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편지 (시인: 이해인)

장유진


♠ 가을 편지 ♠

1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노트의 흰 페이지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놓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 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3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는 우리들이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에 목숨을 걸고 나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4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 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7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9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10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앞에
늘 소심병 환자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 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

11
뜰에는 한잎 두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시가 쌓입니다.
가을이 내민 단풍빛의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 방을 밝힙니다.

28
가을 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가을에 온 당신이 나를 떠날까
두렵습니다. 가을엔 아픔도 아름다운 것. 근심으로 얼굴이
헬쓱해져도 당신 앞엔 늘 행복합니다. 걸을 수 있는데도
업혀가길 원했던 나. 아이처럼 철없는 나의 행동을 오히려
어여삐 여기시던 당신- 한 켤레의 고독을 싣고 정갈한 마음으로
들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30
여기 제가 왔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원정인 당신.
당신이 익히신 저 눈부신 열매들을 어서 먹게 해 주십시오.
가을 하늘처럼 높고 깊은 당신 사랑의 비법을 들려주십시오.
당신을 부르는 내 마음이 이 가을엔 좀 더 겸허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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