이 같은 그녀의 몸짓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문득 자
신의 몸은 새미를 전혀 어린아이로 보지 않는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미소를 지었다. 새미는
나를 웃 게도 만들고 미치게도 만드는 유일한 여자이다.

석민은 새미의 얼굴을 들어올려 자신의 혀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새미가 질겁하여 뒤로 몸
을 빼려하자 그는 가볍게 그녀의 볼에 키스를 하며 입을 열었다.

"널 강제로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나를 믿어. 단 울고싶으면 내 품에서만 울어야 해. 다른
사 람이 너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싫으니까."

새미는 눈물이 고인 눈을 겁이 난 듯 동그랗게 뜨고 석민을 바라보다 그의 말에 가슴이  벅
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석민의 가슴에 고개를 묻으며 그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 이
남자 를 너무나 사랑한다!

석민은 새미에게 키스를 퍼부어 열정에 사로잡히게 하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눌렀다. 자신
에게 안기는 새미를 한참동안 세게 끌어안고 몸을 뗀 후 눈을 마주치게 했다.

"우리 다시 계약을 하자!"

석민에 대한 사랑 속에서 정신을 잃던 새미는 계약이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그에게서 떨
어 졌다. 그의 달콤한 말에 필요에 위해 만남 사이임을  잠시 잃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
졌다. 이 남자는 나를 안고 고작 계약사항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조금 전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함께 나누고 공유했던 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단 말인가.

새미의 눈빛에 그늘이 내려앉은 듯 어두워지는 것을 지켜보던 석민은 고개를 옆으로 가로저
으 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대는 그녀를 힘주어 붙잡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후 시작이 좋지 않았다는 거 알고  있어. 그렇다고 너와 함께 한 시간을
후회 한다는 말은 아니다. 너는 이 설렁한 아파트를 빨리  돌아가고 싶은 진짜 집처럼 느끼
게 해줬거 든."

석민은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한 숨을 내쉬었다. 새미는  여전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달아나려 몸을 계속 비틀고 있었다. 석민은 새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자신을
똑바로 쳐 다보도록 그녀를 세게 흔들었다. 놀란 새미가 고개를 들고 석민을 바라보자 그녀
의 시선을 붙 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부터 들어봐! 널 잃고 싶지 않아!"

마지막 말이 새미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달아나려던 생각을 잊고 석민의 말에 귀를 기울
이 기 시작했다.

"네가 원할 때까지 너를 안지 않겠어. 나를 피하려는 생각은 그만 두고 여기를 너의 집처럼
편 안하게 여기도록 해. 나를 강제로 너를 범할 짐승 보듯이 하지 말고."

"나를 원하지 않아요?"

"아니, 널 원해! 살면서 그 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었을 정도로! 하지만  너의 허락 없이 널
어쩌 지 않겠다는 뜻이야."

석민의 말에 아연해진 새미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한 달이 지나면 나를... 저... 그냥 보내주겠다고요?"

새미는 단어 선택에 고심하다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 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나와 함께 하기 싫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걸까. 한 달이
지나기 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지금 나가라는 소리인가. 며칠 전에는 나를 보내지 않겠다고
무섭게 소 리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생각이 변한 걸까. 새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질문이
한꺼번에 떠올 랐다. 아직은 헤어지고 싶지 않아... 또 눈물이 나려 했지만 입술을 강하게 깨
물었다.

석민은 그의 감정을 눈치챘지 못하는 새미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가슴으로만 오랫동안  숨겨
온 진심을 대답했다. 내가 너를 보낼 수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이 아가씨야! 새
미의 질문에 대꾸할 적당한 말을 찾아 눈을 위아래로 굴리던 석민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너와 부담 없는 친구처럼 함께 지내는 대신 기간을 연장하고 싶어."

새미는 눈만 깜박거렸다.

"성적인 제안을 하지 않겠어! 그 대신 한 달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너와 계속 살고 싶어."

새미가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자 석민은 직설적인 단어로 다시 설명했다.

성적인 제안? 새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이유를 알고 싶어요."

새미는 조심스럽게 석민을 바라보았다.

"우리 둘 사이에는 특별한 이끌림이 있어. 다른 여자에게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
야. 비록 5년 전에는 그 기회를 놓쳤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  널 다시 만나게 됐지. 운명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함께 끝까지 가보자."

잠깐 망설이던 석민은 차분하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새미를 설득했다.

한 순간 쇼크상태에 빠진 듯  새미의 넋이 나갔다. 석민의 눈빛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 었지만 그의 고백에는 지나칠 수 없는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저 이는 운명이란 단어
를 썼다. 이미 새미는 자신이 석민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단 하루라고 저
이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릴 수만 있다면... 새미는 기간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요?"

그 질문에 눈살을 찡그리던 석민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이 원하지 않을 때까지!"

석민의 제안의 의미를 곰곰히 따져보던 새미는 그 동안 석민에게 느끼던 불안이 말끔히 가
시는 것 같았다. 석민이 단지 육체적인 이유가 아닌 그녀에 대한 더 깊은 감정 때문에 아파
트로 들어 오게 한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직은 사랑이 아닐 지라도 그에 가까운 감
정이다. 석민의 입에서 이별의 말이 나올 줄 알았던 새미는  너무 안심이 되어서 웃음이 터
져 나오려 했다.

동거에 대한 냉소적인 사회적 시선은 석민과 사랑에 빠진 새미에게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
했 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 하늘이 석민과의 만남을  두
번이나 허락했고 새미 역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석민과 헤어져 그의 추억
만 되씹으며 하루하루를 외롭게 살고  싶지 않아. 이 이도 아직은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잖
아! 그것이 가장 중 요하다!

새미는 잠시 생각에 잠겨 고민하는 척하다 장난기가 발동하여 진지하게 되물었다.

"내가 원할 때까지요? 지금 나가겠다고 해도 유효한가요?"

석민을 기막힌 듯 입을 벌리다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협상에 비상한 재주가 있음을 잊고 있었어."

새미는 그의 반응에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며 웃음이 나오려 하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석민
의 웃음소리가 따사롭게 새미를 감싸고 그녀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석민은 새미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느끼고 웃음을 멈췄다. 항상 도전적인 태도 아니면 몸을
사 리던 새미의 장난기가 낯설었지만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고 싶었다.

"설마 허물어지려는 지하실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너의  지하 방보다도
더 큰 우리 집 화장실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새미는 참던 웃음을 터뜨렸다.

"내 방보다 크다고요? 말도 안돼!"

"내기 할 수도 있어."

"무엇을 걸고요?"

"키스!"

석민은 새미가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새미의 혼을 앗아갈 정도
로 정열적인 입맞춤이었지만 시작했던 것처럼 빠르게 입술을 떼었다.  새미가 넋을 잃고 입
술을 벌 린 채로 멍하니 있자 빙그레 미소를 지우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그
의 손도 약하 게 떨리고 있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새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 할거 같
아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몸이 터질 듯 팽팽히 긴장되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새미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위반이야. 당신이 졌을 수도 있는데 확인도 안하고 키스하는 게 어디 있어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수줍은 목소리로 새침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자 더 큰 흥분이 밀
려왔 다. 촉촉하게 부풀어오른 그녀 입술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었다.

"내가 이긴 것이 확실하지만 만약 졌다면 다시 되돌려줄게. 이렇게!"

이번에는 감미롭고 부드럽게 새미의 입술을 열었다. 유혹하듯 감칠  맛나게 그녀의 몸을 끌
어안 으며 천천히 깊은 키스를 했다. 마침내 그가 키스를 끝냈을 때는 그녀의 눈은 반쯤 풀
리고 그녀 의 몸은 허물어질 듯 힘이 쑥 빠진 상태였다. 그가 그 이상을 원하더라도 거절하
지 못했으리라.

"나와 같이 살자."

확인하듯 석민이 물었다. 불안이 감지된 그의 목소리에 새미는 눈이 시려왔다. 그런  석민이
그 녀의 눈에는 누구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네..."

새미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대답하는 새미의 속눈
썹이 가늘게 떨렸다. 수줍어하는 새미의 여성스러움이 석민을 매혹시켰다. 혹시나 새미가 반
대할까 봐 두려워하던 석민은 비로소 긴장을  풀며 새미를 가슴에 안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턱을 묻었다. 새미는 석민의 세차게 고동치는 심장박동소리를 들으며 두 눈을 감고 그가 자
신을 사랑하게 되 기를 간절히 기도 드렸다. 누군가 멀리서 그 둘을 훔쳐봤다면 한 치도 끼
어 들 수 없는 하나된 다정함에 혀를 내둘렀으리라.

한참 후, 석민은 몸의 긴장을 잠재우려 농담을 던졌다. 새미를 안고 싶은 갈망이 터질 듯 극
에 달해 더는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 아침 나가겠다는 사람과 동일인은 아니겠지? 나에게서 한시도 떨어질 줄 모르는 사람
이 어떻게 나 없이 살려고 했어?"

"살 수 있는지 없는지 기회나 줘 봐요!"

새미는 그녀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쌀쌀하게 말하며 황급히 석민에게서 떨어졌다.

석민은 의도한 대로 새미가 멀어지자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싱긋 웃었다. 새미를 붙잡으
려 자동으로 앞으로 나가는 두 손을 막기 위해 등뒤로 깍지를 끼웠다.

"새미 혼자 살도록 나는 이 아파트에서 사라지라는 소리인가?"

"하!" 새미는 기가 막혔다.

"음... 이 아파트의 커다랗고 사치스런 화장실 때문에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거란 뜻이라
면 노코멘트에요!"

새미는 일침을 가하며 등을 돌렸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새미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가
득 했다. 석민과의 말싸움은 즐거웠다.

석민은 금방 뽀르퉁 해지는 새미의 반응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더  이상 말을 걸면 영영 새
미를 그녀의 방으로 돌려보내지 못할  거 같아 대꾸하려 벌어지는 입을  꼭 다물었다. 그는
자신의 방 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새미를 붙잡고 싶은 갈망을 누르며 눈을 감았다. 오늘밤도
밤새 잠을 이 루지 못할 거 같군. 찬 물 샤워가 도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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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새미는 지난 열흘간의 행복감에 두려움마저 느꼈다.

석민은 친절하고 깔끔했으며 더없이 다정했다. 처음 아파트에 들어온 후 일주일간의 살얼음
판 을 건너 듯 긴장된 예의바름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따뜻함을 지닌 석민은 저항하
기 어려 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새미의 수줍음을 이해하고  조심스레 다루는 그의 모습에
서는 처음 재 회했을 때의 차갑고 거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뉴그린 백화점에서의 오픈식이 얼마 남지 않아 새미가 늦게  퇴근하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그 런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함께 저녁식사를 한 후 산책을 하거나 가끔 영화를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8년 전 그가 대학시절에 만든 단편영화를 보며 서로의  의견을 토론하기도 했다. 그 영화에
는 석민의 꿈과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꾸중하시다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계속 영화를  만들었을 거야. 나처럼 현민
이 마저 음악을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래.  집안에서 그 녀석을 밀어주는 것은 나뿐이지!
새어머 니가 아시면 기절하실 걸..."

부모님의 반대로 영화를 포기했다는 석민의 말을 듣고 새미가 가슴 아파하자 석민은 웃으면
서 이렇게 말했다.

"다행히 내가 영화보다는 사업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 지금도 영화를 만들고 있었
으 면 굶어 죽었을 거야!"

