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생님, 그리고 보고픈 여러 선생님께
어둠이 짙을수록 쇠창살이 더욱 또렷해옵니다
잠못들어 뒤척이는 수인의 고적한 어께 너머로
또 하루가 흔적없이 저물었습니다
때묻은 모포를 끌어 덮으며 아직도 다하지 못한 일들을 생각합니다
한가닥 외로운 진실을 놓지 않고
굶어 쓰러지면서도 우리와 함께 있는
이름들을 조용히 불러봅니다
세상 밖에서 가졌던 모든 것을 벗기우고
지금 알몸 위에 흰 수의를 걸치고 살아도
우리가 빼앗긴 세월을 반드시 돌려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감옥의 안에서나 밖에서나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빼앗긴 채 가슴에 수인번호를 낙인처럼 달고 살아도
아이들의 가슴속에 새기고 온 우리들의 이름은
아무도 지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뜻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이곳에서 거미줄에 날개를 묶인 곤충처럼
몸을 떨고 있기를 바란다 해도
설령 우리가 몸을 적실 물 한방울에 얽매이게 하고
배를 채울 보리밥 한 술에 무릎을 꿇게 하여도
그리하여 우리를 짐승처럼 마룻장에 뒹굴게 하여도
우리는 이 길을 곧게 갑니다
그렇게 살다 장승 죽음으로 실려 나간다 해도
우리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숨이 허공에 풀잎처럼 걸려있는 동안도
자기의 자리를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며
한 톨의 사랑도 실천하지 않는 동료들이
아직도 내 빈 의자의 옆에 가득가득 하다 해도
그들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습니다.
옳다고 믿어 이 길을 택했으므로
우리는 새벽이 오는 쪽을 향해
담담이 웃으며 갈 수 있습니다
서슬 푸른 칼날에 수천의 목이 걸리고
이 나라 땅의 곳곳이 새남터가 된다 하여도
우리는 이 감옥에서 칼날에 꺾이지 않는
마지막 이름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이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쓰러져 있어도
빛나고 높은 그곳을 향하여
누리는 이 길을 곧게 갑니다.
- 1989. 07. 24 청주교도소에서 도종환 올림..