밤이 깊어지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다음 날을 기약했다. 육체적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를
팽 팽하게 유지시켜 주지만 석민은 약속을 지키며 절대로 선을 넘지 않았다.

새미는 삼 일 후 있을 백화점입주의 마지막 점검을 위해 하루종일 이리 저리로 뛰어다녔다.
빠 진 의상이 없는지 체크하다 어제 석민과의 이별의 순간이 떠올랐다.

마치 신혼 부부가 처음으로 헤어지 듯 몸이 달아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마음은 공항까
지 따 라가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로 여의치 않아 아침에 아파트에서 배웅을 했다.

"다녀오세요."

"바람 피지마."

석민이 장난스레 말을 했다. 새미는 피식 웃었다.

"농담 아니야! 한 눈이라도 파는 날에는 알아서 하라고!"

그는 진지하게 말을 마친 후 새미를 끌어안고 길고 뜨거운 키스를 해주었다.

새미는 그 기억에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가 일본으로 출장을 떠난 지 하루밖에 지나
지 않았지만 벌써 그가 그리워졌다. 새미의 입에서 욕구불만의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이를 보 지 못한 지난 5년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지...

석민과의 지난 시간이 꿈만 같았다. 너무나 행복하고 아련해서  영원히 깨지 않기를 바라는
꿈, 잠에서 깨면 사라질 꿈...

생각에 잠겨 있던 새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가슴  한구석에서 석민과의 시간이 영원
할 수 없다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석민은 5년 전 일과 앞으로의  계획은 전혀 입에 담지 않
는다. 우 리가 몇 주전에 했던 계약과 천 만원의 행방도 묻지 않는다. 왜 일까?

때론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석민을 볼 때면 우리의 만남이 단지 일시적인 것을 암시하
는 듯한 차가움을 본다. 나 몰래 탐색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질 때도 있다...
석민 이 나를 사랑하게 만든다는 계획이 허황된 걸까! 현민의 의미없는 말과 석민의 변덕스
런 다정 함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미는 얼굴을 더욱 찡그려졌다. 이제 와서 그와 헤어져야 한다면... 그와의 이별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숨이 막혀왔다. 새미는 의심스런 생각을 지우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제 드디어 오픈식을 마쳤다. 그 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자 새미는 길다란 소파
에 비스듬히 기대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세웠다. 곧 시
간을 내 어 대전에 갔다 와야겠다. 새한이의 대학입시시험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 준비는 잘
하고 있을 까. 엄마에게 석민과의 일은 비밀로 해야겠지. 딸을 철썩 같이 믿고 계실  어머니
를 떠올리자 마 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없이 사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 때, 초인종이 올렸다.

새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석민이 돌아오려면 아직 일주일이 더 남았는데. 누구지? 혹시나 석
민 의 가족이면 어쩌나. 이도 저도 못하고 망설이던 새미는  초인종이 계속 울리자 어쩔 수
없이 자 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입구에는 빨간색 롱코트를 걸친 세련돼 보이는 아가씨가 서 있었다. 꽃다발을 흔
들 며 미소를 짓고 있던 그 아가씨도  새미의 등장에 놀랐는지 한참을 말문을 열지 못하다
입을 열 었다.

"여기 석민 오빠 아파트 아닌가요?"

새미는 당황하여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족이라면 나에 대해 모를 텐
데, 석민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현관에 서 있던 아가씨는 새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당당하게 새미를 밀치고
거 실 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살폈다. 석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새미를 무섭게 노려보았
다. 마 치 주인인 양 굴며 새미를 위아래로 흘겨보았다.

"당신 누구죠? 왜 우리 오빠 아파트에 있는 거죠?"

우리 오빠? 여동생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새미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가소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 아가씨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석민 오빠의 약혼녀 혜경이라고 해요."

새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혜경은 약지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반지를 들어  자랑하듯 새미에게 보인 후  말을
이었 다.

"오래 전부터 집안끼리 정혼해온 사이에요.  이젠 제가 유학을 마쳤으니  결혼 날짜만 잡는
일이 남았죠. 오빠가 요새 만나는 아가씨인 모양인데..."

혜경은 새미가 들으란 듯이 비아냥거리며 묻지도 않는 말을 계속 했다.

"아직 만난 지 한 달도 안 됐죠? 오빠는 여자를 한 달 이상 만나는 적이 없거든요. 내가 아
는 여자 만해도 한 둘이 아니에요. 오빠는 여자를 즐기듯 갈아치우는 사람이지만 이젠 내가
돌아 왔으니 달라질 거예요. 결혼은 가문끼리 약속한 나와 할 테니까요."

새미는 애써 힘겹게 자신을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

"가문끼리라고요? 석민씨가 집에서 하라는 대로 결혼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데요."

혜경은 새미를 한 번 노려본 후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젠 오빠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당신 같은 사람이 진저리가 나요. 가진 것도 없이 오직 돈
만 보고 달려드는 아가씨처럼 주제 파악 못하는 여자들 말이에요. 오빠가 결혼 얘기를 꺼낸
적이 라도 있나요?"

새미는 입술만 깨물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혼커녕 미래에 대해서도  아무 말하지 않은
석민 이 아닌가.

"당연하죠. 오빠는 아가씨 같은 여자에게 절대로 미래를 약속하지 않아요. 내가 오빠가 사귀
던 여자를 정리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거든요. 늘 이런 식이죠. 사귀다  지겨워졌는데
여자가 떨어지지 않으면 항상 끝은 내가 해결하죠."

"그래도 상관없나요? 그렇게 아무 여자나 만나는 남자랑 왜 결혼하려하죠?"

혜경은 웃음을 터뜨렸다.

"석민 오빠니까요. 다른 남자 열과도 비교가 안돼요. 약혼식은  3년 전에 했어요. 제가 공부
를 마칠 때까지 오빠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요즘 남자에게  결혼하기 전 성실을 기대한다는
것이 웃기잖아요? 하지만 이젠 달라지겠죠."

"아니요. 난 혜경씨 말 믿지 않아요. 혜경씨야말로 석민씨에게 자신 없어 저에게  이러는 것
처럼 보이네요. 할 말 다하셨으면 이제 그만 가주시겠어요?"

"자신만만하군요. 언제까지 그런 모습일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는데요."

혜경은 새미를 잡아먹을 듯 차갑게 쏘아보다 가져왔던 꽃다발을 들고 아파트를 나갔다.

새미는 온 몸을 떤 채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아냐! 다 거짓말이야! 나는, 난 석민씨를
믿 어!

혜경이가 다녀간 뒤로 삼일이 지났다.  그 여자가 새미에게 석민에 대한  불신을 심어 주고
싶은 거라면 절반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삼일  동안 새미는 석민을 기다리며 속이
새카맣게 타 들어가 듯 안절부절못했다. 일을 하다 정신을 놓기 일쑤였다. 팀장에게 결제 받
을 서류를 잘 못 가져가 혼이 나기도 했다.

어떻게 지난 열흘간의 다정함이 거짓일 수 있겠는가. 혜경의 농간이라고 열심히 스스로에게
되 뇌였지만, 석민에 대한 의심이 새미의 영혼을 갉아 먹어 거의 폭발지경에 이르게 했다.

새미는 그가 너무나 그리웠다. 그를 만나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어제 석민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든 새미의 손이 오들오들 떨리며 그녀의 숨이 답답
해 져왔다. 새미는 주저하면서 언제 돌아오는지 물었다.

석민은 짧게 대답했다.

"아직 일이 끝나려면 멀었어."

새미는 가슴이 터질 듯이 무언가 치밀어 올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듯 애원했다.

"빨리 와요! 보고싶어요."

한 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수화기 사이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나도 그래. 나도 새미가 보고 싶어."

석민은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석민의 고백이 아직도 새미의 귓가에서  아른거렸지만 새미의 불안을 잠재우기에는  부족했
다.

새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7층에  도달해 문이 열렸다. 새미는 아
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발길을  멈추었
다.

열려진 석민의 아파트 문 앞에서 두 남녀가 키스를 하고  있었다. 저 카만 머리카락과 넓은
어 깨... 석민씨? 여자의 손이 남자의 등을 끌어안고 있었다.

한순간 쇼크상태로 멍하니 서있던 새미는 뒤돌아 정신없이 아파트를 빠져 나왔다.

왜 일본에 있어야 할 남자가 이 시간에 혜경과 아파트에 있는 거지? 새미는 토할 것처럼 속
이 뒤틀렸다.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모멸감과 쓰디쓴 배신감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영
하로 내 려간 추운 찬바람을 가르며 달린 탓에 금방  얼굴이 새파랗게 얼었다. 하지만 추위
조차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느끼지 못하고 거리를 서성댔다. 신호등을  건너다 신호가 바뀐 것도
알 아채지 못해 사고를 당할 뻔하기도 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몇 시간을 헤매다 온 몸이 꽁꽁 얼어 손발이 마비됐을  때쯤 하겸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
들과 술을 마시던 하겸은 새미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놀라 소리를 쳤다.

"거기 어디니?"

"추워..."

하겸은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물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술이라도 먹은 거니? 어서 말해!"

여기? 여기가 어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던 새미는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마로니에 공원 전화박스..."

새미는 전화를 끊고 벤취에 앉아 추위에 떨며 하겸을 기다렸다.

약 이십 분이 지난 후 하겸이 택시에서 내려 달려왔다.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새미의 몰골을 보고 하겸은 새미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하겸아!"

새미의 눈에서 참고 있던 눈물이 갑자기 와르르 쏟아졌다.

당황한 하겸은 옷을 벗어 새미에게 덮어준 후 말없이 새미를 안고 서 있을 힘도 남아  있지
않 은 그녀를 부축하여 택시에 태웠다.

하겸에게 기대 서럽게 울던 새미는 겨우 잠이 들었다.

하겸은 새미의 어깨만 끌어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택시가 하겸의 집에 도착하여 새미
를 깨웠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가 새미의 이마를 짚어 보자 이마가 불덩이 같았다.

하겸은 택시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새미를 등에 엎고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하겸의 어
머 니는 쓰러져 있는 새미의 모습에 놀라셨지만 하겸을 부축하여 얼른 하겸의 방으로 데리
고 가 새미를 눕히게 했다. 하겸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새미를 봐왔기에 친딸처럼 생
각하고 있 었다.

새미는 거의 이틀 밤낮을 의식을 찾지 못하고 고열에 시달렸다.  가끔 알아들을 수 없는 헛
소리 까지 하며 잠이 든 채 울기도 했다. 하겸은 겁에 질리고  걱정이 돼 새미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계속 새미의 곁에서 그녀를 지키며 직접 새미를 간호했다. 물론 어머니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 능했겠지만.

새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무너져 내린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아 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지켜야 할 어머니와 새한이를  위해 힘 든 내색조차 하
지 않고 꿋꿋이 버터 온 새미였다. 그 오랜 시간을 함께 했지만, 한번도 이런 새미는  본 적
이 없었다. 순 간 과거의 잊혀지던 기억에 하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5년 전 손가락만 갖다 대도 무너질 듯 지쳐  보인 때가 있었다. 군대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새미 가 나를 피하고 만나려 하지 않아 몇 시간을 기다려 겨우 만났지. 그 때... 몸무게는 한
없이 빠 져있었고 얼굴에는 생기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었다.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처
럼 힘들어하 는 새미를 붙들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 없이 침묵만을 지키며 사람을 두
렵게 했었지. 아 마 지금처럼 자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의 몸을 학대했었어.

그 때와 관련이 있는 걸까! 제길!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원인을
밝혀 내고 말겠다.

새미는 하겸에게 여동생과 다름없는 친구였다. 철이 들기도 전에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려
조 그마한 몸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그녀를 보며 힘이 되 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후
회하고 또 후회했었다. 새미를 돕고 싶어 아르바이트도 시작했지만 그녀의 강철같은 자존심
은 금전적 인 도움은 절대로 받지 않으려 했다. 항상  마음만 받겠다며 하겸의 도움을 거절
해왔다.

그 자존심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일이 무엇일까! 새미가 아파서  회사에 못나간다고 대신
전 화를 하며 혹시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물어보았지만 무슨 일이 있기커녕 회사에서
공을 세웠다고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이틀간 의식 불명이던 새미가 눈을 떴다. 새미가 의식을 되찾기만을 기다리던  하겸
은 새미의 곁에 앉아 땀으로 젖어있는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었
다.

"사람 이런 식으로 겁줘도 되는 거니?"

새미는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눈을 찡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어디야?"

"내 방, 기억 나니? 마로니에 공원에서 전화했잖아?"

마로니에?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던 새미의 눈빛이 흐려졌다.  하겸에게 전화하게 만든 이유
까지 떠오르자 새미는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새미의 온 몸에서 소리 없는
울음이라 도 터트리듯 그녀가 고통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더 이상 새미에게서 아무런 설명도 이끌어 낼 수 없음을 감지한 하겸은 새미 혼자 쉴 수 있
도 록 조용히 방밖으로 나갔다. 자기 힘으로는 새미가 높다랗게  세운 마음의 벽을 허물 수
없음을 실감하면서.

새미는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건물  문을 나섰다. 하겸은 이렇게 쉽게  포기하면 그 동안
힘들 게 쌓아온 꿈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맹렬히 비난했지만 새미는 더 이상 서울 땅을  밟
고 살고 싶지 않았다. 이젠 모든 것이 상관없다.

계단을 향해 발을 디디자 차가운 무언가가 새미의 볼에 떨어졌다. 새미가 고개를 들어 하늘
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 눈이라니! 새미의 입에서 히스테리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눈가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시려오자 새미는 자리에 서서 눈을  꼭 감았다. 아직도
흘릴 눈물이 더 남은 거니... 너의 너절한 감상주의는 지긋지긋해.

그 때 누군가 새미의 팔을 잡아챘다. 새미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그리고 이젠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불꽃이 타오르는 두 개의 눈동자와 마주쳤
다. 그 눈빛은 분노를 숨김없이 드러내며  새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 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 운 눈이라 생각했었지. 하지만... 며칠 전 아파트에서의 다른 여자와의 포옹이 떠오르
자 새미는 세차게 그 남자의 몸을  밀었다. 더 이상 이 남자가 나를  희롱하게 놔두지 않겠
어!

그 남자의 입술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지더니 다시 새미의 손목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 그
녀를 강제로 차에 태웠다.

"놔요!" 새미는 악을 쓰다시피 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마! 여기서 못 볼 꼴을 연출하기 전에!"

석민은 이를 악물고 짧게 대꾸한 후, 차를 몰았다.

새미는 석민의 옆모습에서 풍기는 살의에 몸서리가 쳐졌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석민에게

화가 났지만 한 번 폭발하면 멈추지 못할 것 같아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핸들을 쥔 석민의
손 에 힘이 잔뜩 들어가 떨리고 있었다. 그래, 아무리 화가 나도 여기서는 안 된다.

차는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헤치고 달려나가 마침내 석민의  아파트 입구에서 멈추었다. 새
미는 순간 참았던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와 석민에게 고함을 쳤다. 다른 여자를 끌어들인 석
민의 아 파트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아파트에는 들어가지 않겠어요."

석민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너에게 아직도 선택권이 남아있다고 생각해?"

석민은 새미의 반항을 가볍게 잠재우고 그녀를 끌고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갔다. 그녀의 팔
을 잡은 석민의 근육이 불끈 솟아올랐다.

새미를 거실 한 가운데 세워놓고 석민은 주방으로 사라졌다.

새미는 그 동안 익숙해진 거실을 둘러보았다. 어리석게도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영
원히 살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었다. 혜경의 체취가 묻어나는 듯한 느낌에 역겨움을 느꼈다.

석민은 지난 번 마시다 남겨 놓은 양주를 찾아 병 째 들이켰다.  독한 술이 목을 타고 내려
갔지 만 석민의 노여움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자신을 태울  듯이 격렬하게 휘몰아지는 광분
에 가까운 분노에 석민의 몸에 흐르는 마지막 핏방울까지 차디차게 변했다.

"자! 말해봐! 그 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지?"

새미는 석민의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거칠게 헝클어진 머릿결, 차갑게 흔들리는 눈동자... 한 순간 새미는 석민의 매력에 할  말을
잃 었지만 곧 자신을 되찾았다. 헤어지는 마당에 더 이상 추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섹
시한 입 술이 열리며 느릿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글세... 그것이 중요한가요? 난 단지 당신이 하기 힘든 일은 내가 쉽게 해주려 한 것뿐이에
요."

"내가 하기 힘들어하는 일?"

"우리 이쯤에서 헤어져요."

석민의 안면근육이 눈에 띄게 실룩거리더니 두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두 번 다시 말
을 못 하게 저 여자의 입을 봉해버리면 행복해질까. 석민은  새미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 대신 석민은 손에 들린 양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이제 너의 어리광도 점점 짜증이 나는군. 이유가 뭐지?"

이유는 석민씨가 더 잘 알잖아요! 새미는  이성을 잃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석민씨는 돈으로 나를 산 거잖아요.  우리
관계 가 역겨워요."

천천히 석민이 새미에게 다가오면서 감정이 담아있지 않은 절제된  음성으로 말을 했다. 그
의 근육이 격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래. 진새미! 언제나 차갑고 강한 여자지."

새미는 그의 잠긴 듯한 목소리에 온 신경세포가 긴장으로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위
선 적인 가면을 집어던지고 애원하고  싶었다.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결코 질투
따위로 비굴해지진 않으리라.

석민은 계속 새미에게 다가왔다. 뒷걸음치는 새미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도록 구석으로 내몰
았 다.

"사일 동안 거의 미칠 것 같았지."

두 눈을 새미에게 고정시킨 채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어디 있는지 쪽지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더군. 회사에서는  아파서 출근하지 않았다고 하
고, 자취방에 다녀간 흔적도 없었지. 그리고 사일만에 찾아낸 나에게 헤어지자?"

석민의 목소리의 톤이 점점 높아졌다.  새미는 석민의 눈 속에 담긴  적의에 계속 달아나다
벽에 부딪히고 멈추어 섰다.

새미는 다가오는 석민을 두 손으로  막았다. 화가 난 석민을 많이  봐왔지만 오늘처럼 그가
무섭 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소리조차 지르지 않고 분노를 뿜어내며 다가오는 석민은 스스
로도 화 를 주체할 수 없어 보였다.

석민의 한 손이 천천히 새미의 목으로 올라와 조르듯이  감싸안았다. 새미의 눈동자가 겁에
질 린 듯 커지자 그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우며  엄지손가락에 힘을 쥐었다. 그녀의 목
이 뒤로 젖혀지자 석민은 차라리 쾌감을 느꼈다.

"나보다 돈 많은 남자라도 만난 거야?"

새미는 움직일 수도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석민의 살인적인 눈빛은  진짜 자기를 죽이려는
듯이 반짝였다.

"항상 이런 식으로 남자가 너를 믿게 한 후 사라지나? 설명도 변명조차 없이 헤어지자?  다
른 남자는 널 쉽게 보내주던가?"

새미는 대답은 커녕 숨쉬기조차 어려워 헉헉거렸다. 갑자기 석민은  전기에 감전된 듯 깜짝
놀 라며 재빨리 그녀의 목에서 손을 뗐다. 한참 자기의  손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
던 석민 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온 몸이 내면에서 일고  있는 갈등 탓인지 한없이 떨리
고 있었다.

별안간 석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 있었지? 내가 널 찾아 온 서울을 헤맬 때 넌 어디 있었냐고?"

폭풍처럼 닥쳐오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석민은 뒤를 돌아 새미에게 등을 보인 채 머리카락
을 마구 쥐어짜며 으르렁거렸다.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이 너로 인해 상처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해봤어? 이 세상에 변덕
스 런 너의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겠지."

마지막 말은 새미가 아닌 자신에게 되묻는 듯이 들렸다.

새미는 그런 석민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고 그의 정부
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겨우 감정을 억제한 석민은 다시 새미를 향해 돌아섰다. 석민의 까만 눈빛이 무언가를 결심
한 듯 위험스럽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너의 따뜻함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이었던 거야?"

새미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아요. 당신이... 일본에서 돌아오면 나에게 하려 한 말이 아닌가요?"

아니면 내가 당신의 정부로 남아있길 바라는 건가요.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입에 담지 않았
다. 석민의 배신에 상처 입은 자신의 영혼을 감추고 싶었다.

"일본... 내가 일본에 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헤어졌던 애인과 재화라도 한 건가?"

석민은 이제 새미의 볼을 매만지고 있었다. 검지손가락으로 새미의 얼굴선을 그리며 자신이
내 뿜는 숨결을 새미가 고스란히 느끼도록 얼굴이 가까이 들이댔다.

새미는 멈칫 숨을 돌이키며 석민을 멈추기 위해 손을 들었다.  하지만 석민은 그 손마저 잡
아 자 신의 입으로 가져가 손가락 하나 하나에 키스를 했다. 새미의  반응을 염두 해 둔 다
분히 계획적 인 몸짓이었다.

새미의 뇌세포가 마비된 것 같았다.  두려움은 순식간에 열정으로 변해버렸다. 점점  가까이
다가 오는 석민의 눈빛에 넋을 읽고 그를 바라보았다.

"바보... 진새미."

석민은 중얼거리며 새미의 입에 키스를 했다. 새미는 허리를 관통하는 전율이 온 몸으로 퍼
지 자 부르르 떨었다. 석민은 혀끝으로 새미의 입술을 간질이며  새미가 입을 열고 그를 받
아들일 것을 무언의 압력으로 종용했다. 새미는 마지막으로 남은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머
리를 옆으로 돌리며 석민을 피했다.

"이러지 말아요."

석민의 눈에 순간 번득임이 스치더니 갑자기  분노를 폭발하듯 새미의 머리를 뒤로  젖히며
그녀 의 턱을 잡고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하였다. 새미의  입술을 거칠게 막으며 그녀의 입안
으로 침입 해 들어갔다. 새미는 자신의 혀끝으로 피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석민은 강하게 저항하는 새미를 안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선 후 그녀를  눕혔다. 석민은 왼
손으 로 새미가 움직이지 못하게 그녀의 두 손을 위로 올려 잡은 후 다른 손과 혀를 이용해
그녀의 온 몸을 욕망 속에  빠지게 만들었다. 석민의 거칠고 폭력적인  애무에 자극을 받은
듯 새미의 다 리사이가 불이 붙은 듯 뜨거워지자 그녀는 미칠 듯이 흥분되었다.

어느새 새미는 석민의 머리를 부여잡고 그가  초대하는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그래...  바로
이 느낌이었어. 새미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석민을 다시 만나 이후로 줄
곧 새 미를 괴롭히던 욕구불만이 폭발하면서 둘 사이의 열정에 기름을 부었다. 오늘이 석민
과의 마지 막 만남이 될 거라는 미래에 대한 암담함에 그의 열정을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새미의 반응을 알아차린 석민의 폭력적이던  몸짓도 잦아들면서 새미를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 했다. 석민의 떨리는 손이 브래지어를 벗기고 있었다. 그 황홀한 나신이 석민의 눈앞에
펼쳐지 자 그는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비슷한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가슴의 끝을  자신의
혀로 가볍게 스쳤다. 새미는 충족되지 못한 욕망에 멀어지는 석민의 머리를 다시 자신의 가
슴으로 잡아당겼 다.

석민은 새미의 손은 뿌리치며 새미의 몸에서 멀어졌다.

"날 원한다고 말해봐..."

타는 듯한 열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석민은 새미가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기를 기다렸다.
새미 는 눈을 감으며 석민의 유혹해 굴복하지 않으려 애를 섰지만 다시 석민이 고개를 아래
로 숙이 자 참지 못하고 속삭였다.

"제발... "

석민은 승리감에 눈을 빛내며 다시 새미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치고 그녀의 허벅지 사이
로 들어갔다. 이미 새미의 옷은 모두 벗기어 있었다. 새미의 몸을 더듬는 그의 손이  참을성
없이 떨리고 있었다.

석민은 발가벗은 그녀의 나신에 분노를 잃어버리고 미칠 듯한  황홀함을 느꼈다. 그는 자제
하려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5년이란 긴 시간 동안 이 순간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또 바랬
다. 입을 열면 마법 같은 이 순간이 사라져버릴 것 같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석민의 새미의 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새미의 눈을 바라보았다. 새미의 허락이  필요했다.
후 에 정신을 차린 새미가  그녀을 강제로 안았다고 몰아세우기는 원치  않았다. 새미가 이
모든 일 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기를 원했다.

새미는 미소를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민은 북받치는 감격을 참으며 그녀의 입에 키스를 하고 천천히 그녀에게로 침몰해 들어갔
다. 엄청난 쾌락이 밀려오자 석민의 가슴이 세차게 들썩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제길. 이렇게 좋을수록..."

참지 못한 새미가 다리를 들어올려 그의  허리를 감싸자 마지막 남아있던 석민의  자제력이
와르 르 무너지면서 빠르고 강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지 육체적인 욕망의 해소가 아닌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숭고한  순간이었다. 드디어 이
여인 은 내 것이 된다. 석민은 마지막으로 생각하며 두 사람의 파라다이스로 함께 날아갔다.

새미는 어렴풋이 밝아오는 새벽의 여명에 눈을 떴다. 자신의 곁에서 잠이 든 석민을 바라보
며 울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두 손으로 막았다. 언젠가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
랐다. 그 때는 경악과 창피함 뿐 이었지만, 오늘은... 그를  향한 사랑과 헤어짐에 대한 미련
이 그 자리 를 대신 했다.

이 남자를 깨워 다른 여자와 결혼을 약속한 몸으로 왜  나를 안았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
가 당 신에게 어떤 의미냐고 원망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가 덧없을 뿐이다.

처음부터 석민은 미래를 약속한 적이 없었다. 나 혼자 백일몽을 꾸고는 누구를 원망하랴. 어
제 의 열정으로 보아 석민은 어쩌면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도 나를 원할지도 모른다. 잠시지
만 새 미는 석민의 정부로써 남아있어 볼 생각도 했다. 하지만 끝내는 그 뿐만 아니라 스스
로까지 용 서하지 못하리라.

적어도 홀로 살아갈 추억이 있으니 난 됐어. 5년 전에는 추억조차 없었지만 이젠 내가 사랑
한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기억할 수 있는걸. 그의 일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 빠르게  움직이
는 냉철 한 판단력. 동생에 대한 애정. 그리고... 차갑고  소유욕 강하지만 부드러운 그를 언
제나 기억할 것이다.

새미는 석민 몰래 그의 아파트를 빠져 나오면서 그를 사랑했던 어느 순간도 후회하지 않는
다고 되뇌었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오열만은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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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석민은 처음 와 보는 거리를 둘러보았다. 매서운 겨울 바람에 석민의 잿빛 코트가 휘날리고
있 었다. 도시 중심지에서 벗어나 외곽 도로를 타고 운전해 들어와 공터에 차를 주차시켰다.
한 참 을 더 올라가야 원하는 목적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차가 지나가기에는  길목
이 비좁아 보였다.

앞에 놓은 언덕 위에는 며칠 전에 왔던 눈이  아직 녹지 않아 흙 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
다. 오 래된 한옥 집이 대부분이었지만,  새로 지은 건물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추운 날씨
탓인지 공사 를 하다 그만둔 반쯤 지워진 건물도 있었다. 황량한 거리에 아이들 몇 만이 공
차기를 하면서 놀 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한 손에 들린 쪽지에 적힌 주소로 눈을
돌렸다.

새미가 그의 곁을 떠난 지 거의 두 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는 순간을 함께 나누고도 떠난 버린 그녀를 깨끗이 지워버리고 살아갈
생 각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5년 전에도  실패했던 일을 그녀의 웃음소리와 열정을  더
잘 알게 된 지금 잊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니 어리석었다. 잊기 위해 또 노력하고 노력했지
만 불가능했 다...

그녀를 떠나 보낸 주 동안에는  회사도 나가지 않고 술을 벗삼아  몽롱한 정신으로 보냈다.
혹시 나 다시 그녀가 돌아올까 한 가닥 기대를 가지고 현관문만 바라보다 시간이 지나도 문
이 열리 지 않자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제정신으로 버티기에는 미칠 것 같았다.

그를 정신차리게 만든 현민의 잔소리가 기억나자 석민은 얼굴을 찡그렸다.

현민은 형의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현민은  자
신의 눈을 믿을 수 없어 입이 짝 벌렸다. 거실은 태풍이라도 지나간 듯 석민이 아끼던 그림
은 갈기갈 기 찢겨 바닥에 떨어져 있고, 책과 깨진  장식품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어 현민의
발에 거치적거 렸다.

회사에서 형이 몸이 안 좋아 결근이라는 말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일벌레인 형이 하루도 아
니 고 며칠 째 백화점에 나오지 않다니 병이 나도  크게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술이라
니 전혀 석민형 답지 않다.

석민의 침실을 열어보니 사람은 없고 침대 밑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술병만이 뒹굴고 있었
다. 주방과 욕실, 서재까지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석민은 없었다.

도대체 어디 간 거야! 현민은 화가  나 의자를 발로 차다가 혹시나 하고  아무도 쓰지 않는
주방 쪽 건너 방을 열어 보았다. 헉! 현민은 욕을 퍼부었다. 형의 커다란 더블침대는 놔두고
이 작은 방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야.

석민은 조그마한 일인용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석민이  너무 커 침대가 무너질 듯
버거 워 보였다. 화장품과 여성용 옷 몇 점이 눈에 띄었다.

"형! 일어나! 형!"

현민이 아무리 세게 흔들어 깨어도 석민은 뒤척이며 무언가 잠꼬대를 할 뿐 의식을 찾지 못
했 다.

이 빈 병에 담겨 있던 술을 혼자 다 마신 것은 아니겠지. 현민은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조 용히 문을 닫고 나와 집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냉철하기라면 둘째 가라도 서운해할 우리형이 술로 이성을 잃을 때도 있다니 깨나 인간적이
군! 현민의 입에서 웃음이 배시시 새어나왔다. 가족에게도 빈틈을 보이지 않고 독야청청 하
던 석민 형이 아니었던가. 형을 이렇게 만들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는 없었다. 형이
미친 줄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니까...

현민은 청소를 마친 후 전복 죽 등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도착하자 다시 형을 깨웠다. 형의 눈가에 거뭇하게 그늘이 져있었다. 며칠 못 본  사
이에 몸무게도 빠진 것 같았다.

"형! 정신 좀 차려봐! 꼴이 말이 아니군."

그제야 간신히 눈을 뜬 석민은 현민을 발견하자 고함을 질러대며 화를 냈다.

"나가! 꺼지라고!"

현민은 빙그레 미소만 지울 뿐 끄덕하지 않았다.

"이 죽만 먹어봐! 그럼 나도 조용히 나갈게."

석민은 음식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신음을 토했다. 음식  냄새를 맡자 머리가 지끈거리
고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현민은 인내를 발휘하고 다시 음식을 권했다.

"나라고 망나니 같은 형 간호나 하고 싶은 줄 알아?"

"망나니라고? 너 죽고싶어?" 석민이 현민을 사납게 노려봤다.

"죽고 싶은 건 내가 아니고 형 같은데? 이러니 새미 형수님이 형을 버렸지."

갑자기 주먹이 현민에게 날아왔다. 제길! 현민은 나중  말을 한 것은 후회하며 이리저리 피
하며 형을 끌어안고 말렸다.

한참 현민에게 분풀이를 하던 석민은 씩씩거리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얼굴을 두 손
에 파묻고 생각에 잠긴 석민의 모습은 몇 년이나 나이 들어 보였다. 고개를 든 석민이 현민
에게 물 었다.

"오늘 며칠이야?"

"목요일."

새미가 떠난 날이 월요일이니 벌써 삼일이 지났군. 끝내 그녀는 나의 곁을 떠났다...  석민은
길 게 한 숨을 내쉬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민에게 명령을 내렸다.

"배고프다. 샤워할 동안 음식을 주방에다 차려놔라."

현민은 어깨만 으쓱거렸다. 독재자가 다시 살아 나셨군.

석민은 그 날부터 회사로 출근했다. 일에 미친 듯 하루에 열 넷 시간 가깝게 일에 몰두했다.
하 지만 낮에는 어느 정도 잊었지만 밤에는 어김없이 그녀가 꿈속에 찾아와 석민을 괴롭혔
다. 밤 새 그녀와 함께  있는 에로틱한 꿈을 꾸다 상실감으로  깨어나는 새벽이면 무엇이든
때려부수고 푼 충동에 휩싸였다.

시간이 흐르자 추운 날씨에 지하 방에서 지낼 새미의 건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유도 없
이 피오레 매장 앞을 지나치며 새미를 찾았지만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새미와 헤어진 지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우연히 만나 피오레의 사장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새 미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하지만 새미가 회사를 그만 둔지  이미 한 달이 지났다는 말을
듣자 뒤 통수를 한 대 맞은 양 머리가 멍해졌다. 자취방도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만 했다. 디자이너로써의 삶을 자랑스러워하고 회사의 미래에 애착
을 가지고 있 던 그녀가 어디에 가 있는 걸까. 그 뒤로  그녀의 행방을 이리 저리로 수소문
해 이 자리에 오게 됐다.

석민은 이층 양옥집 앞에 걸음을  멈춰 섰다. 초인종을 누르려 그의  손이 앞으로 나갔다가
공중 에서 한참을 주저했다.

한 여자로 인해 완전히 나락으로 추락한 자존심을 일으켜 다시 이 곳까지 서기에 시간이 많
이 걸렸다. 나를 바라보지 않는 여인의 마음이 변하기를 기다리며 그녀 곁에 말없이 머물러
주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 나를 다시 본 새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석민은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폰에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진새미씨를 찾아왔습니다."

"진새미요? 엄마!"

아이가 엄마에게 진새미가 누구냐고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이 석민의 귀에도 들렸다.

석민은 잘 못 찾아왔다는 생각에 좌절감을 느끼고 다시 쪽지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 주소가
맞 는데. 빌어먹을! 처음부터 잘못 된 주소였군. 다시 원점이야! 석민이 분노에 휩싸여 쪽지
를 꾸 긴 후에야 인터폰에서 나이든 아줌마의 퉁명스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옆문으로 가보세요."

찰칵! 인터폰이 끊겼다.

석민은 손에 든 구겨진 종이조각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며  주의를 둘러보았다. 고개를 갸우
뚱거 리며 옆문을 찾아보았다. 커다란 대문이 달린 벽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가자 나무로 만
든 외문 이 보였다. 문은 열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은 부엌이 딸린 거실 안에는 다리에 깁스를 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 학생이 앉아 있었다. 새미의 자취방보다는 크고 깨끗했지만  석민이 기대하던 집은 결코
아니었 다. 석민의 안색이 일순 변하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흠음. 석민은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여기가 새미씨 댁입니까?"

그 남학생은 한참을 탐색하듯 석민을 쳐다보다 대답이 아닌 질문을 던졌다.

"누구시죠?"

석민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선에 당돌함이 느껴졌다. 회사의  이사들도 석민의
눈초 리에 용기를 잃고 뒤로 내빼기 일쑤였다.

새미의 동생인가? 누나를 닮아 꽤나 신중하군. 석민은 아픈 몸으로 당당함을 유지하려 애쓰
는 그 남자아이의 모습에서 고집스런 새미의 얼굴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용감한 남매
로군.

새미는 커피숍에서 주문을 받아 적으며  오늘 첫 월급을 받으면 무얼  할까 생각했다. 비록
피오 레에서 일할 때보다야 적은 액수이지만  집에서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는 것보다야  낮
다. 아직은 경기가 풀리지 않아 디자이너는 불구하고 사무직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월급을 받는 대로 석민에게 천 만원 중 일부라도 되돌려 주고 싶지만 새한이
의 등록금이 당장 급해서 그럴 수 없었다. 전에 저축해  놓은 것은 이미 새한이의 입원비로
다 써버 렸다.

석민... 그 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 벌써 혜경과 결혼 한 것은 아니겠지. 새미는 한 번이라도
그 를 다시 봤음하고 생각해보다 그녀의 욕심에 스스로 비웃으며 뒤를 돌았다.

그런데, 석민이 커피숍 입구에 서 있었다. 새미는 종종 자신이 보곤 하던 환각인 줄 알고 순
간 눈을 깜박였다. 한참 후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이  아니고 진짜 석민이라는 것은 확인하고
도 한참 을 멍하니 서 있었다. 석민 역시 새미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주위의 모든 속삭
임이 귀에서 멀어지고 지구에 단 둘만이 남은 듯 서로를  강렬하게 응시했다. 비록 몇 미터
나 떨어져 있었지 만 서로의 고동치는 심장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야릇한 기운에 커피숍에 있던 몇몇 사람들도 호기심을 가지고 둘을
지 켜보았다.

마법 같은 순간을 먼저 깬 것은 석민이었다. 석민은 성큼성큼 새미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 고 아무 말 없이 문가  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아직도 넋이 빠진  새미는 무심코 그를
따라가다 그가 자신의 손에서 주문판을 빼앗아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커피숍의 문을  열자
그 때서야 그 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석민의 손을 뿌리쳤다.

"놔요."

하지만 새미의 외침에는 아무런 힘도 서려 있지 않았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석민은 뒤를 돌아 새미를 바라보았다. 새미는 자신에게 잡혔던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었다.
겁 에 질린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연약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석민은 새미를 자신의 품으로 다시 한번 끌어안고 그녀의 달콤함을 맛보려 앞으로 나가려하
는 두 손을 양복바지에 찔러 놓았다.

"할 말이 있어. 잠깐이면 돼."

잠깐? 새미는 속으로 석민이 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마지막으로 석민과 함께 할 수 있는
잠 깐이란 시간이 나에게 남아있어. 새미는 감히 석민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좋아요. 시간을 약간 낼 수 있을 거예요."

차갑게 일그러지는 석민의 입술을 바라보며 새미는 자신의 마음을 들킨 거 같아 얼굴을 붉
히고 사장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다. 새미가 사장과 대화를 하는 동안 커피숍을 살펴보는 석
민의 얼 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커피숍을 나오자마자 생각 할 시간도 주지 않고 석민은 문 옆의 벽에 새미를 밀어붙이고 거
칠 게 입을 부딪혀왔다. 새미는 눈앞에 불꽃놀이가 퍼지는 듯 정신이 아득해져 거절할 생각
도 잊 고 더 열렬히 반응을 보였다. 죽어가는 사람이 생수를 마신 느낌이었다. 얼마의  시간
이 흘렀는 지 의식조차 못하고 미칠 듯한 욕망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다. 새미에게는 영원
처럼 느껴졌다. 석민이 어렵게 고개를 들고 새미를 꼭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됐어. 좀 진정하라고."

석민도 자제하기 어려운지 가슴을 세차게 들썩이고 있었다.

석민은 새미를 더 조용한 커피숍으로 데려갔다.

커피 두 잔을 시켜놓고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석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지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군."

새미는 왠지 모욕감을 느꼈다.

"돈 많은 남자도 옛날에 만나던 애인도 없어. 나와 헤어지고 대전에 내려온 후 여기를 떠난
적 이 없더군."

말없이 커피만 젓던 새미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뒷조사라도 한 건가요?"

석민은 어깨를 약간 으쓱거렸다.

"뒷조사라고 할 것까지도 없지. 어머니와 아직 학생인 남동생과 빈약한 전세방. 그게 전부였
어."

새미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머리의 뚜껑이라도 열리는 것 같았다. 여기서 이 남자가
나 의 가족과 삶을 모욕하는 소리를 들을 이유는 하나도  없어.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고 믿는 속물 같으니라고.

"내가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퍽도 즐거웠던 모양이군요? 알았으니 더  이상
시 간 낭비할 필요가 없겠군요. 저는 당신처럼 한가롭게 커피를 마실 시간조차 귀한 하루살
이 노 동자라고요. 할 말이 그게 전부라면 저 먼저 일어서겠어요."

새미는 당당히 일어섰다. 목소리는 당차게 들렸지만 새미의 온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그 자
리 에서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앉아."

석민은 소리조차 지르지 않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서려
있 었다. 새미가 여전히 떠날 태세를 하자 무심히 말을 덧붙였다.

"새한이를 생각해봐."

새미의 눈이 두려움으로 커졌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듯 스르르 주저앉았다. 질문을 던
지 는 새미의 음성이 겁에 질린 듯 떨리고 있었다.

"새한이를 알아요?"

"여기 오기 전에 새미의 집에 찾아갔다 잠깐 얘기를 나누었지. 곧 대학을  가야겠더군. 그런
데 등록금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아. 맞지?"

새미의 입에서 히스테리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요?"

석민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새미의 심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
다 는 듯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고 거침없이 할 말을 했다.

"뭐. 회사는 나왔으니 별 관심은 없겠지만 아직은 생각했던 것보다 매상이 좋지  않더군. 몇
몇 이사들이 피오레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아."

석민 역시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잠시 말을 쉬었다가 새미에게 다음 말을 들을 시간을 줄 의
향 으로 커피를 들이켰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그녀와 다시 눈을 맞췄다.

"피오레는 눈앞에 닥친 불에만 급급해서 계약기간을 명시해 둘 생각도 못 했더군."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석민은 새미를 보며 만족스러운 듯 살짝  웃었다. 마치 야생의 사자가
맛 있는 먹이 감에게 보이듯 벼랑으로 내모는 미소였다.

새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렀다.

"나에게 무얼 원하죠?"

기다렸다는 듯이 석민이 새미의 매혹적인  자태를 위에서부터 훑어보며 유혹하는  목소리로
느릿 하게 말했다.

"새미가 더 잘 알잖아? 항상 내가 새미에게 원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지."

새미는 저릿한 전기가 온 몸을 쓸고  지나가자 숨을 들이쉬었다. 방안이 더워진 것  같았다.
석민 을 떠난 후 그의 곁에 그대로 머룰 걸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었다. 그 없이 사는 것
보다는 차 라리 그의 정부로 남는 것이 행복할 것 같았다. 사실, 지난 시간은 사는  게 아니
었다.

하지만, 석민이 어떤 남자인지 잊고  있었다니. 야비하게 사람을 구석으로 몰아붙이고  다른
선택 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내가 여기서 지면 나도  저 인간과 같은 족속으로 전락하고
마는 거 야. 결혼은 어디에든 내세울 수 있는 여자와 하고, 나는 밤의 노예처럼 값비싼 아파
트에 가둬 둘 생각이겠지. 진심으로 대한다고 여자가 믿게 만들어 자기 욕망만 채우려 드는
이, 이 나쁜 놈.

"그 대신 네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해봐. 커다란 아파트, 외제차, 비싼 옷들.  네 동생의
등록 금은 물론이고.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주겠어. 최고로만!  내가 네 몸만 원한다고
볼 때 너 에게 수지맞는 장사잖아."

새미는 화가 나 앞 뒤 가리지도 않고 물 잔을 들어 그에게  던졌다. 그의 멋지게 이마 뒤로
넘긴 머리가 이마위로 미끄러졌고, 물방울이 최고급 양복을 적시며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커피숍 의 모든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새미는 자신이 한 짓을 깨달았다. 석민이 아무리  참을 수 없는 말을 지
껄여 도 이런 식으로 폭력으로 대응하면  안 되는 거였어. 한 순간이지만, 진심으로  후회했
다.

석민은 이를 악물고 죽일 듯이 새미를 노려본 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와 옷을 닦
았 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친 손길로  위로 쓸어 올리며 분노를 자제하려 애썼다.  그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석민의 손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새미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도 여전히 카리스마를 뿜
어내 고 있는 그의 남성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석민의 복수에 찬 반응만을 기다리며 새미의 입은 바짝바짝 말라갔다.

하지만 석민은 조금 전의 무례한 새미의 태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톤
낮은 억제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피오레의 장래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말이군.  당신이 그렇게 잔인할 수가. 동고
동 락 했던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려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소리인가."

마치 새미의 비인간적인 면에 실망이라도 했다는 말투였다. 새미는 기가 죽은 자신 없는 목
소 리로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당신은 미쳤어요... 이런 더러운 협박으로  내가 다시 당신에게로 돌아갈 거라  생각하다니.
마, 마음대로 하세요. 피오레는 이제... 당신 거예요."

"사실 나도 조그만 중소기업 따위에는 관심 없었어. 그  보다 더한 가능성을 지닌 회사들도
버티 지 못하고 망하는 형편이잖아?"

석민은 차분하게 대화를 이끌어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미소까지 지어가며. 정말  대단
한 남자였다.

직장을 못 구해 힘들어하던 나에게 그렇게도 하고 싶던 일을  주신 사장님, 친절한 회사 사
람들, 곧 결혼하게 될 미스 고. 모두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새미는 고개를 세차게  흔
들었다. 돈 때문에 몸을 판 것은 한번으로 족하다. 석민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 단지 욕망만으로 한 회사를 무너뜨리려 하고, 나를 돈에 환장한 여자로 보지
않던가.

"당신 같은 악어들만 있는 세상에서 그게 피오레의 운명이라면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새미 역시 갈등을 속으로 삼키며 웃음을 보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윗니만 보이
는 어색하게 일그러진 미소였다.

석민은 예상했던 대답인지 놀라는 시늉도 보이지 않고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날씨 얘기를
하 듯 아무런 억양도,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셋이 살기에는 집이 비좁더군. 그나마 그런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리라는 보상도 없지만."

순간 새미는 숨쉬는 것을 잊어버렸다.

"너의 주인집에 압력을 넣을 수도 있어. 이 추운 겨울에  다시 집을 장만하게 하는 것은 늙
으신 어머니에게 못할 짓이야. 그렇지?"

"농, 농담이죠?"

숨을 꼴깍 삼키며 어렵게 나온 새미의 대답은 차라리 애원에 가까웠다.

"어떻게 생각해?"

석민은 새미에게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루었다. 자신이 던진  상황에서 헤어적대는
그녀 의 몸부림이 즐겁다는 듯이.

이제 새미의 물기에 젖은 검은 눈동자에는 어찌할 수 없는 패배와 아픔이 묻어 있었다.

새미는 힘없이 조금 전에 던진 질문을 다시 던졌다.

"원하는 것이 뭐예요?"

석민의 눈이 반짝였다. 이미 자신이 승리했다는 것을 아는 자의 만족감에 젖은  눈빛이었다.
한 번도 협상에서 진 적이 없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다시 나에게로 와. 두 번 다시 나 몰래 도망가지도 마!"

새미는 예스라는 대답대신 그에게 쓰디쓴 감정을 뱉어냈다.

"당신을 증오해요."

이미 자신이 졌다는 것을 인정한 새미의 마지막 말에 석민은 승리감에 젖은 미소를 보이며
여 유있게 남은 커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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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석민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대전에서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지금까지 별다른
설 명을 하지 않고 새미를 이 곳으로 데려왔다.

새미는 피오레에 출근할 때마다 지나치던 높다란 건물 앞에 석민이 차를 세우자 어리둥절해
졌 다. 석민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맨  꼭대기 층으로 새미를 이끌었다. 알 수 없는  공포가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회장님 계신가?"

석민은 비서가 들어가라는 소리도 하기 전에 새미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성 그룹의 회장, 즉 석민의  아버지는 석민과 새미를 한번보고는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다시 보던 서류로 눈을 돌렸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회장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말을 했다.

"지금은 업무시간이다. 사적인 말이라면 집에 가서 하거라."

새미에 관한 얘기라면 들을 필요도 없다는 거절보다도 더한  엄포였다. 새미는 모욕감에 온
몸 이 새빨개졌다. 도대체 석민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건지 알 수가 없
었다.

"제가 결혼 할 여자입니다."

회장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결혼이라고? 새미의 눈에서 불꽃이 터졌다. 무슨 속셈이지?

"아버지의 허락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반대를 하든 상관없이 저는 결혼합니
다."

석민은 최후통첩을 하듯 비장한 어조로 말을 마쳤다.

회장은 눈썹만 살짝 치켜 뜰 뿐 아들의 태도에 화조차 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럼 내 허락도 필요 없겠구나. 가보거라!"

이름도 없는 회사를 물려받은 후 국내 재계 30위안으로 성장시킨 인물답게 근엄하고 초연한
자 세였다. 말을 마친 후 석민의 반응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인터폰을 눌러 비서에게 명령
을 내렸 다.

"최 실장 지금 당장 오라고 해!"

화가 난 석민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회장의 바로 앞에 섰다.

"제 인생조차 항상 아버지 뜻대로 하셨죠. 이번엔 절대로 그렇게 안 될 겁니다."

회장의 냉담한 환영보다 독선적인 석민에게 더 화가 난 새미는 석민의 아버지 앞이라는 생
각도 까맣게 잃고 석민에게 소리쳤다.

"난 당신과 결혼하지 않아요.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죠?"

"여기는 아버지 앞이야. 아버지 앞에서 당신과 다투고 싶지 않아.

기가 막힌 듯 새미를 바라보던 석민은 새미를 무시하고 다시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
지 만 이미 받은 무시만으로도 반쯤 이성을 잃은 새미에게는 기름에 불을 끼얹는 격이 되고
말았 다.

"당신이야말로 내 말 제대로 들어요.  여기까지 강제로 끌고 와서  결혼하자고 말하면 제가
감격 해서 받아들일 거라고 믿었나요? 내가 당신이 싫다고 도망가서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
인데 말도 안 되는 장난은 이것으로 충분해요. 아버지 앞에서  맘에도 없는 쇼할 생각 말라
고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는 결혼하지 않아요."

석민에게 달려들 듯 씩씩거리며 새미는 소리를 쳤다. 말을 마친 새미는 아직도 흥분을 가라
앉 히지 못하고 거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석민 역시  화가 나고 황당하여 말없이 새미를
노려보 았다.

석민의 말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던 강회장이 하던 일을 멈추고 신기한 듯 새미를 주위 깊게
살 펴보기 시작한 것을 두 사람 모두 알아채지 못했다.  새미를 바라보는 회장의 눈빛이 이
상한 빛 을 발하며 반짝였다.

새미의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석민이 작게 중얼거렸다.

"제정신이 아니군..."

"하!" 새미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저 치에게 다시 넘어가면 사람이 아냐!

"아버지 앞에서 나와 결혼하겠다고 적당히 시위한 후 또 나를 속여 당신의 정부로 남겨두려
한 다는 것을 내가 모를 까봐서요?"

새미의 공격에 화가 난 석민의 팔뚝에 힘이 잔뜩 들어가더니 새미를 흔들며 소리치기 시작
했다.

"내 말 들어! 난 너와 결혼 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미 이성을 잃은 새미도 세차게 석민의 손을 뿌리쳤다.

"아니요. 죽어도 당신과는 결혼 안 해요. 최소한의 신뢰조차 남아있지 않은데 어떻게 결혼을
해 요?"

석민에게서 고개를 돌린 새미는 강회장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잘난 아들과 결혼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허리를 숙여 꾸벅 절까지 끝낸 새미는 입을 짝 벌린 꼭 닮은 두 쌍의 눈동자를 무시하고 문
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지만 새미의 용감한 시도는 분노로  치를 떠는 무례한 한 남
자의 방 해로 몇 발자국 못 가서 저지 당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석민은 돌아서는 새
미의 팔을 붙 잡고 자기 쪽으로 잡아 당겼다. 거세진 호흡을 잡기 위해 애쓰며 새미를 노려
보았다. 둘의 시선 의 공중에서 부딪히며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회장의 얼굴에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음을 겨우 참고 있는 모습이
역 력했다.

석민은 이를 악물고 새미에게 경고했다.

"한번만 더 내 앞에서 돌아 나가봐. 가만 두지 않겠어!"

갑자기 강회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강회장의 존재를 잊고  있던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 랐다. 석민의 잡고 있던 새미의 팔을 황급히 놓았다.

강회장의 웃음소리에 겨우 이성을 되찾은 새미의 얼굴이 홍당무보다  더 발갛게 변했다. 내
가 방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새미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웃음을 멈춘 강회장은 너무 크게 웃어 눈가에 어린 눈물을 닦으며 석민에게 말했다.

"네가 설득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너의 신부 같구나."

석민의 몇 초 동안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 너의 아가씨와 단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다. 너는 나가있거라."

어느새 근엄한 대기업의 회장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 는 목소리였다.

"안돼요. 아무리 아버지라도 새미에게 상처 주는 것은 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간 석민은 아버지의 명령에도 아랑곳없이 힘주어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밝 혔다.

"상처주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나가거라!"

"아버지!" 석민이 으르렁거렸다.

부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새미는 분위기가 거칠어지자 얼른  석민에게 다가가 그를 말렸다.
나 로 인해 아버지에게 대들게 할 수는 없어. 석민의 아버지께서 무슨 말을 하실 지는 이미
짐작이 되는걸. 석민이 이렇게 어리석게 나오는 한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다.

"저는 괜찮아요."

새미가 석민의 팔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뒤돌아본 석민은 새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양해를
구하 자 짧은 욕설을 들릴 듯 말 듯 내뱉더니 밖으로 나갔다.

석민이 사라진 문이 닫히자 강회장은 인터폰으로 비서에게 명령을 내렸다.

"여기 차 두 잔 가져오고 내가 명령할 때까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아요."

자리에서 일어난 강회장은 사무실의 한가운데 놓은 가죽 소파의 상석에 앉은 후 새미에게도
앉 으라고 권했다.

새미는 각오는 되 있지만 은근히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몸이 약하게 떨리는 것은 막을 수 없
었 다. 이미 약혼한 아들을 유혹하는 여자에게 어느 부모가 화를 내지 않겠는가. 소파에  다
리를 모 으고 다소곳이 앉아 강회장의 비난이 쏟아지길 기다렸다.

조금 전 당차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모습과는 달리 연약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새미
의 모습을 관찰하는 강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마침내 강회장은 입을 열었다.

"왜 내 아들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거요?"

예상치 못한 회장의 질문에 놀란 새미는 고개를 번쩍 들고 강회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귀
가 과연 정상인지 의심스러웠다. 가문도 돈도 없는 여자가  약혼한 아들을 유혹하는데 궁금
한 것이 고작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라고?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새미는 생각없이 입을 열었다.

"석민씨는 거만하고 독재적이고 이기적이에요. 다른 사람의 생각 따위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 고요,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해요."

새미의 입에서 석민의 단점들이 마구 터져 나왔다.

"음, 듣고 보니 과연 결혼하기에는 내 아들이 부족한 점이 많군.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장
점도 하나 둘은 있을 테니 내 아들의 청혼을 심사숙고해 보지 않겠소?"

"네?" 아주 잠시 새미는 자신의 혼이 나가버리는 줄 알았다.

"내 아들은 화를 내는 적이 없지. 하지만 아가씨 앞에서는 이성을 잃더군. 내 아들이 누군가
에 게 그 정도로 신경을 쓴 적은 아마 없었을 거요."

"하지만 석민씨는 이미 약혼했잖아요?" 새미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석민이가?" 되묻던 강회장은 비로소 모든 사정을 알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내 아들은 아직 누구와도 약혼하지 않았소. 사실 석민이의
결 혼은 포기하고 있었거든. 자기 주장이 강한 탓에 결혼을 강요하는 것은 꿈도 못 꿨지. 이
제 오 해가 풀렸소?"

새미의 얼굴이 더욱 발개졌다.

"사랑이 무언지 모르고 자란 아이요. 새미양이 사랑이 무언지 가르쳐 주시오."

새미는 강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회장실을 나섰다.

석민은 애가 타는지 비서실을 왔다 갔다 하다 새미가 나오자 그녀의 손은 잡고 걱정스런 눈
빛 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소?"

"아! 네."

강회장과의 대화로 정신이 멍해진 새미는 석민의 질문을 이해하기 어려운지 눈을 몇 번 깜
박이 다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를 보듯 석민을 바라보며 새미는 생각에 잠겼다. 혜경과는 약혼한 적이 없다.
이 상한 떨림이 새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다시 새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
다. 아 파트에서의 석민과 혜경의 키스신이 떠오르자 새미는 아직도 고통을 느꼈다.  영원히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석민을 따라 조용히 그의 아파트로 들어왔다.

모든 것이 옛날과 다름없었다. 새미는 세차게  뛰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었다. 흥분,  기대,
고 통, 모든 감정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주위를 둘러보던 새미는 뒤를 돌아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석민의 깊고 검은 눈을 바라보았
다. 새미가 알고 싶어하는 모든 해답이 그 속에 들어있는 듯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빛이었다.
시간 이 정지하듯 아주 오래 동안 둘은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새미는 울고 싶어졌다. 석민에게서 도망쳐 나온 이후로  황폐해져만 가던 지난 시간
을 돌이켜 보았다. 삶의 의미조차 잊은  듯 몇 주 동안 집밖을 나가지  않고 자신만의 세상
속에서 살았다. 서울을 떠난 이유조차  말하지 않는 딸로 인해 어머니는  걱정으로 애가 타
들어가셨지.

밤이 되면 잠을 자고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먹을 뿐 메모리가 저장된 자동인형 같았다. 오직
한 가지 기도만을 쉬지 않고 읊조렸다. 제발 석민씨를 잊게 해달라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무
엇이든 하겠다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오늘은 그의 꿈으로 인해 베
개를 흥건히 적시지 않았음을 발견하는 날이 오기만을 기도 드렸다.

사는 순간 순간이 고통이고 인내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다시 그가 나를 찾아왔다. 결혼이라
고? 진심일까. 두 번 다시 그를 믿기가  두려웠다. 이제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상처를 받게
되면 나 는 고통으로 그 자리에서 숨이 멎어 버릴 거야...

"난 당신과 결혼하지 않아요."

백미터 달리기 경주라고 나간 듯 새미는 재빨리 말을 마쳤다. 석민 보다는 그녀 스스로에게
다 짐하는 투의 어투였다.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영영 유혹해 굴복하게 될까봐.

"아니, 당신은 나와 결혼할거요.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석민의 흔들림 없는 강한 확신에 찬 목소리가 새미를 괴롭혔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
면 영원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곁에서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만 한다. 언젠가는 난 미치고 말겠지.

새미는 석민이 무슨 말을 하든 듣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가 찾을 수 없는 어디론가 달아나
꽁 꽁 숨어서 상처를 줄 일도 받을 일도 없는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살고 싶었다.

새미의 눈에서 온갖 감정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석민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한 순간 새미
의 감정이 움츠려 들며 자신 속으로 깊숙이 숨어버리는 것을 감지하고 한 발자국 앞으로 다
가섰다.

그리고, 그만의 특유의 그윽한 음성으로 새미를 녹이려는 듯이 청혼했다.

"나와 결혼해주시오."

충격을 받은 듯 새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며 뒷걸음쳤다.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는 듯 두 손으로 온 몸을 감싸안고 굴복하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감았다.

왜요? 왜 나와 결혼하려 해죠? 책임감  때문인가요? 나와 결혼하고도 바람을 피울 건가요?
수 많은 질문이 머리에서 아우성쳤지만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간사한 감정은 기쁨
으로 부 풀어지며 아무 이유도 물어보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속삭였다. 네가 원하던  거잖아.
이유가 무슨 필요야. 받아들여. 그냥 예스라고 대답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새미는 눈을 뜨고 석민에게  주저하듯 물었다. 그의 대답이 두려운
듯 겁에 질린 확신이 없는 목소리였다.

"왜..."

석민이 움칠하며 망설이다 초연한 자세를 취하고 입을 열었다. 비장함이 서려있는 목소리였
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아뇨! 아니에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새미는 믿고 싶어하는 자신을 부정하듯 거센 목소리로 부정했다.  깨진 항아리에서 꿀이 빠
져나 가 듯 새미의 온 몸에서 힘이 사라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놀란 석민은 재빨리 다
가와 무릎 을 꿇어앉고 그녀를 부축했다. 석민의 포옹을  거절할 힘조차 새미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석민의 빠르게 뛰는 심장고동 소리가 새미의 귀를 때렸다. 석민은 위로하듯  그녀를
안고 그녀의 머리 에 자신의 턱을 기대고 두 눈을 감았다. 들 끊는 자신의 감정도 자제하기
어려웠다. 그의 가슴 이 거칠게 들썩거렸고 두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석민 역시 하염없이
떨고 있었다.

몇 초인지 몇 분인지 모를 시간이 흐른 후 새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영혼을 숨김없는 드러
내 며 석민을 바라보았다.

"나를 사랑해요?"

새미의 눈에 담긴 연약함과 순결함에 석민은 목이 매여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걸 눈치채지 못했어? 매순간순간마다 내  영혼이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당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려 애쓰는 것을 몰랐단 말야?"

새미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가슴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외침이었다.

새미의 고백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석민의 모든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 까맣게 짙어진
그 의 눈동자가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거부의 빛을  띠었다. 그녀의 말을 믿으려 안간힘을
쓰는 석 민의 고뇌가 생생히 그녀에게 전해졌다. 그 순간 새미는 깨달았다. 이 남자도  역시
사랑으로 상 처받을까 두려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새미는 거의 전율에 가까운 황홀함을 느꼈다. 새미는 이제 석민의 사랑을 믿을 수 있었다.

석민은 가슴속에서 일고 있는 자신과의 전투에서 이겨내려 두 눈을 꼭 감았다. 그의 날카로
운 긴장이 새미에게 잡혀질 듯 전해졌다.

싸움이라도 거는 날이 선 목소리가 석민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날 사랑한다고 말해서 나를 위로할 필요 없어.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
고 있어. 난 지금 너에게 사랑을 달라고 애걸하는  것이 아냐! 단지 곁에서 네가 나를 사랑
하게 만 들 시간을 달라는 것 뿐이라구!"

석민은 거의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새미는 더 이상 석민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눈빛으로, 심장의  박동소리로, 온 몸으로
석민 은 새미에게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새미의 얼굴에 북극의 빙산이라도 녹일 정도로 따
뜻하고 섹시한 미소가 그려졌다.

"당신을 향한 사랑을 들킬까 두려웠어요. 나의 사랑을 눈치  채버린 당신이 비웃을 까봐 숨
기기 에만 여념이 없었어요."

"아니, 나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도망가려 하지 않았을 거야. 당신은 기회만 있으면 달아나지
못 해 안달이었잖아?"

석민의 그 동안의 상처를 내보이며 고함치듯 외쳤다.

새미는 석민의 진한 외로움과 원망이 섞인 눈빛에 가슴이 아팠다. 새미는 두 손으로 석민의
얼 굴을 감싸며 온 정신을 다하여 석민에게 키스했다. 새미의 영혼을 주는 간절하고 애틋한
키스 였다. 거부하려 망설이며 뒤로 물러나던 석민의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가듯 온 몸이 떨
리며 주 체할 수 없는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갑자기 석민은 알아듣기 힘든 단어들을 쏟아내며 새미를 세차게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에 키
스 를 퍼붓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댐이 무너지듯  밀려드는 폭포수 같은 감정에 전복되
어 강해 지는 욕망을 멈출 수 없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서로의 옷을 거칠게 벗기며 서로에게 정신없이 몰입했다. 새
미 의 셔츠가 찢어졌지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새미의 옷을 다  벗기기도 전에 석민은
그녀에 게 파고들었다. 새미가 기쁨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픔 때문으로 착각한 석민은  속도
를 늦추려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새미를 달랬다. 욕망으로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미안, 참을 수가 없어."

"난... 괜찮아요."

새미는 허리를 위로 들어올리며 석민을  자극했다. 석민은 거실 바닥이라는 장소도,  시간의
흐름 도 모두 잊고 태초부터  신이 내려준 움직임으로 새미에게 더  깊고 힘차게 다가갔다.
마지막 절 정의 순간에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고함이 석민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새미가 황홀감에서 서서히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 석민은  아직도 새미의 안에 있었다.
여 전히 석민의 심장박동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새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낸 요부와
같은 달 콤한 미소를 석민에게 보내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석민이 거칠게 새미에게서 떨어
졌다. 그는 스스로가 역겹다는 듯이 머리를 쥐어짰다.

새미는 그가 차갑게 변하자 환하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어리둥절해하며 새미가 석민을
바 라보자 석민은 후회하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새미를 다시 부드럽게 끌어안아 그녀의 목
에 머리 를 묻었다.

"용서해. 다시 발정 난 동물처럼 널 안다니. 난 진짜 어쩔 수 없는 놈이야."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새미의 눈동자가 안도감으로 일순 반짝였다.

"당신을 너그러이 용서해 드릴게요."

석민이 고개를 들자 새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헝클러진 아름다움에 다시 다리 사이가
팽 팽히 긴장되자 석민은 고개를 숙여 짧게 키스를 한 후 새미의 옷을 바로 입혀주었다. 새
미는 석 민에게 위험덩어리였다. 새미는 석민의 애정 어린 키스를 받으며 비로소 자신이 완
전해지는 것 을 느꼈다.

그의 안락한 품에 안기어 나른한 만족감을 즐기던 새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백화점 품평회 때 당신이 심사위원으로 나타났을  때에는 하늘을 원망했지만, 지금은 내가
품 평회의 대표로 나간 일에 감사드려요. 다른 사람에게 그 임무가 주어졌다면 우리는 영원
히 만 나지 못했을 거예요."

새미는 상상만으로도 겁이 나는지 몸서리를 치며 더욱 세차게 석민의 품으로 안겼다.

석민은 끙하고 알아듣기 힘든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아직도 그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새미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웃으며 애교스럽게 석민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아뇨.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석민은 다시 한 숨을 내쉬더니 고해성사를 하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그랬어."

"뭘요?"

새미는 여전히 고양이처럼 그의 품에서 장난치며 석민의 말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되묻
었다. 석민의 어깨에 힘이 조금 들어가며 새미를 더욱 세게 끌어안고 설명했다.

"너를 품평회에 보내라고 내가 너의 사장에게 압력을 가했지."

새미가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참가 신청서에서 너의 이름을 보았어. 디자이너 진새미! 흔한 이름은 아니잖아? 혹시나 하
고 알아보니 5년 전 나를 바보로 만들고 달아나  버린 신비의 아가씨와 동일인이더군. 비서
실장이 가져온 사진 속에 담긴 갸날퍼 보이는 너의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뛰는 거야. 정말
이지 기대하 지 않은 이상한 감정들이 기어 나오더군."

새미는 생각지도 못한 그의 고백을 들으며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네가 달아난 후 몇 년간 너의 기억을 끌어안고 산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널 잊었다고 자
위하 고 살아왔거든. 확인 할 필요가 있었지. 처음에 피오레에게 참가 승인을 한 것은 그 이
유뿐이었 어. 내가 그 동안 환상 속에 살았고, 실제의 넌 그다지 신비롭지도 아름답지고  않
음을 확인하는 것. 나의 자기기만이었지... 의상을  설명하는 당당한 널 다시 만나자  여전히
널 처음 본 순간처 럼 숨이  멎는 거 같았어.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나의 떨리는 목소리를
알아챌까 봐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어. 넌 나를 기억도 못하는 것 같아 미칠 것
같았지."

"저도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요. 내가 하는 말조차 의식할 수가 없었는걸요."

새미의 눈빛이 꿈을 꾸듯 부드러워졌다.

"넌 완벽하게 잘 해냈어." 석민이 새미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회상하듯 미소를 지었다.

"품평회를 끝내고 혼자 사무실에서 진정한 후 다시  네가 있는 품평회장으로 돌아갔지... 그
때 까지도 긴장 한 이유가 단지 널 다시 봐서 일  뿐이라구, 너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되
뇌였지. 하지만 네가 같이 온 남자에게 미소를  짓는 것을 본 순간 질투가 났어. 넌  아직도
내 여자였던 거야."

"조부장과는 아무 사이도 아닌 걸요."

새미는 말도 안되는 석민의 오해에 기겁하며 부인했다. 석민은 사랑스럽다는 새미를 바라보
았 다.

"알고 있어. 너와 눈이 마주 친 순간 우리 사이에 전기가 오고갔지. 너도 나를  잊지 못하고
기 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 아닌 척 부인해도 나를 무시할 수 없었던 거야."

그 날 석민과 재회한 후 겪었던 격렬한 가슴앓이가 떠오르자 새미는 얼굴을 찡그렸다.

"전 그 날 회식에도 참석 할  수가 없었어요. 정신이 아득해져 혼자 집으로  왔어요. 누구도
만나 고 싶지 않았어요."

석민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더니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거짓말! 난 그날 너의 집을 찾아갔지. 너와 자연스럽게  만남을 이루어갈 생각이었어. 다른
커 플처럼 평범하게 데이트라는 걸 신청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네가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
고 바 로 내 눈앞에서 유유히 사라지더군.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질투가 나를 갉아먹기 시
작한 거야.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위험한 계획들이 떠올랐지."

새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날로 생각을 더듬어 올라가서야 하겸과 저녁을 먹으러 나
갔 던 일이 떠올랐다.

"데이트 신청을 하려고 나를 찾아왔다고요?"

"응. 정중하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부탁을  한 후 최고급 음식점으로 모실  생각이었어.
로맨 틱하고 부드럽게!"

석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새미는 웃고 말았다. 석민이 명령이  아
닌 부탁을 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 대신 너를 옮아 매는 방법들을 고안했어. 네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그
때는 너를 그 어린 남자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제정신이  아니었어. 품평회 결과를 발표하는
날 내가 직접 피오레의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유감이라는 뜻을
밝혔지. 그 리고 새미씨의 디자인은 정말  인상 깊었다고,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새미씨를
사업적으로 만 나고 싶다고 뜸을  들인 후 전화를 끊었지. 파탄지경에  이른 회사 재무상태
때문에 물불 못 가리 는 사장이 미끼를 물고 너를 보낼 거라고 예상했지. 하지만 넌 정의에
불타는 잔다르크처럼 화 를 내며 내 제안을 거절했어."

석민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무실에서의 화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어느 때 보다도
아 름다웠지.

"하겸이와는, 하겸이가 그 남자예요. 그 애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어요. 저에게는 거의
가 족 같은 친구예요."

웃음을 멈춘 석민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터뜨렸다.

"네가 내 제안을 거절하자 난 안도했어. 그리고 다른 식으로 너에게 접근 할 방법을 모색하
기 시작했지. 그런데 네가 먼저 연락을 한 거야. 믿을 수 없었지. 난 우리의 첫 데이트를 위
해 만발 의 준비를 했어. 내가 너에게서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5
년 전 멈추어 진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해 보였어. 너와의 하룻밤은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밤 이었거든. 레스토랑을 물색하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자리, 음식, 5년
전 함께 춤추었던 음 악까지 신청해  놓았지. 난 정말 자제력을 발휘하려 노력했다구.  네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 까지는! 네가 돈 얘기를  꺼냈을 때는 널 죽이고도 싶었지. 넌 내
가 상상했던 환상을 여지없이 깨트려 버렸어. 넌 돈만 밝히고, 남자를 쉽게 옮겨 다니는  내
가 평소에 멀리하던 타입이었어."

"아니에요!"

새미는 강하게 부인했다. 자신이 저지른 결과였지만 석민의 오해에 가슴이 아팠다.

"그건, 전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동생 사고 때문에..."

새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려웠던 생활, 하겸과의
우 정, 동생의 사고. 조용히 새미의 설명을 듣고 있던 석민은 새미가 설명을 마치자  그녀를
온 힘 을 다해 끌어안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바보처럼... 날 믿고 사실대로 말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아무 조건도 없이 너에게 그냥 돈을
주 었을 거야. 그렇다면 너에 대한 오해로 내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악몽에 시달렸어요?"

"밤마다. 네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꿈, 나에게서  달아나는 꿈. 네가 메두사로 변하여 나
를 꼼 짝 못하게 만드는 꿈까지." 마지막 말은 석민이 장난으로 덧붙인 말이었다.

"아무도 없었어요. 오직 당신뿐이었어요."

새미의 고백에 석민의 온 몸이 긴장하더니 새미에게 부드럽고  에로틱한 키스를 하였다. 석
민이 입술을 떼자 새미가 황홀한 미소를 지워보였다.

"그래도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잖아요." 새미는 그 사실을 지적했다.

"후, 그랬지. 이성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일어나 널  혼자 남겨두고 떠나나고 부추겼지만, 내
입 술은 이미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있었지. 다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어. 우선 네가  애인
은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나를 안심시켰지."

"애인이 아니라니 까요!"

"알아, 안다고!" 석민은 장난스레 대꾸한 후 새미가 울어 발개진 불을 살짝 꼬집었다.

"널 사랑 할 생각은 없었어. 단지 지긋지긋한 욕망을 해소하면 자연히 너에 대한 갈망도 사
라질 거라고 생각했어. 약속한 한 달이 지나면 깨끗이  널 지우겠다 맹세했어. 하지만, 같이
살기로 한 첫날 밤늦도록 네가 나타나지 않자 나는 성난  사자처럼 변하고 말았어. 네가 나
의 아파트에 나 타났을 때, 거실 한가운데 서 있을 때... 넌 너무나 연약하고 여성스러워  보
였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겁에 질려  있었지. 널 욕망에 사로잡혀 어찌해보기에는  내가
죄를 짓는 느낌조차 들 었어. 욕망 그 이상의 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어. 널 사랑해서,
널 너무나 사랑해서 복수나 다른 이유로는 널 안을 수가 없었어...."

석민은 시를 읊는 듯한 애원이 담긴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하며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찾
았 다. 새미가 나긋하게 몸을 밀어오며 원하던 반응을 보이자 키스만으로는 참을 수 없었다.
새미 를 그의 침실로 안고 들어가 부드럽게 침대에 내려놓고 숭배와 사랑을 담아 느리고 완
벽한 사 랑을 나누었다.

서로의 품에 안기어 그 동안의 오해를 풀며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당신과 혜경이 아파트에서 키스하는 것을 봤어요."

혜경이 찾아왔던 일을 설명하는 새미의 눈빛에는 아직도 상처가 묻어 났다.

"맙소사! 그래서 아무 설명도 없이 달아난 거야?"

새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녀의 눈에는 의심이 남아 있었다. 석민은 기가 막힌
듯 소리를 지르다 그녀를 강하게 잡아 당겼다.

"제길! 네가 사라졌을 때 얼마나 걱정했다고. 넌 차라리 남아서 나에게 화를 내는 방법을 택
해 야 했어. 그녀와는 아무 사이도 아냐! 가족끼리 가까워서 얼굴만 아는 사이라고. 거실 안
으로 들이지도 않았다구! 그 날도 널 기다리는데 찾아와서 강제로 달려드는 거야. 순간적으
로 너무 황당하여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지. 네가 더 오래 지켜보았다면 내가 그녀를 뿌리
치고 거절하 는 것을 보았을 거야."

그랬다면 우리가 두 달 동안 헤어져 있을 이유도 없었고요. 새미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혀를
차 며 속으로 덧붙였다.

석민은 없어진 그녀를 찾기 위해 회사도 나가지 않고 사람들을 고용하여 사일 밤낮을 미친
듯 이 뛰어다닌 기억이 떠오르자,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은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새미를 가
슴에 안 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떨리는 감정을 진정시켰다.

"그 전 날 너의 보고 싶다는 고백을 듣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어.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 지만, 나머지는 다른 직원에게 맡기고 당장 서울행 비행기를 탔지. 너를 놀라게 해  줄
생각으로 연락은 하지 않고 케익과 꽃다발,  선물, 그리고 반지를 사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
지."

"반지요?" 새미의 눈동자가 커지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반지. 약혼 반지였지.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나를  그리워하고, 나를
위 해 눈물을 보이었지. 아버지의 결혼 생활과 형들의 애정 없는 정략결혼을 지켜보며 절대
로 결 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너의 눈물은 내  마음을 녹이었어. 돈과 권력과의 연
계를 위한 결혼보다는 사랑은 아닐지라도 너의 눈물이 훨씬 결혼에는 합당한 이유처럼 보였
지. 하지만 아 무리 기다려도 네가 오지 않을 때의 낭패감이란."

석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바로 옆에 놓인 서랍을 열고 조그만 상자 두개를 꺼내어 새미에게
건 네주었다. 새미는 숨을 죽이며 첫번째 상자를 열었다. 새미는 숨이 멎은 듯 말문을  열지
못하고 글썽이는 눈으로 석민에게 감사를 대신했다.

"네가 놓고 간 목걸이. 너를 다시 만나면 꼭 전해주어야 할 거 같아서, 언젠가 너를 찾을 거
라 는 확신이 있었지. 잠을 못 이루는 밤이면 이 목걸이를 꺼내 놓고 위로를 받았지. 이 목
걸이는 너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였으니까."

새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 아버지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았던 목걸이를 바라보았
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기에 새미의 기쁨은 더했다. 소박한 금줄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는
무엇 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다음 상자도 열어봐."

석민은 긴장하면서 재촉했다. 새미는 목걸이를 제자리에 넣어 서랍  위에 올려놓고 다음 상
자를 숨을 죽여가며 열고는 탄성을 터뜨렸다. 한가운데 루비가  달려있고 그 주위로 조그만
다이아몬 드로 수를 놓은 아름다운 반지가 나왔다.

"넌 내 생애 유일한 사랑이야."

석민은 새미가 반지를 보는 순간 고백했다.

새미의 눈앞이 감격으로 인해 눈물로 얼룩졌다.

석민은 미소를 지우며 그녀의 발치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나의 신부여!"

새미는 허리에 달랑 수건만 걸치고 석민이  정중하고 자신감 있는 어조로 청혼하자  웃음을
터뜨 렸다.

"네. 나의 기사님!"

석민의 머리가 다가오자 새미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짙어졌다. 그의  영원한 약속을 담긴 키
스를 받으며 새미는 그 동안의 아픔과 눈물이 한 순간에 보상받는 것을 느꼈다. 영원히,  세
상 끝날 까지 우리는 함께 있으리라.

몇 년 후, 새미는 조그마한 침대에서 잠이 든 세  살배기 쌍둥이들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
었다. 말썽꾸러기들 때문에 낮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렇게 잠든 모습을 보고  있으
면 천사가 따로 없는 것처럼 보였다.

결혼을 하고 난 후, 석민은  새미의 재능을 썩히기에는 아깝다면서 다시  디자인 공부를 할
수 있 도록 밀어주었다. 지금은 아이들을  키우느라 잠시 쉬고 있지만, 아이들이 어느  정도
엄마의 손 길이 필요치 않게 되면 다시 일을 할 생각이다.

갑자기 방문이 덜컥 열리며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달려들었다. 새미는 놀라면
서도 무심결에 그 아이를 품에 안으며 조용히 꾸짖었다.

"쉿! 너도 네 동생들이 깨어나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알지? 조용히 해야지."

엄마의 품에서 빠져 나온 아이는 여동생들이 새근거리며 자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설레 설
레 흔들었다. 이 애들이 깨서 울기 시작하면 온 집이 떠내려 갈 정도다. 정말 지독해... 하지
만 진짜 이쁘다. 아이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작은 동생의  손을 만지며 황홀한 듯 미소를
지었다. 나처럼 크고 혼자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는 내 도움이 필요할
거야. 음, 좋 았어. 그 아이는 동생들을 위해 맹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는 내가 이 꼬
마들의 기사가 되 줄 거야. 아빠가 엄마에게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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